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집은, 너의 이야기처럼 죽죽 읽히고
어떤 소설은 너의 詩처럼 쿡쿡 아프게 읽히고
그래서 나는 나무는 키가 큰데 꽃은 위를 향하고 있어 아래서는 좀처럼
꽃을 보기 어렵다는 나무 상단에 튤립 모양의 연둣빛을 띤 노란색 꽃이 핀다는
tulip tree라고도 하는, 백합나무 꽃을 생각하고 파란 수레국화를 생각하고
계속 낑낑거리는 이웃집 개의 뭔가 애절하고 불안한 울음을 어찌할 요량도 없이
견디고 있는 그런...속수무책의 시간인 것이다. 어쩔 수도 없이,
수레국화
오늘 이곳엔 한 사람만 빼고 다 왔습니다
마당엔 옛주인이 피운 꽃들 한창이네요
파란 수레국화를 보셨나요
그는 이제 올 수 없는 사람인지
파란색, 문득 빈자리의 색깔 같습니다
기억은 참 자주 밟히곤 합니다
멀리 있는 음식을 잡을 때 누군가 접시를 가까이 옮겨주
었는데
잠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빛깔을 없는 곳에서 보았습니다
오늘 이곳엔 한 사람만 있습니다
눈에 밟힌다는 말,
밟는 사람이 더 아픈 이런 장면도 있네요
잡담이나 웃음소리들이 겉도는 저 아래쪽은 축축한 그늘
파란 수레,
그 바퀴에 이미 추운 생이 감겨버린 듯
감겨서 이미 굴러간 듯
오늘 이곳엔 나만 빼고 다 있습니다 (P.20 )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를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P.13 )
선물
어떤 나라에 '눈사람 택배'라는 게 있다 하네요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북쪽 지방 눈사람을 특수포장해 보낸다 해요
선물도 그쯤 되면 신비 아닌지요
받을 때 눈부시지만 녹아 스스로 자랑을 지우니
애초에 부담마저 덜어줄 걸 헤아렸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리 살고 싶네요
언젠가 녹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왜 손가락을 걸었던지요
그때 그 반지, 눈사람 속에 넣겠어요
동그라미 두 개가 허공을 품었다 놓아준 것처럼
지우는 법을 가르쳐준
눈사람
그런 선물이라면
그런 아득함이라면 (P.70 )
봉봉 한라봉
모든 당신은 슬프다, 라고 쓰고 나니 그 당신들이 주렁주
렁 열린다
내가 만난 당신들 한라봉처럼 배꼽이 나왔다 배꼽 때문에
웃다가 결국 배꼽 때문에 울었다
어떤 날은 눈이 퉁퉁 부어서 나갈 수 없었는데 생감자를
썰어 붙여도 부은 눈은 가라앉지 않았다
주전자 꼭지를 닮은 배꼽, 툭 튀어나왔으므로 툭하면 아
팠다
누가 어떻게 볼까를 왜,
배꼽이 내장한 고감도의 전류, 건드리기도 전에 비명이
나오는 건 이미 닿아본 때문이겠지만
저마다 아파 다른 아픔도 아파
아픈 자리에선 나비가 꽃이 도마뱀이 나오곤 했다
나도 힘이 든다고 말하려다 만다
동족끼리 아플 때는 서로 어떻게 부비나
게이가 게이를 알아보듯 내 배꼽이 당신을 알아본 건데
모든 당신은 슬프다, 라고 쓰고 나니 정말 슬픈 일은 여
기까지 무사히 배꼽도 없이, 아픔도 모를 당신과 당신일 것
이어서 (P.73 )
청송 사과
전화로 주문을 했더니 그 남자는 먹기엔 그냥 괜찮다며 흠
있는 사과를 보내주었다
흠, 흠, 내 흠을 어떻게 알고서
어제 오늘 이미 여러 차례 떨어진 내 하관은 바닥이니 거리
에 떠다니는 삼엄한 얼굴은 또 무슨 생각들을 놓친 낙과냐
비나 번개를 만나
저 흠들은 자신의 몸으로 모서리를 삼킨 거지
그렇게 견딘 시간은 울퉁불퉁 붙고 아물어
과도의 끝이 닿자 이제야 길었던 통점이 떠나가고
뭐, 큰일이나 날 것 같았던 당신의 법도 잘려나가고
자른 채로 잘려나간 채로 그냥 묻어 살기에 괜찮으니 도
리어 면면하니
흠 있는 존재, 단물까지 나는 이 서사의 사랑스러움을 견
딜 수 없으니 (P.81 )
락스 한 방울
꽃꽂이 하는 사람이 말해주었다 꽃을 더 오래 보려면 꽃병
에 락스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고..... 아무리 해도 그거
너무 폭력적이지 않나 싶으면서 그 말 왜 솔깃해지는지 머
뭇거리다가 한 방울 꽃병에 떨어뜨렸다 거짓말처럼 뒷자리
가 말끔해졌다 저러자면 누군가는 또 얼마나 참아야 했을
까 너무 똑 떨어지는 이치에는 어딘지 사기치는 냄새가 난
다 후각을 마비시키며 이룬 거사들, 달콤하게 던져준 당근
들, 한 방울 떨어뜨려 애써 제자리를 확보하는 동안 꽃병 속
꽃은 어땠을까 락스 한 방울....... 이 세계에서는 나를 더 연
장하지 않기로 한다 (P.89 )
-이규리 詩集,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에서
![](http://image.aladin.co.kr/product/4075/45/cover150/8954624804_1.jpg)
시인 소개
1955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이 있다.
