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안행 마을의 오후>, Watercolor on paper, 2013

 

하나의 공간이 우연처럼 다가와 엷은 파장을 그릴 때가 있다. 안행 마을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한여름 햇살을 맞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작년 이곳에서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모처럼 큰마음을 먹고 야외 스케치를 나섰던 일, 낯선 사람들 속에서 느꼈던 어색한 기분, 비 그친 오후의 변덕스러웠던 날씨, 하늘을 가로질러 달음질치던 뭉게구름, 그림을 다시 손보다가 아예 망쳐버렸던 일, 마을회관으로 두 번씩이나 물을 뜨러 갔던 일들까지 하나하나 떠올랐다.


동네 분위기는 지난해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 그때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여운의 결로 남아 반짝이는 햇살 아래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과의 인연이 소중한 것처럼 공간과의 만남 또한 하나의 인연이다. 익숙한 듯 조금은 낯선 시간의 프레임 속에서 한 해만큼 변한 내 모습을 가만히 비춰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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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덕포리 빨간지붕>, Oil on canvas, 65.2×53.0cm, 2013

 

낮 동안 끈끈한 열기가 이어지더니 저녁 무렵이 되자 소슬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창가에 걸린 블라인드 커튼이 바람결에 가만가만 흔들리고, 허공을 쪼아대는 새 울음소리가 낯선 환영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고촌 근처에는 유난히 새들이 많다. 작업을 하다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들면, 창밖 멀리 V자 행렬을 그리며 날아가는 새떼가 눈에 들어오곤 했다. 새들은 대개 무리를 지어 날아다닌다. 먹이를 찾아 나서는 길인지, 아니면 어딘가로 이동하는 길목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지난 시절의 일들이 떠오르곤 했다. 한때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 이제는 아득히 멀어진 기억들.

 

어느새 7월이다. 눈 깜짝할 사이 올해 달력도 팔락팔락 중간쯤 넘어왔다. 오늘은 그동안 작업했던 작품을 하나 끝냈다.

 

유화 물감은 아무리 다루어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매체이다. 신중하게 오래오래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밀어붙여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은 그만. 경험이 먼저다.

 

마른장마가 한동안 지속되는 것 같더니 이번 주부터는 제대로 비를 퍼부을 모양이다. 모두 큰 피해 없이, 뽀송뽀송하게 잘 지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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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강화 덕성리의 봄>, Watercolor on paper, 2013

 

지난 주말, 화구를 챙겨 들고 지인들과 함께 강화 덕성리에 다녀왔습니다.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띄엄띄엄 자리한 집들의 모습이 먼 이국의 풍경처럼 낯설고도 아름다웠습니다.


날씨는 찌는 듯 무더웠지만, 모처럼 야외 공기를 마시며 붓을 들고 앉아 있으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때로 이렇게, 잠시 일상의 시간에서 비켜 서는 작은 여행이 되기도 합니다.


어제는 괜한 수다를 많이 늘어놓았으니, 오늘은 덕성리에서 스케치해 온 수채화 두 점만 조용히 올려봅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으싸으싸.

 

그림 <고가 앞에서, 덕성리>, Watercolor on pap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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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ffeeman 2013-06-2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유화보단 수채화를 더 좋아해요.. 잘 보고 갑니다.

김미진 2013-07-01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삿갓 2014-02-15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혹시....지금은 폐쇄된 정치 담론 사이트인 진보누리에 자주 글 올리던 그 김미진 씨인가요?

김미진 2014-02-1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 문화에 관련된 칼럼을 기고하긴 했지만 아닙니다. 들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삿갓 2014-02-1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니셨군요. 다행입니다. 그 김미진 씨도 무척 박학한 분이긴 했는데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지금과는 다른 닉으로....^^
 

그림 장암동 마을의 산책길

Oil on canvas, 65.2×53.0cm, 20132014

 

옛사람들은 생각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 따로 있다고 했다. 말을 타고 달릴 때, 뒷간에서 일을 볼 때, 베개를 베고 막 잠자리에 들었을 때, 혹은 한적한 마음으로 산책길을 걷고 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럴 때면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어느 순간 스르르 풀리며 새로운 길을 내준다고 한다.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운전대를 잡는다. 파편처럼 흩어진 아이디어들, 앞뒤가 막혀버린 생각의 매듭을 풀기 위해 몇 시간이고 도로 위를 달린다. ‘2시간째 같은 차선 주행 중이라는 초보 운전자의 경고판이 이때만큼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생각의 실마리가 좀처럼 잡히지 않을 때면 잠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고 싶어진다. 그럴 때 음악이 필요하다. 차창 밖 풍경과 나 사이에 얇은 막 하나를 세워 두기 위해서다. 도로 위를 떠다니는 소음과 내 생각 사이에 음악이라는 가벼운 장막을 드리우는 셈이다.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높이지 않는 편이 좋다. 차선도 거의 바꾸지 않는다. 3차선이나 4차선에서 유난히 느리게 주행하는 차를 묵묵히 뒤따라간다. 사고를 피하면서도 생각의 호흡을 끊지 않기 위한 나만의 운전 방식이다.


