책
구름보다 더 늙은
책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내 얼굴을 들이마시고 어루만진다,
내 마음을 제본하여 읽어 보라고 내민다.
책의 손가락이 내 속을 더듬으며
뒤틀린 내 영혼의 손목에 봉침을 놓으며 웃는다.
병원 복도에서 소리 지르는
반 귀머거리 노파,
귀먹은 책이 나를 향해 소리친다,
생의 계절은 늘 그늘이었다고.
앞을 못 보는 책은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면
낡은 귀를 쫑긋 세운다,
책의 행간을 바람이 지난다,
책의 밭고랑에 시간이 흐르며
물결친다, 책에 해일이 일어
사랑이 묻히고 죽음도 묻히고
책에 눈이 내려 어둠이 진다. (P.15 )
단체사진
이렇게 서 있으면 숨결 소리 들려오고 꼭 지난날 동료
들과 어깨를 서로 부딪히며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한 마
리 들소 같다. 캄캄한 밤, 눈은 내리고 폭풍우 불어닥쳐 눈
에 잘 보이진 않지만 느껴진다. 복잡한 재래시장, 생선 냄새
는 풍겨오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엔 옷가지가 비치고, 콧
속으로 팔짝 뛰어드는 노란 새우튀김 냄새, 그 위로 하늘
은 전봇줄에 싸인 싸구려 생선의 등처럼 약간 푸르다. 이렇
게 서 있으면 시골 집 마당의 외눈박이 채송화 같다. 장미
가 알을 배는 소리도 들린다. 나는 떡시루의 한 톨 밤알로
박혀서 발가락 끝에 살짝 힘을 준다. 꼭 예쁜 꽃 옆에만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마리 매미가 아무리 울어도 전체
나뭇잎은 시들지 않는다. 자, 여길 보세요! 눈 한 번 깜박
하고 나면 우리는 봄날 벚꽃처럼 흩어진다. (P.37 )
딴생각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한 발짝 떼어 놓을까. 가만있을
까. 다 그만둬. 딴생각이 펼쳐 놓은 마당가 바지랑대에 잠
자리가 앉았습니다. 잠자리의 눈이 닿는 곳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사는 일은 역시 팍팍합니다. 저만치 옛사랑이
흘러갑니다. 옛사랑은 비안개에 젖어 있습니다. 또 한 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냥 마구 걸어갈까. 다 그만둬. 멀
리 가로등 불빛이 안개 속에서 숨을 고릅니다. 술래의 등
뒤로 딴생각이 펄떡입니다. 길가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누군가 술래가 되면 딴생각은 그의 등뒤에서 발걸음을
살짝 죽입니다. 곳곳에 딴생각들이 무궁화꽃을 피웁니다.
사람들 마음마다 몰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P.63 )
번역의 유토피아
이곳엔 사랑이 넘실대지요.
고통도 바지를 걷고 함께 개울을 건넙니다.
수초들은 뒤엉켜 있고,
가끔 미끄러운 돌이 딛는 발을 밀쳐 내는군요.
모두 사연을 갖고 사는 세상입니다.
사연들은 글자로 서서 머릿속을 헤맵니다.
글자들에게 사연을 물으면
모두 담배나 피워 물 뿐,
수초 속에 숨은 그리움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쉽지요. (P.69 )
-김재혁 詩集, <딴생각>-에서
늦더위가 옆에 앉아 가위 바위 보,라도 하고 놀자고 착 들러붙어
있지만 끄덕도 않고 앉아 내내 일을 한다. 가위 바위 보,를 하면
어쩔 것인데..어차피 낼 모레면 떠날 너인데,
가만 생각해보니...우리는 어쩌면 너라는 책을 나라는 책을 열심
히들 읽으며 살아가는 것 같다.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는 아니더
라도. 서로의 책을 열심히 읽어가다 때로는 내가 미처 모르는
너의 다른 나라 글자가 난독으로 나타나면은 또 사전을 펼쳐놓고
번역을 해보고. 어느날 김재혁 시인이 '번역은 연옥에 말을 빠트린
후 다시 길어 올리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라고' 말했듯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의 등 뒤에서 사람들 마음마다 몰래
무궁화꽃이 피었듯이. 떡시루의 한 톨 밤알로 박혀서 발가락 끝에
살짝 힘을 주며 단체사진을 찍듯.
누군가의 마음을 건넌다는 것은 늘 실패한 첫사랑이듯, 그래서 아쉽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다가오고, 나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뜨락에 심고 따서 슴슴하고
달큰하게 소금물에 삭혀 보내온 청홍고추 마늘편 동무까지 담겨 있는 깻잎장아찌를 반찬으로
식구들과 저녁밥을 먹으리라. 생활은 양식과 같다며 밥솥에게 말하며 우리의 가슴에 던지며
당신의 몸이 당신의 밥상이듯 나의 몸이 나의 밥상이듯, 그래서 사랑은 밥상인 것을 생각하며.
이제 곧 가을이 도착할 것이다. 나의 손목에 터널증후군이 찾아오면 또 다시 가을이 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