![](http://image.aladin.co.kr/img/shop/2012/bd_t18.gif)
● 편집자의 책 소개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지상의 존재들이 빚어내는 삶의 비의에 응답하는 따뜻한 시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저마다의 사연으로 내파(內波)되어 있는 삶의 실제 상황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보편성에 저항하며 각 존재의 개별성을 확보해왔던 이규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문학동네시인선 54번으로 출간되었다. 『뒷모습』(2006) 이후 8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일종의 독특한 미학으로 담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 서른여덟 편이 묶여 있다. 관성적으로 스쳐지나가기 쉬운 사소한 풍경에서 포착한 삶의 비의를 개성적인 시적 풍경으로 재구성했던 시인의 애정 어린 관찰력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인은 언어가 주는 소통의 착시 효과를 경계하면서 시로 재구축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을 섬세하게 더듬어나간다.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저, 저, 하는 사이에」 전문
이규리가 포착한 삶의 순간은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말의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그저 목격하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삶의 순간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인의 ‘담담한 현실주의’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지 않은 슬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저 “저, 저,” 망설일 뿐 “말해주지 못”하는 때. 삶의 불가항력과 외로움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쓸쓸함이 담담한 어조에 배어 있다. “숨이 차서, 또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당신’의 아픈 몸을 가만히 받쳐주면서 시인은 “저 꽃 이름이 뭐지?”라고 말을 반복하는 ‘당신’의 안색에 활짝 핀 고통을 느낀다.(「해마다 꽃무릇」)
그날따라 정신없이 웃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 편집자의 책 소개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지상의 존재들이 빚어내는 삶의 비의에 응답하는 따뜻한 시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저마다의 사연으로 내파(內波)되어 있는 삶의 실제 상황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보편성에 저항하며 각 존재의 개별성을 확보해왔던 이규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문학동네시인선 54번으로 출간되었다. 『뒷모습』(2006) 이후 8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일종의 독특한 미학으로 담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 서른여덟 편이 묶여 있다. 관성적으로 스쳐지나가기 쉬운 사소한 풍경에서 포착한 삶의 비의를 개성적인 시적 풍경으로 재구성했던 시인의 애정 어린 관찰력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인은 언어가 주는 소통의 착시 효과를 경계하면서 시로 재구축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을 섬세하게 더듬어나간다.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저, 저, 하는 사이에」 전문
