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고 빛나는 한 켠

 

 

 

 

 

                           꽃은 환하다 빛난다

 

                           세상 한 켠에 등불을 켜고, 우리들 눈동자에 불을 지피고 가

                        슴을 멍들게 한다 꽃은 아름다운 이데올로기, 살아서 영혼이 된

                        것들, 하나하나마다 혼령이 붙어 하늘 가득 나비 떼를 띄운다

                        나비는 꽃의 영혼, 꽃의 혼령을 날개에 달아 저리 가벼웁다

 

                           우리 집 똥개 버꾸, 어머니는 개똥을 모아 꽃밭에 북을 돋우

                        시고 기름진 개똥에 날이 갈수록 꽃들은 만발하고 버꾸는 밥

                        잘 먹는 천하의 태평성대, 아름다운 꽃 속에서 졸리운 듯 졸리

                        운 듯 그런 눈으로 훨훨 나는 나비를 꾸벅꾸벅 지켜보고 있다

                        세상 한 켠을 고스란히 제 몫으로 지키며, 떨어진 꽃잎을 혀로

                        밀어내며, 하얗게 개 밥그릇을 핥고 있다

 

                           개 팔자 환하다 빛난다   (P.33 )

 

 

 

 

 

 

 

                         풋사과

 

 

 

 

 

                           아직은 무더운 초가을

                           할머니

                           떨어진 풋사과를 줍는다

                           할머니의 할머니는 아담의 아내

                           까마득히 쫓겨난 에덴의 추억을

                           쓰다버린 광주리에 담아

                           시장에 내어놓는다

                           할머니의 손은

                           늙은 비애의 손

                           쭈글쭈글해진 손아귀의 힘으로

                           벌레 먹은 선악과를

                           하나씩 쌓아 올리며

                           한 무더기 천 원,

                           천 원이라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   (P.48 )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

                                    -낮달

 

 

 

 

 

                            어느 분이 저 황홀을 굴리는 것일까

                            한눈도 팔지 않고

                            강물에 쓸리지도 않고

                            구름인 듯 저 황홀에는 어느 분이 기거하고 계실까

                            휘적휘적 걷다가

                            저 황홀을 만났다

                            꼼짝 없이 황홀에 갇혀 개처럼 눕고 싶어졌다

 

                            미친 듯이 가려운 살갗을 벗겨내고

                            가만히 들여다 보니

                            내 안에도 저 황홀이 하나 둥실 떠 있다  (P.83 )


 



 

 

 

                         아마도에는

 

 

 

 

 

                            아침부터 들판에

                            비오고

                            눈 내린다

 

                            눈에 맞은 겨울 배추가 달아

                            푸른 배추 잎에 삼겹살을 올려놓고

                            말없이

                            말도 없이

                            소주도 한 잔

                            그리운 이름마다 한 잔씩

                            따라놓고 있자니

                            눈도 이유 없이

                            한없이

                            한없이

                            내리어 쌓인다

 

                            동네 정육점 가게

                            먼 데서 혼자 사는 이도 삼겹살을 사러 왔다

                            돼지 축사는 망하고

                            헛간마다 빚더미는 그득한데

                            괜스레 눈 온다고 자기도 한 잔 할랑가 보다

 

                            아마도 그럴랑가 보다

                            아마도

                            아마도에는

                            비는 비처럼 내리지 않고

                            눈은 눈처럼 내리지 않는다  (P.94 )

 

 

 

 

                                                 -김완수 詩集,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에서

 

 

 

 

 

 

 

 

 

 

 

 

등단 15년 만에 세상에 선보이는 처절한 감성!
시인동네 기획 시인선 그 두 번째,
김완수 시집 『누가 저 황홀을 굴리는가』

제도를 넘고, 이해와 관계를 넘어 저 낡은 새로움마저 뒤로 하고
홀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시인을 우리는 애타게 기다려왔다.


김완수의 시는 온갖 거추장스런 정념과 사념들로 들끓었을 육신의 피와 살을 덜어내고 남은 오롯한 근골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마치 김종삼의 시세계를 연상시키는 듯한 간결한 말들이 직조해내는 선명한 서정적 이미지와 단아한 여백이 만들어내는, 어쩌면 깊은 침묵 속에서 휴식하고 있는 것 같은 말들의 풍경은 바로 이 같은 근골 이미지의 언어적 번안이라고 해야 하리라. 사실상 이 간결하고도 침묵하는 듯한 말들의 풍경이야말로 김완수의 시세계를 진폭이 큰 공명의 자장으로 만드는 데에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저 자장이 형성하는 침묵하는 말들의 풍경 속에는 한편으로는 개별 주체로서 모든 존재자의 유한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외로움과 슬픔 혹은 상처와 아픔의 정신적 에너지들이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삶과 세계의 무상함으로부터 기원하는 허무와 관조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뜻이겠다. 시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하나의 허공이고, 또한 이 허공을 딛고 선 우리 존재는 공허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물론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세계와 존재의 이해 방식이 유달리 새로워 보일 것은 없을 테지만, 사실상 이 시인의 시들이 발산해내는 매력은 이 같은 세계관이 말과 침묵으로 교직되어 오롯이 형상화되는 그 역설적 긴장의 풍경 속에 있다고 하는 편이 옳다. 하기야 시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겠는가? 시에 있어서 발화는 침묵의 한 방식이며, 이 침묵은 또한 세계와 삶의 말할 수 없는 진실들에 대해서 바치는 존재자의 최상의 경외감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시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말이거나 말할 수 없는 것 자체의 말, 혹은 모든 존재와 언어의 가능성들이 하나의 임계점에 도달해 이윽고 텅 빈 세계의 심연으로 돌아가는 순간의 어떤 불가능한 말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꿈속에서 또 꿈을 꾸며 내가 자고 있다
       꿈속의 나는 나인데
       꿈속에 꿈꾸는 나는
       내가 아닌 듯 나고 나인 듯 내가 아니다
       이곳인가
       저곳인가
       그곳인가
       삼생(三生)에 걸쳐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야심한 시각
       달도 없는데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빈 배 한 척이 살얼음 허공에 밀려와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흰 눈이 높이 쌓여 있다
       또, 어디로 가는 신호인지
       텅 빈 무거운 몸을 흔들며 바람에 돛이 흔들렸다

