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 일 내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흘렸으니 어지간히 많이도 운 셈이다. 나를 그토록 슬픔에 젖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김수환 추기경이다.

 살아생전에 추기경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적은 없다 손꼽아 보면 대여섯 번 뵌 것이 고작일 것이다. 한 번은 신문사 인터뷰로, 두어 번은 여럿이서 함께 나눈 식사 모임에서, IMF 때는 금 모으기를 하던 서초동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신문사에서 주최한 미술 전람회장에서.

 그때 나는 두 신문에 연재를 하고 있어 몹시 바뻤으므로 관람이 끝난 후 추기경님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자리에 빠지게 되어 "죄송합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추기경님은 말씀하셨다.

 "왜 함께 식사를 하지 그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굳이 내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무리하면 얼마든지 참석하고 늦게 돌아와 원고를 써도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겐 이상하게도 쌀쌀한 구석이 있어 추기경님이라도 내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냉정하게 사무실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 함께 식사를 하지 그래." 라는 말씀은 이 지상에서 추기경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평범한 인연인데도 일주일 내내 추기경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때 추기경님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섭섭해 하시던 그 눈빛, 쓸쓸한 그 눈동자, 그 입술은 내 가슴에 선명히 남아 있다.   ( P.242~243 )

 

 

 

 내가 길상사를 찾으려 했던 것은 법정 스님 때문이었다. 성모병원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전해 들은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뿐 마음은 담담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입적하셨다는 뉴스를 입원실 텔레비전을 통해 본 순간 언젠가 보았던 사진작가 주명덕씨가 찍었던 법정 스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온다 간다는 문안 인사나 작별 인사도 없이 훌쩍 소매를 떨치고 빈자리만 남기고 사라지던 밀짚모자를 쓴 법정 스님의 뒷모습. 그는 지금 그 뒷모습으로 긴 그림자를 떨치며 이승의 생애에서 피안(彼岸)의 바라밀다로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P. 251 )

 

 

 

 경허는 깨닫고 나서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긴다.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으냐. 봄볕 비추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 (世屬靑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 P. 258 )

 

 

 

 

 등단 반세기를 맞은 최인호 작가의 신간, <최인호의 인생>을 읽었다.

 표지부터 고요하고 담담한 이 책의 초입을 읽어가다 이상하게 문득, 목소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은 마음의 목소리다.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이 건강한지, 아픈지, 양호한지 아니면 슬픈지, 짜증이 났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덧, 결국은 남의 말들을 알게 모르게 자신의 생각인 양 '글'에 꿰어 맞추느라 예쁜 가성(假聲)들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요란하고 세련된 말들의 세상에서 모처럼, 조용하고 나직한, 작가의 종교적 성찰과  인간으로서의 시련을 맞고 그 시련을 다시 새로운 깨달음으로 쓴 글들을 읽으니, 잔잔한 기쁨과 함께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케 한다.  

 이 책의 1부는 카톨릭 <서울주보>에 5개월간 연재했던 일종의 묵상록(默想錄)이기도 한데, 나는 그 글들을 다시 천천히 읽으며 가파르고 숨가쁜, 그러나 그 가파르고 숨가쁨의 실체는 다름아닌 나자신이였음을, 결코 나를 에워싼  세상이 아님을, 진지한 마음으로 돌이켜 본 시간이다.

  결국은 인생이란 이 책의 표지처럼, 허공에 곧게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목어(木魚 )처럼 담담함은 아닌가 하는.

  최인호 작가의 <인생>은 조용하고 나직하나, 사람을 살리는 칼 같은 정신이 번쩍인다.

 

 

 -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눈이 멀어 있는 저'를 볼 수 있도록 제 눈에 흙을 개어 발라주소서(요한 9,6 참조) 그리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해주소서. (P. 163 )-

 

 

 나는 이제서야 비로서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 관계가 기뻤든, 슬펐든 상처가 되었던 관계였든, 바로 그 타인들의 얼굴이야 말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자 크나큰 위로였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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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6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7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착한시경 2013-03-07 00:33   좋아요 0 | URL
오래전에 최인호가 샘터에 연재했던 가족을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투병을 시작하면서...오랫동안 연재했던 가족을 중단했었는데~딸 다혜와 아들 도단이의 성장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요~ 참 오랫만에 최인호의 신간을 보니..반갑고 읽어보고 싶네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appletreeje 2013-03-07 10:19   좋아요 0 | URL
그죠~~샘터에 연재되었던 '가족'. 참 즐겁게 읽었지요.^^
저는 최인호님의 '길없는 길'을 너무 좋아했는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이후 이번에 나온 이 책을 읽고 참 좋았어요. 착한시경님께서도 좋아하실 책 같습니다.
지금은 비가 그치고 날이 흐려요. 이런 날은 더 책 읽기 좋은 날이지요.
착한시경님! 오늘도 좋은 날 되세요.*^^*

드림모노로그 2013-03-07 10:54   좋아요 0 | URL
암투병중에도 꾸준히 창작활동을 하시는 모습이 늘 감동으로 다가오는 분 같습니다
한 그루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목어(木魚)를 보니
인생을 저렇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고독하고 쓸쓸하여 홀로 인듯 보이지만, 타인을 위한 종을 항상 울리는 것처럼요^^
가족은 제 서재 귀퉁이에 먼지먹고 있은지 오래되었는데 ㅎㅎ
오늘 저녁 집에 가서 한 번 들춰보고 싶어집니다 ㅎㅎㅎ
오늘도 좋은 봄 되세요 *^^*

appletreeje 2013-03-07 23:05   좋아요 0 | URL
'고독하고 쓸쓸하여 홀로 인 듯 보이지만, 타인을 위한 종을 항상 울리는
것처럼~' 드림님의 말씀이 너무 좋습니다.^^
드림님! 좋은 밤 되세요.*^^*

프레이야 2013-03-07 11:29   좋아요 0 | URL
최인호의 신간이군요. 예전엔 잘 모르겠던데
나이들어가면서 더 좋아보이는 작가가 이 분 같아요.
김 추기경에 대한 회고담이 진솔하게 들리네요.^^

appletreeje 2013-03-07 22:51   좋아요 0 | URL
예~나이들어가면서 더 좋아보이는 작가신 것 같습니다.
추기경님에 대한 글이 저도 참 맘에 와 닿았지요.^^
프레이야님! 평안하고 좋은 밤 되시길요~*^^*

후애(厚愛) 2013-03-07 17:56   좋아요 0 | URL
제목보고 놀라서 왔네요.^^;;
전 나무늘보님이 우신 줄 알고 말입니다...ㅎㅎ
예전에 역사소설인 유림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이 책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좋은 오후 되세요~*^^*

appletreeje 2013-03-07 22:56   좋아요 0 | URL
아궁, 죄송합니다.^^;;
'유림'은 저도 참 좋아했습니다.
이 책은 약간 종교적이긴 한데,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이 들어있는 책이었어요.
후애님께서도 좋은 밤 되세요.~*^^*

보슬비 2013-03-07 21:01   좋아요 0 | URL
저도 후애님 댓글처럼 나무늘보님이 우신줄 알았어요.^^;;

나무늘보님 말씀처럼 나와 인연이 닿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끈했던 기억조차도 나에게 그런 추억을 주기도하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배움도 주니 말이지요.^^

appletreeje 2013-03-07 23:00   좋아요 0 | URL
^^;;;..
이젠 제가 그런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는.
보슬비님! 늘 감사드리오며, 행복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