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 서점
아마도 너는 거기서
희푸른 나무 간판에 生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것을 볼 것이다
글자 뒤에선 빼꼼히 입술을 내밀 것이다
혹은 꿈길이 머리칼을 팔락일 것이다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서면
헌책들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 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구불거리는 계단으로 다가서면
눈시울들이 너를 향해 쭈뻣쭈뻣 내려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서 겁에 질린 듯 새하얘진 얼굴로 밑을 내
려다보고 있는 철쭉 한 그루
아마도 너는 그때
사람들이 수첩처럼 조심히 벼랑들을 꺼내 탁자에 앉는
것을 볼 것이다
꽃잎 밑 다 닳은 의자 위엔 연분홍 그늘들이 웅성이며
내려앉을 것이고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주빛 오미자차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을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을, 돛들을,
떠 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 (P.9 )
혜화동
-황혼을 위하여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
는 곳,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
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
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
람 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
이 황혼 속에서 익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
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
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고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을 곁에 함
초롬리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 P.14 )
불멸
-J에게
네가 버린 담뱃갑
네가 버린 구겨진 편지지
네가 버린 일회용 종이컵
네가 버린 껌종이,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손목시계
네가 버린 거대한 기억
네가 버린 어스름
네가 버린, 심연을 떠다니는,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너로 하여 빛났던 저 잡풀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모래바람 입은 안개
너로 하여 빛났던 저 땀의 혀,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틈새
네가 버린 상징
네가 버린 고래의 날개 삼 천 리, 내 살에 덮여
이리 쿵덕 저리 쿵덕
오래된 수저 끝에서, 이리 쿵덕 저리 쿵덕
흩날리는 것들 가슴에 매달려,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영원
네가 버린 어머니의 먼 목소리
네가 버린 일기의 마지막 장
네가 버린 여름날 정오,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신
네가 버린 신념들
네가 버린 흩날리는 해방
네가 버린 자유, 접시 위에 누워, 이리 쿵덕 저리 쿵덕
네가 버린 곰국
네가 버린 김 오르는 선반
네가 버린 꿈의 연기 긴 사진들
네가 버린 불타오르는 책상, 이리 쿵덕 저리 쿵덕
흩날리는 불멸 가슴길 깊이 흐르니
어디에도 없는
어디에나 계시는 너
이리 쿵덕 삼 천 리
저리 쿵덕 삼 천 리 (P.11~13 )
주소
호젓한 밤 푸른 주소를 자꾸 써본다
무릎 끓고 자꾸 써본다
새벽을 잔등에 업어 재우며 자꾸 써본다
하오의 우체국에서 부친다
우체국엔 참, 창도 많다
휘어진 출생들이 들락거린다 쓰러진다
휘어진 주검들이 들락거린다 쓰러진다
편지지들이 소리 지른다
휘어진 주소의 몸 열려고 소리 지른다
나도 소리소리 지른다
자꾸 소리소리 지른다
가슴을 떠나보내며 소리지른다
창이 되어 소리소리 지른다 날아오른다 푸드덕푸드드덕 (P.40 )
너에게
너에게 밥을 먹이고 싶네
내 뜨끈뜨끈한 혈관으로 덮힌 밥 한 그릇 (P.44 )
떠돌이별 하나가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푸릇푸릇
