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고 있는,
비가 자운영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
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는데 이게 아닌
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마
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
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P.10 )
야채사(野菜史)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고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 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P.11 )
연희
제가요, 외로움을 많이 타서요,
사람들이랑 잘 못 놀면 울어요, 그렇지 민호야?
-11세 소녀가장 연희 인터뷰 중에서
나도 연희야 외로움을 아주 많이 타는데 나는
주로 사람들이랑 잘 웃고 놀다가 운단다 속으로 펑펑
그렇지?(나는 동생이 없으니까 뼛속에게 묻는단다)
열한살 때 나는 부모도 형제도 많았는데
어찌나 캄캄했는지 저녁 들판으로 집 나가 혼자 핀
천애고아 달개비꽃이나 되게 해주세요
사람들 같은 거 다 제자리 못박힌 나무나 되게 해주세요
날마다 두 손 모아 빌었더니
달개비도 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되었단다
사람들이랑 잘 못 놀 때 외로워 운다는 열한살짜리 가장
열한살짜리 엄마야 민호 누나야 조숙히 불행해 날마다
강물에 나가 인간을 일러바치던 열한살의 내가 오늘은
내게도 신발을 주세요 나가서 연희와 놀 흙 묻은 신발
을 주세요 안 그러면 울어요 외로움을 내가요 아주 많이
타서요 연희랑 잘 못 놀면 울어요
달개비도 천애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열한살 너의 봄 때문에 사람들이랑 잘 못 놀아준 봄들을
돌려세우는 저녁이란다 (P.72 )
-김경미 詩集, <고통을 달래는 순서>-에서
들판 가득, 이름 아름답지 않은 개망초꽃들을 보며
망하는 건 속으로 어떤 이름에 몰래 침 뱉을 때, 골목 뒤편에 숨은 채 갚아주겠다 벼를 때, 전적으로 네 쪽이 고약했다, 누군가를 팔아넘길 때. 라는 김경미 시인의, 2001년에 나온 <쉿, 나의 세컨드는> 이후 <고통을 달래는 순서>를 다시 읽는 아침.
연희와 놀고 싶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