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詩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길 기다리며짧은 시의 매력에 빠진 <작은詩앗·채송화> 동인들의 열세 번째 동인지 『도다리쑥국』.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은 김길녀, 나기철, 나혜경, 복효근, 오인태, 윤효, 이지엽, 정일근, 함순례 시인이다.
< 작은詩앗·채송화> 동인은 짧지만 깊이가 있고, 쉽지만 감동을 전해주는 시로 독자들과 만난다. 열세 번째 동인지 『도다리쑥국』에서는 동인들의 신작시와 ‘문(門)’을 테마로 한 테마시를 독자들께 선보인다.
매 동인지마다 동인들은 좋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이번 『도다리쑥국』에서는 박두규, 한인준, 박제천, 고영섭, 원구식, 조예린, 전외숙, 최춘희 시인의 작품을 좋은 시로 소개한다.
오늘은 모처럼 차분한 비도 오시고, 오랜만에 여유가 생겨
그대들과 초고추장에 도다리 찍어 먹고 싶은 주말,
작약향기,에 위로를 받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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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여섯 살짜리 소년이 작약(芍葯)꽃을 한 아름 자전거 뒤
에다 실어 끌고 이조(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나
가면서 연계(軟鷄) 같은 소리로 꽃 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옥색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맥(脈)이 담
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백지의 창을 열고 꽃장
수 꽃장수 일루 와요 불러도 통 못 알아듣고 꽃사려 꽃사려
소년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 위에 올라서선 작약꽃 앞자리에 냉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
-미당 서정주, [한양호일(漢陽好日)] (P.141, 장석남 발문중)
서늘함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데 큰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P.16 )
깊은 밤
혼자
눈 뜨고 불 켜는
밤 두 시
한옥 창 열고 먼 곳에
불 켜진 창 하나 본다
저 창 안에 누가 사나?
더 높은 곳에서 보면
나의 창도 아름다울까
지상에 가까스로 핀 별꽃처럼
아득하게 나도 그리움이 될까
밤 두 시
어디라도 손 내밀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따뜻한 길이 열리는 시간
몸을 돌돌 말아
뒹굴어 본다 (P.23 )
공일당(空日堂)
북촌로 8길 26
딱 명함 한 장만 한 한옥 대문 위에
공일당 당호가 걸렸다
무산 설악스님이
바람 한 가닥 잡고 설악바다를 에둘러 찍어
꽃처럼 예쁘게 수놓은 당호다
김남조 선생님이 한마디
혼자 사는 여자 집에 공(空)자는 좀......
다 비우면 새롭게 쌓이는 법
공이 만(滿)이 되는 것이라
혼자건 둘이건 비우건 쌓이건
다 같은 것이라
그 순간 시간이 출렁 섰다가 가네
혼자가 둘이 되고 둘이 하나가 되어 가네
공일(空日)은 예배로 채우는 날 (P.25 )
신문
이른 아침
딱 내 여고 교복 하얀 카라만 한 마당에서
가슴 떨리는 소식덩어리를 줍는다
따끈따끈하다
세계의 옷깃을 끌어당기며
탁! 하고 마당에 떨어지는 소리는 나를 깨우는 소리
한 면을 펴고 다시 한 면을 넘기며
나는 세상과 탁 터놓는 대화를 한다
너무 깊은 관계라 욕지거리도 하고
아아! 하며 감동도 하고 허리 한 쪽이 시큰하기도 하고
한쪽 자리를 잡은 마음 울리는 시 한 편을 볼 때는
신문값을 빨리 주고 싶다
탁! 하고 마당에 신문 떨어지는 소리
세상이 나에게로 오는 소리
세상이 나에게 질문하는 소리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P.33 )
북촌 가을
한옥 기와 모서리가
맨드라미 빛깔로 물들며 솟네