빵 사이로/ 두 모랭이 지나 불긋불긋 빵 사이로/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영원은 즐거이 밤공기를 흔들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원 소리에 놀라 몸을 움추렸다, 모두 접속하고
있었다, 잠의 꿈속으로, 꿈의 접속으로, 식탁도, 가스레인
지도, 빨래대도, 컴퓨터도, 분리수거 쓰레기봉투도, 선반
들도, 즉석 해물탕도, 나도
밤의 얼굴은 부푼 빵 같았다, 즐거이 비누들도, 접속하
고 있었다
즐거이 라면들도 기나긴 선반에 업혀 접속하고 있었다
즐거이 커피도 기다림에 숨죽인 서랍에 안겨 접속하고
있었다
즐거이 새우도 마른 등 굽어 접속하고 있었다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푸릇푸릇
빵 사이로/ 두 모랭이 지나 불긋불긋 마른 새우
사이로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접속은 이 별의 미덕, 혹은 이별의 미덕
그 끝에 매달려 있었다니, 희망빛 떠돌이별 하나가, 혹
은 희망빛 도돌이표 하나가 (P.49~50 )
꽃술
저 불빛들을 어쩔 것인가
온몸이 눈이 되어 빛을 핥고 있는
보고지고 보고지고
꽃술 뛰어내림 보고지고 (P.62 )
미래
섬은 공손히 생각한다
철쭉꽃 벼랑 가슴에 받쳐 안고 공손히 생각한다
두 발 찬물에 담그고 공손히 생각한다
일찍이 나의 것이었던 너, 미래 (P.62 )
흙
눈물이 눈물의 자식을 낳아
퍼덕퍼덕 눈물의 자식을 낳아
마치 흐르는 물을 꼭 움켜쥐고 있던 자갈들처럼, 마치
날아가지 못해 안달하던 거위들처럼, 마치 흙의 주름 사
이에 슬며시 커지던 번개들처럼
흙이여, 내 잔등에 업히는 소멸들이여
흑흑 흐느끼는 탄생들이여, 부활들의 질주여
눈물이 눈물의 자식을 낳아
퍼덕퍼덕 눈물의 자식을 낳아 (P.67 )
서면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
이로/ 두 모랭이 지나 화실표 사이로/ 바리가 걸
어간다/ 마음 떨며 바리가 걸어간다
휘날리는 저물녘 속 저 등불
찢어진 페이지 사이 미처 닦지 못한 저 눈시울
눈물자욱도 짙어라, 저 황금빛 옷고름
휘날리는, 휘날리는 등꽃 터널 사이로
휘어진 길 사이로 사이로
삶의 알람 소리에 주춤거리는 저 임종 사이로 사이로
두리번두리번
부스스 샛눈 뜨는 판자벽을 지나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너무 넓은 천국을 지나
먼 것은 가까운 법
가까운 것은 멀디멀어
몸부림치는 희망을 걸어 걸어
구원, 그 먼 입술을 걸어 걸어
바리가 걸어간다/ 바리가 걸어간다/ 푸른 지평
선 황토 치마 벌리고/ 한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
이로/ 두 모랭이 지나 화살표 사이로/ 바리가 걸
어간다/ 마음 떨며 바리가 걸어간다 (P.88~89 )
-강은교 詩集, <바리연가집>-에서
![](http://image.aladin.co.kr/img/shop/2012/bd_t18.gif)
먼 길 떠나 집으로 돌아온 바리데기의 노래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강은교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번 시집에서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도처를 헤매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 아픔과 시대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 전체가 ‘바리’의 여정을 따라가듯 구성되어 있어서 각 시편들은 노래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서사적 성격이 뚜렷하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시인의 개인적 상실의 기록을 넘어 좀 더 보편적인 ‘바리(들)의 사랑 노래’로 읽힌다.
애달픈 기도들이 헤매는 이 들판 위에서 “그땐 몰랐다/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그땐 그걸 몰랐다.”
지용문학상을 수상한 강은교 시인의 시 「너를 사랑한다」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사별한 남편 시인 임정남을 추모한다. 시인은 담담한 어조로 이별 후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진실함을 노래한다.
이번 시집 『바리연가집』에서 J 또는 L. J. N.이라는 이니셜로 호명되는 그, 시인 임정남은 강은교 시인의 대학 동기이자 문학의 길을 같이 걸어온 친구, 연인이며 동반자였다. 그는 결혼 후 아내의 생명을 건 긴 투병의 시간을 함께했다.
서류의 빈칸을 채워나가다가
변호사는 그 남자의 직업란에 이르러
무직이라고 썼다
그 여자는 항의하였다, 그는 무직이 아니라고, 시인이며 꽤 유명한 민주 운동 단체의 의장이었다고,
얼굴이 대리석 계단처럼 번들번들하던 변호사는 짐짓 웃었다, ‘법적으로는 무직이지요, 취미라든가 그런…….’
