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국수(花麵)
화가의 그림에서 본 어머니 꽃
진달래는 꽃비로 내리고
영변에 약산 시인의 두견화는
임의 발밑에 흩어 뿌려지고
내 분홍 참꽃은
따스한 날 재잘재잘 동무들과
부풀어 하늘을 날고 있다.
이른 봄
어머니 어머니 그의 어머니
진달래 녹말 입혀 끓는 물에 데친
매끄러운 꽃국수
발그스름 새콤한 오미자국에
흘흘한 분홍국수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꽃 먹고 취한 두견새
붉은 산을 헤맨다 (P.20 )
굴비 대가리
창덕궁 담 밑의 한옥
따스한 봄날 툇마루에 늙은 고양이 졸고 있다
몇 살이니? 야옹
가만히 희미한 눈으로 지그시 올려본다
몇 살이세요? 야옹
아 저보다 위시니 칠십은 되셨겠네요
강남에서 이사와 여기 궁옆에 산 지 십오 년
매일 궁중음식 냄새 맡고
오늘도 창덕궁 돌담 황금빛 줄무늬 도포 걸치고
양반집 기와지붕을 어슬렁거린다
기품 있게 궁 호랑이 되셨다
배고프면 저기 나 먹던 굴비 대가리 먹을래?
아니다, 말 바꾸어 시장하시면 굴비 구워 드릴
까요?
비굴하지 않게 잘 사셨네요
늙음의 대접 받음
저기 저 고양이 모습
저절로 숙여진다 (P.22 )
빈자병
빈대떡은 알겠는데
빈자병이라니
병(餠)은 떡 병
천육백팔십 년경
안동 장씨 할머니가 팔순 가까운 나이에
가정 요리서
음식 디미방을 쓰셨다
음식은 온데간데없고
세월 안 고서에 담겨 있다
녹두를 불려 갈아 번철에
자그맣고 동글납작 모양 내어
그 우에 거피 팥소 넣고 지져내어
꿀이나 초장 찍어 먹어라
책 뒷머리에
너희들은 책 가지고 갈 생심치 말고
벗겨 가거라*
눈이 어두워 간신히 썼나니라
이것저것 넣지 않은
세련됨이
찬 성질의 아기씨같다
속에 열불 날 때
한 점 먹으면 좋나니라
예나 지금이나
자기 자리에서
훌륭한 분은 계시다 (P.26 )
* 벗겨 가거라-'베껴 가거라'의 옛말.
흰죽
멀건 죽
눈물 속에 비쳐지는 쌀 죽(粥)
전쟁 시 아기 미음
生命줄이다
쌀의 효험은
보증익기(補中益氣)
평생 중요한 일
잘 먹어 기운을 얻는 것이다
흰쌀 반쯤 갈아 원미죽으로 쑤거나
그대로 왼통으로 쑤면 왼죽이라 한다
참기름에 달달 볶아
물 부어 폭 퍼지게 잘 끓여낸다
후후 불어 먹지 말고
작은 그릇에 덜어 한 김 나간 다음
간장이나 꿀 넣어 먹으면
백약 중 으뜸이다
아플 때
엄마가 끓여 주신
흰죽
세상의 고달픔
응석이고 싶다 (P.102 )
-한복선 음식詩集, <밥 하는 여자>-에서
소풍 다녀온 사람이
싱싱한 미나리를 뜯어왔다고 부침개를 했다고 건너오라고
해서 가니, 소주잔에 이미 담겨 있는 붉으스레한 술 한 잔,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셔 봐~ 어떤가" 해서
마셔보니, 알 것도 같은데 무슨 술인지 기우뚱하고 있으니
"복분자에 맥주를 칵테일 했어~" 아하, 그래서 오디술 같은데
끝맛이 기분좋게 톡 쏘았네.~ "이거 참 좋은데~? 야 누가 이
칵테일 만들었어?" 하며 "썩~괜찮네, 괜찮아!" 하는 찰나에
그 자리의 어느 인간이 순간, 작은 페트병의 복분자술을 갑자기
자기의 커다란 맥주잔에다 콸콸 다 부었다. "아 그러면 너무
진한데?"하는 친구의 말에도 끄덕않고 한 모금 마시더니 정말
그랬던지 내려놓고는 더 이상 안 마신다. 아 그 순간..저 인간
왜 저러냐..하는..
평소에도 크고 작은 일에 남달리 욕심이 많은 사람임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어제 저녁의
기분 좋게 모여서 먹는 자리, 술까지 그러는 모양을 보고는 한결 더 정이 뚝, 떨어지고 기분이
급 더 나빠졌다.
그래서 집에 오는 길 다른 친구와 이차를 하고 왔는데, 그 술기운이 아직까지 남아 힘이 든,다.
역시, 술이란 기분 나쁘게 마시면 안 되는 것이다...
요리연구가 한복선님이 새로 내신 詩集을 읽으며, 해장을 하는 시간.
꽃 먹고 취한 두견새는 아니지만, 창덕궁 담 밑의 한옥 고양이의 나른한 졸음을 생각하며
속에 열불 날때 한 점 먹으면 좋다는 빈자병이나, 어릴 때 아프면 엄마가 끓여 주신 흰죽
한 그릇이 정말 먹고 싶은 벌건 대낮, <밥 하는 여자>를 훌쩍훌쩍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