이규리가 포착한 삶의 순간은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말의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그저 목격하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삶의 순간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인의 ‘담담한 현실주의’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지 않은 슬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저 “저, 저,” 망설일 뿐 “말해주지 못”하는 때. 삶의 불가항력과 외로움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쓸쓸함이 담담한 어조에 배어 있다. “숨이 차서, 또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당신’의 아픈 몸을 가만히 받쳐주면서 시인은 “저 꽃 이름이 뭐지?”라고 말을 반복하는 ‘당신’의 안색에 활짝 핀 고통을 느낀다.(「해마다 꽃무릇」)
그날따라 정신없이 웃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래도 되는지
옆을 돌아보았어요
예의가 아니었나요
예의는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라 하고
너무 가두어도 어긋나는 것이라 하니
예의는 예의를 말할 수 없는 거겠어요
아무도 웃지 않을 때 웃는 건
그야말로 예의가 아니겠죠
하필 그날, 왜 옆에 있던 대형 유리가 깨졌던 걸까요
미안해요 너무 크게 웃어서
슬픈 다른 사람 생각을 못해서
파편들은 극명하게 아픔을 말해주었어요
웃음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듯
아마 그날,
우리는 웃지 않아야 할 때 크게 웃었던 거지요
-「예의」 전문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이규리 시인은 “자기 웃음조차 객관적 시선으로 되살피며 사태와 그 사태를 둘러싼 관계들을 전체 맥락에서 고려”하고 있으며 자신과 아무런 관계 없는 우연조차 “자신의 몫으로 감당하며 미안함을 느끼는 이런 화자의 모습이 오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슬픈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고 혼자 웃었던 걸 미안해하는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일 거라면서 말이다.
한 줄 문틈을 그은 불빛이 빗장 같아
불 켜진 아이 방 앞에 서서
늦은 시각을 벌컥 열지 못하겠다
자주 먼 곳을 향하는 아이를 훔쳐볼 때
슬그머니 끼이던 낯선 공기
백합나무도 제가 피운 꽃등은 못 보겠지
내가 짚어볼 수 없는 저 아이의 미열은
이제 나무의 것일까
-「꽃나무의 미열」 부분
백합나무는 tulip tree라고도 하며 나무 상단에 튤립 모양의 연둣빛을 띤 노란색 꽃이 핀다. 나무는 키가 큰데 꽃은 위를 향하고 있어 아래서는 좀처럼 꽃을 보기 어렵다. 이는 존재에 대한 탁월한 비유로 읽힌다. 자식과 부모는 혈연으로 맺어진 누구보다 긴밀한 사이이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책임져야만 하는 고독, 시인은 그 아이의 “쓸쓸한 먼길”을 이해하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에게 “또 짐짓 이마를 짚으며/ 음, 음, 날씨 얘기나 꺼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려깊은 배려가 서로에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아닐지 시인은 가만히 되묻는다.
“어떤 나라에 ‘눈사람 택배’라는 게 있다 하네요/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북쪽 지방 눈사람을 특수포장해 보낸다 해요// 선물도 그쯤 되면 신비 아닌지요/ 받을 때 눈부시지만 녹아 스스로 자랑을 지우니/ 애초에 부담마저 덜어줄 걸 헤아렸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리 살고 싶네요/ 언젠가 녹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왜 손가락을 걸었던지요// (…)// 그런 선물이라면// 그런 아득함이라면”(「선물」)이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녹을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을 걸고는 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하지만, 저는 끝까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래요. 당신의 시집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도착해서 이렇게 녹아 없어지지만, 여기엔 이런 것이 바로 삶이라는, 당신의 수긍과 지혜와 안부와 토닥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죠.
―박상수 해설 「러블리 규리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