그 남자는 순간 한쪽 팔 떨어져 나간 문이 되었다
먼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에 섞여 우둔한 먼지가 되었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젊은 시절
황금빛 키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자유
황금빛 키스
_ 시 「詩, 그리고 황금빛 키스」 부분
시인의 연인이자 남편, 동지이자 ‘70년대’라는 동인을 함께한 시인 임정남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지만 현실에서는 제대로 설 자리가 없었다. 시에 나오듯 이혼 사유서에 ‘무직’으로밖에 기재될 수 없었던 사람, 시인으로서도 시집 한 권 남길 수 없었던 사람을 강은교 시인은 어떻게 추모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잊어야 한다. 죽음에 관한 각종 의례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산 자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도(哀悼)라고 부르는 이러한 행위는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죽음보다 강한 무언가가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붙든 채 영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나는 그걸 발견하였지
당...
먼 길 떠나 집으로 돌아온 바리데기의 노래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강은교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자는 이번 시집에서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도처를 헤매는 바리데기 이야기를 통해 개인적 아픔과 시대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시집 전체가 ‘바리’의 여정을 따라가듯 구성되어 있어서 각 시편들은 노래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서사적 성격이 뚜렷하다. 그래서 이 시집은 시인의 개인적 상실의 기록을 넘어 좀 더 보편적인 ‘바리(들)의 사랑 노래’로 읽힌다.
애달픈 기도들이 헤매는 이 들판 위에서
“그땐 몰랐다/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그땐 그걸 몰랐다.”
지용문학상을 수상한 강은교 시인의 시 「너를 사랑한다」의 한 구절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사별한 남편 시인 임정남을 추모한다. 시인은 담담한 어조로 이별 후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진실함을 노래한다.
이번 시집 『바리연가집』에서 J 또는 L. J. N.이라는 이니셜로 호명되는 그, 시인 임정남은 강은교 시인의 대학 동기이자 문학의 길을 같이 걸어온 친구, 연인이며 동반자였다. 그는 결혼 후 아내의 생명을 건 긴 투병의 시간을 함께했다.
서류의 빈칸을 채워나가다가
변호사는 그 남자의 직업란에 이르러
무직이라고 썼다
그 여자는 항의하였다, 그는 무직이 아니라고, 시인이며 꽤 유명한 민주 운동 단체의 의장이었다고,
얼굴이 대리석 계단처럼 번들번들하던 변호사는 짐짓 웃었다, ‘법적으로는 무직이지요, 취미라든가 그런…….’
그 남자는 순간 한쪽 팔 떨어져 나간 문이 되었다
먼 사막에서 불어오는 황사에 섞여 우둔한 먼지가 되었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젊은 시절
황금빛 키스
아물아물해지는 그들의 자유
황금빛 키스
_ 시 「詩, 그리고 황금빛 키스」 부분
시인의 연인이자 남편, 동지이자 ‘70년대’라는 동인을 함께한 시인 임정남은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지만 현실에서는 제대로 설 자리가 없었다. 시에 나오듯 이혼 사유서에 ‘무직’으로밖에 기재될 수 없었던 사람, 시인으로서도 시집 한 권 남길 수 없었던 사람을 강은교 시인은 어떻게 추모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잊어야 한다. 죽음에 관한 각종 의례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산 자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도(哀悼)라고 부르는 이러한 행위는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죽음보다 강한 무언가가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붙든 채 영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날 나는 그걸 발견하였지
당신이 버리고 간 시는 총 다섯 편이더군
그때 눈이 왔었는지, 만년필로 쓴 시가 눈물방울에 얼룩져 있었어
(중략)
이젠 금빛으로 누래진 어떤 문학잡지 골짝 깊이 누워 있었어, ‘진보연합’이라고 쓴, 귀퉁이가 닳을 대로 닳은 봉투에 소중히 담겨서
꿈은 담기는 것, 영원의 봉투에 소복이 소복이 눈송이 또는 눈물 송이로 담기는 것
_ 시 「봉투」 부분
프로이트는 한 논문에서, 애도 작업의 요체는 ‘산 자가 떠나보낸 자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해야만 산 자는 죽은 이에게 쏟았던 에너지를 다른 대상에 다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러한 애도 작업을 스스로 거부하거나 외부의 방해로 충분히 이루지 못한 경우 산 자는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그에 대한 적절한 의미화가 사회로부터 부정되었을 때, 남은 자는 바닥없는 나락에 빠지게 된다. 애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자의 삶은 헤맴의 연속이다.
