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쇄한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향기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존재한다. 오늘의 커피는 멕시코 알투라다. 추출 시간 3분과 마시는 시간 15분 동안 나는 멕시코 알투라에 간다. 흔히 화이트 와인에 비유되는 멕시코 알투라는 맑고 중성적이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맑고 중성적인 인간이 된다.
동물적 추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후 아침마다 줄곧 커핑을 해오고 있다. 살아있다는 자각를 한 이후부터,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긴 이후부터 나와 약속을 한다. 많은 약속은 나를 패배하게 할 테니 한 가지만 한다. 이제는 더 이상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패배해도 괜찮을 때는 상대가 내가 아닐 때 뿐이다. 동물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은 나의 로망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으르렁거리고 싶을 때 으르렁거리고 물어뜯고 싶을 때 물어뜯을 수 있는,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때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삶. 동물처럼 살고 싶되 늙어 가면서 자연스레 잃게 될 향미 감각을 커피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감추고 가리고 숨기면 더 많은 것이 드러나는 순간과 반드시 직면하게 된다.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을 한번은 만나게 되지 않는가. 당신에게 가장 빛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이 나일 때, 적어도 내가 한결같은 어떤 삶의 구석을 갖고 있음으로써 당신이 나를 한번만 바라봐주길 원하는 그런 마음 말이다. 커피에게만은 그런 인간이고 싶다.- 라는 '하나, 아침이 된다'라는 이 책의 첫 챕터의 마지막 글을 읽다가 문득...갸우뚱,한다. 어찌 살면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한번 뿐이겠는가..하는.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 생각하면, 그대에게 나의 외적 조건이나 모습이 아니라..그대들에게서 만난 진정 '사람다운' 그 모습이...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저 바위같이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견디며 살아가는 이유이겠지. 그리고 그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장 초라하고 나빴던 시간에 다가와 그냥 전생부터(그대의 표현에 의하면, 전생에 한 감옥에 수감되었지요?라고 물었고 그 질문에 나는, 그래요. 당신은 사상범, 저는 잡범으로 만났지요.) 라고 낄낄대던 시간이 떠올랐다.
아무렴 어떠랴, 어느 방에서 있었든 우리는 한 운동장의 햇살과 풀꽃아래서 만났던 것을.
사람이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유는, 그 사람의 사는 이유가 너무나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나도 너처럼 아름답게 잘 살아가고 싶고 또 잘 살아가야겠다는 그런 큰바위 얼굴,이 아닌가? 그래서 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을, 우리가 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저 가만히 침묵안에서 또는 행동안에서 언젠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아픈 영화를 동숭시네마텍에서 함께 본 후,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있을 때에도 의자에 머리를 묻고 있었던 그대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앨범 속의 흑백사진처럼, 나의 허름한 늑골속에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처럼 간직하며 그 모습에서 본 이유,처럼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우리 죽는 날까지, 서로 잘 보이고 살자,
행복한 사람
권경인
모든 관계는 오해의 관계다
새들에겐 비상이 꿈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몸짓이듯
아무리 걸어도 꿈이 되지 못하는 길이 있다
너를 만나는 길이 그랬다
어느 산 능선이나 골짜기 어디쯤에서
지하철, 백화점, 아득한 시공의 갈피, 갈피에서
우리 무수히 스러지고 다시 태어 났으나
가지 않은 길은 결국 가지 못한 길이다
폭풍처럼 부러지지 않겠다,
목조계단을 내려 섰을 때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말들이
세상 울음이
가득했다 차라리 넉넉하였다
삶을 단단하게 살려는 자는 외롭다
허튼 약속을 버린다 (P.25 )
-남부시 3, <그 눈망울의 배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