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등(點燈)
책장을 넘기는데 팟, 하고 전구가 나갔어요 밝기의 단위
를 1룩스라고 할 때 어둠의 질문, 당신의 밝기는 몇 룩스 입
니까 탐미적인 어느 소설가는 소셜리즘이 수 많은 밤을 소
모시킨다고 불평했어요 그토록 와일드한 오스카 이야기, 안
타깝지만 그는 빈궁을 벗 삼아 죽어갔어요 뜻밖에도 오늘
의 밑줄은 성서의 한 구절,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
이 아니다
우리가 혁명의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이 점등될 거
라 선언해요
때로 이상한 열기에 전구 내벽이 까맣게 그을리기도 할 거
예요 어둠의 공기를 마신 시인의 폐벽(肺壁)처럼, 그럴 때
필라멘트는 일종의 저항선으로 떨려요 가는 필라멘트 같은
희망으로 아침을 켤 수 있을지 귀 기울여요 고백하자면 세
상을 글로 배웠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면, 오늘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 (P.12 )
바람의 지문
먼저 와 있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은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게를 남기지 안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P.14 )
-이은규 詩集, <다정한 호칭>-에서
어느 날, 사랑하는 男이 내가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방에 들어와서 휙 둘러보더니
봄도 왔으니 이젠 분위기를 좀 바꿔야겠군, 하였다. 어떻게? 묻는 내게 도색을 하는거지.
뭐라고? 벽지 위에다 뺑끼를 칠하겠다고? 오, 노우.
그리고 며칠 전 택배로 무엇인가가 왔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그냥 내버려
두었고 어제 드디어 개봉이 되었다. 그 물건은 바로 나의 서재방에다 칠 할 페인트.
아 이 무슨 날벼락인가 말이다. 페인트 칠의 여러가지 후유증 중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냄새.
아 모르겠다. 알아서 하라지, 하면서 잔뜩 칠할 준비를 하는 사랑하는 男을 두고 나는 나왔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그래도 그건 도리가 아닌 듯 해 문을 살짝 열고 들어 갔더니, 아 이건
무슨 냄새? 우리가 알고 있던 사슴표 페인트의 그 지독한 휘발유 냄새가 아닌, 아 물감 냄새.
왠 물감냄새야 열심히 벽에 칠을 해대고 있는 그에게 물으니, 완전 이 페인트 포스터칼러야.
근데 무지 힘들어 죽겠슴!! 롤러로 북북 칠을 하는데 척척 발라지지 않아 정말 물감으로 벽화
를 그리고 있는 느낌이야. 혼자만 빈둥대기가 쪼금 미안해져 나도 칠붓을 들고 모퉁이 부문을
같이 칠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틀어 놓고 물감 냄새를 맡으며 둘이 벽에 칠을 하고 있으니 돌연
기분이 너무나 상큼해지고 즐거워졌다. 아 이게 졸지에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마리아!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은, 슥슥 발라지지가 않아 정말 물감으로 벽화의 바탕색을 칠하는 듯한
그런 팔의 강도가 수반되었다는 점. 이 Benjamin Moore 를 사용한 블러그의 후기를 읽어보니
친구들에게 도색을 도와달라고 해서 그들이 와서 함께 일을 했는데...벽을 다 칠하고 나서 이왕
온 김에 방문도 좀 칠해 줄래? 하였다가 살해될 뻔 했다는, ㅋㅋㅋ 그 얘기에 백번 공감을...ㅋ,
어쨌든 캔버스에 채색을 하면 바로 말라가면서 은은한 도료 냄새가 풍겨 나오듯, 그렇게 예기치
않았던 토요일 어제의 뜻밖의 작은 일상. 작은, 기쁨.
일요일이라 아직도 식구들이 다 자고 있는 시간,
서재로 들어와 앉아 고요한 에그쉘 색의 실내에 묻혀 이은규의 點燈,을 읽고 있다.
오늘 당신의 밝기는 몇 룩스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