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나를 외로운 공주로 만들어, 나에 대한 자신의 열등
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집과 아내와 아이가 있는 그의 고독
이, 집도 남편도 아이도 없는 나의 고독보다 무섭다는 사실
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은 나를 감성만 살아있는 여류시인으로 만들어, 창
조적인 지성에 압도당한 자신들의 무력감을 숨겼다. 여자보
다 강하고 여자보다 똑똑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조선
의 선비들은 상상력이 빈곤해, 새로운 것을 생산하지 못한
다. 뿌리가 자유롭지 못한 나무가 가지를 뻗고 풍성한 열매
를 맺을 것인가. 유행을 따르는 허접스런 문자유희로 넘치
는 지식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같은 말도 어렵게 비틀고
꼬아야 지식인 대접을 받는다. (P.82 )
오해
술보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 시가 쉽다고
노란 세월이 밀려온다고, 빗대어 쓰면
몰라도 뜻을 묻지 않고
출퇴근하는 지하철을
밥벌레들이 기어들어가는 순대에 비유하면
직장인들을 모욕했다고 분개하고
나도 모르는 말들을 주절주절 갖다 붙이면
그들은 내 시가 심오하다고..... (P.90 )
아이와 다람쥐
조카아이와 슈퍼마켓에 갔다 아이와 슈퍼마켓에서 나왔
다 내 손엔 물건들이 들려있고 아이의 손은 들어갈 때처럼
빈 손. 내 눈은 길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계산대를 통과하
며 얄팍해진 지갑을 만지는데, 아이가 갑자기 소리 지른다
"이모! 여기 다람쥐 있어!" 어디? 어디? 없는데, 없는데. 높
이 달린 내 눈엔 사람들과 물건만 보이는데 "여기 다람쥐
있어!" 반짝이는 눈, 자그마한 손을 따라가니 정말 다람쥐
가 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아주 낮은 곳에. 그 아이
에게 당연한 기쁨이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랑도 그러하리라 (P.60 )
개미
누가 나 좀 뒤집어다오
이대로는 못 살겠어
국어사전을 기어오르다 배가 뒤집힌 개미가 방바닥에 추
락해 발버둥친다 어서 저 스탠드 불빛 밑으로 도망쳐야 하
는데 아무리 몸부림친들 등이 배가 되고, 배가 등이 되기는
글렀다.
불쌍한 것.
구경하던 내가 연필로 꼬리를 눌러 몸통을 뒤집어주자 개
미는 죽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내가 자기를 죽일 줄 알았
나? 놈을 안심시키려 불을 끄고 다른 일을 하는 척. 한참 뒤
에 다시 불을 켜고 보니 개미는 열심히 기어가는 중. 방금
제 몸이 뒤집힌 사고도 잊고, 언제 그랬냐 싶게 씩씩하게
먹이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P.83 )
ㅡ최영미 詩集, <이미 뜨거운 것들>-에서
최영미의 한 마디
살수록 알수록 시집 후기를 쓰기가 어려워진다.
뭔가 덧붙인다는 구차함.
다 털어놓는 민망함이여.
시로 나를 털고 털어, 사방에서 부수고 일그러뜨려
어디까지가 진정한 나인지?
어디서부터 속였는지?
내가 그걸 정말 느꼈는지?
마음의 조각들을 다시 붙여, 멀리서 바라본다.
말과 말 사이, 빈틈없는 것들은 빛나고
아닌 것들은 시들시들
주름을 감출 수 없다.
감추지 않으련다.
시를 청탁한 잡지사의 편집자들, 내 시를 가슴으로 읽은 사람들, 원고 정리를 도와준 친구들, 미국의 전승희 선생님을 기억하며, 귀한 발문을 주신 방민호 선생님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추천의 글을 얹어 주신 황인숙 시인에게 고마움을 보내며 사진을 찍고 표지를 만든 분들, 함께 작업한 실천문학 식구들과 새 책을 내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미 슬픈 사람들, 이미 아픈 사람들, 이미 뜨거운 것들과 말을 섞으려 나는 또 떠나련다.
-2013년 봄, 최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