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서는 책 냄새가 났다.
그녀의 어깨가 내 가슴에 처음 닿던 날이었다. 새 책의 비릿한 냄새가 아닌 낡은 책의 묵은 냄새가, 가만가만 올라왔다. 그녀가 코트 단추를 풀면 몸 안에 품고 있던 책 냄새가 왈칵 쏟아졌다. 턱을 그녀의 이마에 대면 그녀의 긴 머리칼 사이사이에 책 냄새가 곰지락거렸다. 그녀의 콧등이 내 콧등에 닿을 때, 그녀의 손이 내 볼을 쓰다듬을 때도 예외없이 책냄새는 흘렀다.
책 냄새가 늘 그녀의 몸 전체를 휘감고 있다는 걸 확신했을 때, 그녀의 직업을 물었다.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책을 만지는 일을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자세한 대답 대신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을 나는 평소와 달리 유심히 바라보고 매만졌다. 왜 그전까지는 몰랐을까. 그녀의 손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유난히 까칠한 걸. 진한 색으로 칠한 손톱 끝과 갈라진 피부 틈에 까만 때가 숨어 있는 걸. 오래된 책 냄새와 거친 손을 가진 여자. 그녀는 흡사 낡은 책과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점점 책이 되어가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매일 책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었으니까.
낡은 책이 끝도 없이 쌓여 있는 곳.
그녀의 일터는 헌책방이었다.
조르고 졸라서 들은 대답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하려 들지 않았다. 겨우 들은 것이 아버지가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 정도. 자신도 거기서 일하며 나중에 물려받아 자기만의 헌책방을 꾸리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도시 어디쯤에 있는 헌책방이라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책 냄새의 원인을 알게 되자 나는 많은 상상을 했다. 책에 파묻혀 무언가를 하는 그녀를 상상하면 짜릿했다. 영화 <화니 페이스(Funny Face)>에서 서점 직원으로 나오는 오드리 헵번과 겹쳐지기도 했다. 물론 생존이 걸린 현장의 치열함은 상상과는 크게 다를 터였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그런 이성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헌 책이 풍기는 환상은 압도적이었다. (P.265~267 )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요즘, 나는 다락방에 대한 그리움을 덜어냈다. 다락방은 아니지만 그만큼 아늑한 나만의 다락방을 몇 곳 찾아내서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이지만 옛날에 내가 살았던 다락방에서 느꼈던 감정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나는 그곳들을 '다락방'이라고 부른다.
이제 그곳들을 돌아볼 까 한다.
지극히 사적인 관점과 편견이 들어간 여행지,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락방의 은밀함과 안락함을 느껴볼 수 있는 곳.
그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행기를 지금 시작한다. (P.249 )
-김대욱, <숨, 쉴 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