이 집 처마와
저 집 처마가
닭벼슬 부딪치듯
사랑싸움을 하네
알배기 햇살
쏟아지는 갈 오후
한옥 뒷마당에도
따뜻한 햇살 뒹구네 (P.59 )
다정이라는 함
다정이라는 함 하나를 만들려고 해
누구라도 아늑하게 마음을 담는
함 하나를 만들려고 해
나무 중에는 동백으로 부드럽게 짜
수수백년 가게 하고 싶어
다감이라는 함 하나를 만들려고 해
누구라도 의지하고 말 터넣고 싶은
함 하나를 만들려고 해
나무 중에는 느티로 견고하게 짜
희로애락을 감싸 안으려고 해
다정과 다감이 결혼해
온순이와 온정이를 낳고
다정다감하게 기르면
툭툭치고 때려눕히는 마음 다친 사람들이
온순이네 온정이네 집
웃음소리에 통증도 달아나는
그런 집이 저기 저 북촌 작은 골목길 안에 있네 (P.59 )
가회동 성당 2
새벽 다섯 시
대문을 밀치고 골목길을 나선다
어둠이 막 검은 옷을 벗고 푸르스름한 새 옷으로 갈아
입는 시간
가로수 소나무들도 서둘러 일어나고
삼청공원의 바람도 이른 세수를 하고
한옥 마을이 잠을 털며 눈 비비는 시간
두 손 두 발 두 눈 두 귀가 모두 하나의 생각에 합친다
가회동 성당 문을 밀며 들어서면
창 너머로 들어오는 푸르른 빗살 받으며
성호를 긋는다
태초에서 지금으로 지금에서 태초로
시간의 사잇길로 광활한 빛이 흐른다
내 몸은 사라지고 영성으로 마주 잡은 두 손으로
한 찰나를 지나면
손을 내밀면 왈칵 잡히는 손이 있다
울컥 치받는 온몸 저릿한 기쁨이 있다
미사가 주는 선물은 여러 제곱으로 계산해도 끝이 없다
"평화를 빕니다"
딱 미사는 여기서부터 다시 뜨거워진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P.92 )
정독도서관
경기고등학교 젊은 피가 왁자했던 곳
북촌의 명치끝에 딱 자리잡은 곳
오는 이 가는 이 한번은 들러
북촌의 숨소리를 듣는 곳
책의 혼을 만나는 곳
죄도 악도 슬그머니 책을 들추는 곳
정신이 번뜩 푸른 빛으로 번지는
예술의 순이 여기저기 돋는
홀로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마음의 길 하나 트는 곳
흐린 날에도 창공의 푸른빛 한 줄기 잡아 자기 앞으로
끌어오는 곳
잠시 등나무 밑에 앉으면
오싹하게 저들끼리 꼬이고 꼬여
하늘 덮어 사람들 쉬게 하는 곳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등나무끼리 무슨 전쟁이 지나
갔는지
너 아니면 못살겠다고 저리도 비통하게 서로 몸을 섞어
버렸는지
그러나
사람의 얕은 해석은 깔끔하게 버려라
등나무는 오로지 사람들을 쉬게 하려고
등꽃 푸른 등을 꼼꼼히 켜 마음까지 비추며
잠시라도 쉬어라 쉬어라 한다
몸도 마음도 배불리 얻어 가는
정독도서관 (P.102 )
골목 산책
계동은 골목으로 빛난다
골목으로 들어서 골목으로 돌아돌아
다시 골목으로 이어지는 계동
현대 건물을 지나
북촌 문화센터를 지나
만해가 살던 집을 돌아서
김성수가 살던 집을 돌아서
정통 흑백사진관을 돌아서
60년대 영화를 돌리는 다방을 지나네
얼핏 오드리 햅번이 지나가고 있네
가게가 앙증맞게 선 골목길에서
어느 물건과는 마음이 닿아 미소를 띠고
떡볶이를 하나 사 먹을까
정애씨가 굽는 정애 쿠키 하나를 먹어 볼까
버선 모양의 목걸이를 하나 사 볼까
구경으로 배가 부른 골목길을 돌아
다시 골목을 돌아돌아 골목으로 이어지는 골목 산책
가회동 한옥 성당 앞을 지나면
내 영혼이 점심 먹을 때가 되네
성호를 긋고 기도밥을 먹고
돌아서 오는 귀갓길은 참 복되고 가볍네 (P.118 )
흘러라 흘러라 피여!
너는 북촌의 피다
네가 걸어오면
뒤에 너의 벗이 걸어오면
북촌은 길게 숨을 쉰다
오늘 북촌을 왔다면 너는 북촌의 피다
안국역에서 헌법재판소를 지나
명인 탈 박물관에서
예술의 옛향기를 맡는 북촌박물관을 지나
오르고 오르다 보면
오고 가는 사람들 모두가
북촌의 피다
북촌이 그리워
무작정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거리에서 아무나 잡고 한옥 오름과 내림을 묻고 있는
사람들 모두 북촌의 피다
거리 음식에 신이 나
우르르 서서
떡볶이 튀김 고로케와 김밥을 먹는
외국인들도 다 북촌의 피다
북촌이 좋아 북촌이 궁금해
북촌을 걸어가는 사람들
오롯이 서울의 중심을 사람의 피로 수혈하는
사람의 뜻이
바로 북촌의 피다
길 잘 못 들어 되돌아가는 발걸음도
다 북촌의 피다
오늘도 북촌은 펄펄 붉은 피가 흐른다
건강하게 숨을 쉰다 (P.124 )
-신달자 詩集, <북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