정신을 모으는 데는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이 잘 맞는다. 라디오는 지지직거리는 전파 잡음과 CM, 그리고 디제이들의 목소리 때문에 생각이 자꾸 끊긴다. 가사가 있는 가요나 팝송, 재즈나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다. 차 안에는 이럴 때를 대비해 몇 장의 CD가 준비되어 있다. 피아노나 첼로, 플루트, 오케스트라 연주곡도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가장 잘 맞는 것은 템포가 빠른 바이올린 곡들이었다.


평소에는 다소 자극적으로 느껴지던 바이올린 소품들이 이런 순간에는 유난히 달콤하게 들린다. 예민하게 떨리는 하이톤의 선율 속에는 사람의 뇌파를 건드리는 어떤 힘이 숨어 있는 듯하다. 음파의 보이지 않는 영역이 무의식 깊숙이 파고들어 생각해, 생각해. 더 깊이 생각해.’ 하며 내 등을 떠미는 느낌이다.


음악 또한 하나의 카오스다. 그것을 받아들여 단단히 잠가 두었던 의식의 문을 풀어헤치려면 바이올린의 템포가 심박수를 자극할 만큼 강렬할수록 좋다. 그래서 선택한 음악이 바네사 메이 풍의 격렬한 바이올린 연주곡들이다. 그런 음악을 들으며 몇 시간쯤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대개는 무엇인가가 서서히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잘한 사념의 꼬리들이 이리저리 얽히다 어느 순간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길가에 차를 세운다. 콧잔등을 몇 번 긁적거린 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지 위에 급히 받아 적는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한다.


물론 몇 시간의 드라이브가 인생을 구제해 준 적은 없다. 아니, 단 한 번도. 머릿속이 조금 정리되었다고 해서 삶이 가벼워지거나 작업이 갑자기 수월해지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생각은 생각으로 남고, 삶은 여전히 삶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혼자 끌고 가야 하는 수레 같은 것 아닌가. 그 위에는 수없이 많은 실타래와, 나조차 처음 보는 무거운 상자들,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골칫거리들이 잔뜩 실려 있다.

남태평양 타히티 섬까지 건너가 생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Paul Gauguin은 마지막 작품에서 이렇게 물었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운전대를 잡고 도로 위를 달린다. 언젠가 풀어야 할 질문들을 마음속에 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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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ffeeman 2013-06-24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저도 드라이브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 님의 글에 무척 공감이 가네요..
 

 



그림 <이화 마을의초록집>

Watercolor on paper, 2013

 

지난 주말에는 사생 스케치를 하러 집 근처 태리 마을에 다녀왔다. 오전에는 농수로 앞 마을길을 그렸는데 오후가 되자 햇빛이 정면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자리를 옮겨 앉아야 했다. 동네 구경을 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늘진 나무 아래에 다시 화구를 펼쳐 놓았다. 바로 앞에 밭이 있고 좌측에는 건축 자재 더미가 쌓여 있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심기일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걸. 커다란 트럭이 먼지를 피우며 다가오더니 하필이면 초록집 정면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더니 운전사가 내렸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온 것일까, 점심을 먹으러 온 것일까. 이미 스케치를 하고 밑칠까지 끝낸 터라 마음이 여간 야속한 것이 아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에게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차를 좀 비켜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여름처럼 날씨는 푹푹 찌고 풀숲 같은 곳이라 야생 진드기 걱정도 들었다. 또 자리를 옮겨야 하나, 그냥 돌아갈까. 혼자 구시렁대고 있는데 다행히 트럭 운전사가 집에서 다시 나왔다. 옷차림이 말끔한 것을 보니 어딘가 외출을 하는 모양이었다. 운전사는 사뿐하게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곧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다시 찾아온 한적한 풍경이었다. 온 누리에 깃든 평화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늘을 향해 윙크 한 번 날리고 고약한 진드기에 대한 걱정도 잠시 미뤄두었다. 바닷길을 건너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그때가 제주도에서 첫 번째 환자가 확진 판결을 받은 직후였다.

 

그림〈태리, 농수로 앞 마을길〉

Watercolor on paper, 2013


‘농수로 앞 마을길’ 그림은 집에 돌아와 다시 손을 보았다. 연두색 그림자가 깔린 농수로의 젖빛 물결을 제대로 표현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사흘에 걸쳐 엎치락뒤치락 작업을 한 덕분인지 ‘초록집’에 비해 한층 가라앉은 느낌이다.


작업 과정에서 마무리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면 그만큼 생동감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일기나 편지를 쓸 때, 혹은 카톡 메시지를 쓸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수정할수록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문장의 공식화 과정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모든 일이 그렇듯 그것이 늘 능사는 아니다.


풀어줄 때는 시원하게 풀어주고, 죄어야 할 때는 단단히 죄어야 한다. 그런 완급 조절이 필요한 봄날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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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3-06-1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위가 한창 입니다.
창작활동을 위한 완급조절이 더욱 필요하지요.

김미진 2013-06-1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덥다는 데 걱정입니다. 더위 조심하시기를..

메리베리 2013-06-1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암 정겨운 거리의 수채화네요^^ 마음마저 맑아지는.... 감상으로 ...잘 보고갑니다

김미진 2013-06-16 23:44   좋아요 0 | URL
격려의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