버림받은 자에서 구원자로, 바리데기의 귀향
이번 시집에는 강은교 시인의 추억이 담긴 장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곳은 “희푸른 나무 간판에 生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곳이며, “빵들이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도 그곳은 “그리운 동네 외딴집이고, 누추한 가방이고, 낡고 낡은 구두”와 같은 곳이다. 바로 그곳에 “영원토록 변방인 그, 또는 영원토록 구원인, 희망인, 항상 너무 늦게 도착하는 그”가 살고 있다. 이처럼 아름답지만 이제 추억이자 지나간 시절이 되어버린 그곳을 기억하는 시인은 타인의 죽음뿐 아니라 언젠가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그래서 시인은 평생을 괴롭혀온 몸의 경련을 잠시나마 잠재워주는 “내 평생의 연인들―딜란틴과 바리움, 테그레톨, 라미탈”과 같은 약의 이름을 부르며, 고통이 있음으로써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삶의 비의(悲意)를 생각해본다.
나의 척추에 장미잎이여, 무지개 마차여
빛의 탯줄을 뿌려라
무지개 마차의 발자국 소리 하이소프라노로 사각사각
은빛 철로를 가고 있으니
기다려라, 기다려라
빛의 탯줄을 끄는 힘이 나의 혈관 기슭에 스미는 것을
경련은 나의 스승, 나의 시, 나의 마지막 첫사랑
오늘 석 달 치 항경련제를 처방받았으니 6월 22일까지 나의 목숨은 유예되었다
_ 시 「나의 거리―강은교 씨를 미리 추모함」 부분
그러나 몸의 경련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을지언정 정신의 경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허무 의식과 죽음 충동이 시인의 초기 시를 지배한 주요 동력이었다지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추모할 수 있는 ‘여유’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에게 드리워진 허무 의식은 갑자기 찾아온 병마(病魔)와 아이와의 이별, 아버지의 부재,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개인적 체험과, 오랜 세월 자유가 억압된 사회 경험에서 온 것이다. 시인이 첫 시집에서부터 선보인 연작시 ‘비리데기(바리데기) 旅行의 노래’는 그래서 시인의 눈앞에 펼쳐진 절망과 허무를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시인이 버려진 자이자 자유의지의 상징인 바리데기를 호명하는 이유는 그녀야 말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원에 던진 한 물음에 스스로 마련한 해답, 구속과 제한을 벗어나려는 문제의식, 생사의 한계를 초극하는 자유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운조가 걸어간다/운조가 걸어간다/푸른 지평선 황토치마 벌리고/한 모랭이 지나 은빛 냄비 사이로/두 모랭이 지나 은빛 국자 사이로/운조가 걸어간다/마음 떨며 운조가 걸어간다
이제 그가 올 시각
비애로 불룩한 여행 가방 끌고 그가 올 시각
좁고 좁은 골목길
낱낱이 가파른 발자국 소리처럼
이제 그가 올 시각
오래된 천장 밑 깊고 깊은 지하 방
흘깃흘깃 떨고 있는 창틀 아래로
-「발자국 소리」 부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으나 그 버려짐의 운명을 사랑으로 전환해낸” 바리의 노래. “가장 일찍 버려졌기에, 가장 깊이 잊혀졌기에” “가장 멀리 걸어가고 가장 오래 사랑하는 자”가 된 바리는 한 개인의 삶과 죽음의 한계를 넘어 인간이라는 제한된 목숨, 그 애처로운 몰골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유자가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와 암울한 시대적 우울로부터 먼 길을 돌아 비로소 집으로 돌아온 바리, 그녀의 손에는 자신을 버린 이들을 살리기 위한 ‘살살이 꽃’, ‘숨살이 꽃’이 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