       한 꿈에서 깨어보니 또, 한 꿈 속이다
       꿈 속의 꿈은 누구의 꿈인가
       잠 속에서도

       먼 길을 떠나온 사람처럼

       웅크린 나의 모습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 [외롭고 쓸쓸한] 전문. 

 

 

 

 

 

: 김완수 시인과 칠년을 같이 살았다. 한 번도 말다툼 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이 넓다. 친구들이 문단에 얼굴을 내밀 때 한번 작품을 응모해보지 했더니 ‘나는 아마추어 원로로 남을란다.’ 하며 웃었다. 그는 들밥을 이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어미처럼 조심조심 차분차분 신성한 정신을 잃지 않고 시를 써왔다. 일부러 더디게 쓴 그의 시에는 시간이란 긴 다리가 놓여 있다. 그는 다리를 오가며 ‘사람보다 빈집이 많은 고향’을 보기도 하고 ‘가을밤 가을비에 외로워서/세상이 온통 울고 있는데/다만,/잎 작은 대추나무 아래, 젖은/귀뚜라미만 외롭게 울지 않고 있다’고 읊조리기도 한다. 그의 시들은 행간이 넓고 깊어 마음을 시큰 휘어놓는다. 참, 고마운 쓸쓸함이다.

 

: 김완수의 시는 우리로 하여금 익숙한 서정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그의 시는 많은 서정시의 모습과 닮은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완수의 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발견에 대한, 익숙한 서정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완수의 시는 새롭다. '꽃을 꺾으면/들 한 쪽이 가만히 비'는 이 당연한 사실과 발견 앞에서 우리는 사실에 대한 경이를 맛본다. <서정의 과학>, 나는 그의 시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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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0-21 12:34   좋아요 0 | URL
삼생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누군가와 삼생에 거쳐서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은, 지금도 그렇게 만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누군지 모르겠으니 다 소중하게 해야겠지요.

배추 부침개가 확 땡깁니다. ^^
평온한 한주 되셔요.

appletreeje 2013-10-23 18:33   좋아요 0 | URL
지금도 그렇게 만나는 이가 있을지 모르나 누군지 모르겠으니 다 소중하게
해야겠다는 말씀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저녁입니다.
저도 배추 부침개를 안주로 소주 한 잔 하고 싶네요..^^;;;

마녀고양이님께서도, 평온하고 좋은 한주 되세요~*^^*

보슬비 2013-10-21 17:48   좋아요 0 | URL
가을이라 그런지 자연이 더 아름답게 느껴져요.
정말 환하고 빛나는 계절인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계속 돌아다니게 되네요. ㅎㅎ

appletreeje 2013-10-23 18:36   좋아요 0 | URL
정말 환하고 빛나는 계절이지요~?^^
보슬비님이 요즘 즐겁게 다니시는 곳들 이야기 듣고 싶어요~

보슬비님! 편안하고 행복한 저녁 되세요~*^^*

숲노래 2013-10-21 18:20   좋아요 0 | URL
아름답게 살아가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노래를 불러
아름다운 가을날 즐거이 누리는
글 한 조각 태어나는구나 싶어요.

appletreeje 2013-10-23 18:36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의 댓글은 언제나
한편의 아름다운 시이십니다~

하늘바람 2013-10-22 00:11   좋아요 0 | URL
처절한 감성

appletreeje 2013-10-23 18:37   좋아요 0 | URL
처절한 감성...^^

하늘바람님! 날마다 좋은 날 되시길요.*^^*

후애(厚愛) 2013-10-22 23:34   좋아요 0 | URL
올려주신 시들이 참 좋습니다!!!*^^*
많이 많이 감사드려요~

좋은 꿈 꾸시고 행복한 밤 편안히 주무세요~*^^*

appletreeje 2013-10-23 18:40   좋아요 0 | URL
시들이 참 좋다 하시니
저야말로 많이많이 감사드려요~^^
이제 어둠이 내려 앉은 저녁이네요.
따뜻하고 맛있고 행복한 저녁,되세요. 후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