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가족성당을 위해서만 바쳐졌다. 가우디는 세속적인 모든 의뢰를 거절한 채 성가족성당을 짓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러는 동안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그의 곁을 지켜주던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났다. 악성빈혈을 앓아온 가우디도 나이가 들수록 병치레가 잦아졌다. 그는 쉰여덟 살에 류머티즘과 통증에 고열, 발진을 동반하는 브루셀라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처럼 여러 질병 탓인지 가우디는 때론 터무니없이 공격적이고 독선적인 주장으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도 했다.
인고의 나날이었다. 당시 마땅한 치료 방법이 없어 가우디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거의 굶다시피한 몸은 바짝 말라 뼈만 남아있었다. 가우디는 매일 아침 추위를 막기 위해 앙상한 몸에 붕대를 감았다. 가느다란 다리를 감싼 그의 바지는 걸을 때마다 깃발처럼 펄럭였다. 그러나 가우디는 개의치 않았다. 어쩌다가 큰 돈이 들어오면 종교단체에 전부 기부했고, 자신은 곰팡이가 핀 옷에 고무줄로 동여맨 신발을 신은 채 건축 현장을 오갔다. 가우디의 머릿속에는 성가족성당밖에 없었다.
말년에 가우디는 특히 성가족성당의 정면 장식에 심혈을 기울였다. 훗날 로댕이 '지옥의 문'을 제작할 때 합류했던 조각가 시베가 가우디를 돕고 있었다. 가우디는 사람은 물론 닭, 칠면조, 나귀 등 (P.66 )
조각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을 직접 구해 석고로 떠냈다. 자연은 신의 작품이고, 자연을 그대로 본뜨는 것이 신에 대한 찬양이며 동시에 예술가의 겸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우디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창조를 창조라기보다는 발견이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신앙심 깊은 건축가로서 새 작품을 만드는데 기반이 될 자연 법칙을 찾아내어 창조주와 협력하는 것을 최선의 역할이자 책무로 삼았다.
"내일은 일찍 오게나. 아주 아름다운 작업을 벌일 계획이니 말일세."
가우디는 조수에게 간단히 당부하고 산책을 하러 성가족성당을 나섰다. 1926년 6월 7일 오후 다섯 시 삼십분경, 가우디가 늘 오가던 사거리를 건널 때였다. 저 앞쪽에서 전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전차를 피하기 위해 가우디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다가 갑자기 길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병약하고 노쇠해진 그는 반대편에서도 전차가 다가오고 있었다는 사실를 모른 채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행인들 가운데 행색이 초라한 이 노인을 알아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우디의 호주머니 속에는 건포도와 땅콩 몇 알만 들어 있었다. 그밖에 신원을 증명할 그 무엇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 가우디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고는 여러 환자들 틈에 끼여 한동안 방치되었다. 자정이 되어서야 신분이 알려지게 된 가우디는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사흘 뒤, 세기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는 74세의 나이로 숨을 (P.67 )
거뒀다.
가우디의 장례 행렬은 4킬로미터나 길게 이어졌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독창적이고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자신들의 도시를 새롭게 건축한 천재 예술가를 떠나보내며 숙연해했다. 죽은이를 위한 찬송가 [리베라 메(나를 구원하소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나에게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슬프게도 내 손으로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완성
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 뒤를 이어서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성당
은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가우디는 죽기 전 언젠가 이처럼 안타까움을 달래며 말했다. 사실 가우디 최후의 걸작인 성가족성당 건축 과정은 크고 작은 시련들로 점철 되었다. 가우디의 죽음과 스페인 내전으로 건축이 중단되었고, 내전 중에는 납골당이 불탄 데다가 성당 안에 있던 가우디의 작업실이 파괴되고 설계도와 모형도마저 사라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게다가 40여 년간 이어진 프랭코 독재 체재에서는 카탈루냐 지방의 문화가 억압을 받았던 탓에 가우디의 존재가 아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안토니 가우디는 건축의 성자, 카탈루냐 문화의 수호자, 자연과 인간을 잇는 20세기 독창적인 천재 건축가로 다시 주목 받기 시작했다. (P.69 )
가우디의 말대로 성가족성당은 그가 떠난 지 거의 9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후대인의 손으로 건축 중이다. 애초부터 헌금을 모아 시작한 성가족성당 건축은 현재도 국가나 교황청의 지원 없이 수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염원을 한데 모으고 동참을 바탕으로 이뤄나가는 공동 건축 작업인 것이다. 세계 건축사의 큰 별이 될 이 성가족성당은 가우디 사후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P.70 )
/ [불멸의 아름다움을 추구한 건축의 사제 안토니 가우디].
-박나정 지음,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