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포리, 과수원 길> oil on canvas 65×54cm 2013-4
과수원에는 크고 묵직한 쥐가 한 마리 살고 있다. 쥐의 이름은 없다. 그저 늙은 쥐일 뿐. 이제는 온종일 어두침침한 둥지만을 맴도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만 그에게도 한때 젊은 시절의 찬란했던 추억들이 남아 있다. 쥐는 여전히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닭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닭은 도도하면서도 까칠한 성격이었는데 무슨 말을 하든 항상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천성적으로 기질이나 취향이 맞지 않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두운 곳만 찾아다니는 것에 비해 닭은 항상 높고 환한 곳만 바라보았다. 그가 침묵과 사색을 즐기는 반면 닭은 늘 소란스럽게 푸드덕거리는 걸 선호했다.
“저기 나뭇가지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어.”
어느 날 닭이 마당에 있는 키 큰 미루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위험해! 저렇게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거야.”
쥐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닭이 코웃음을 쳤다.
“날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거 안 보여? 나한테는 날개가 있잖아. 설사 떨어진다 해도 가뿐하게 착지할 수 있다니깐.”
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착지라니? 무슨 소리야?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서...”
“어휴, 답답해! 착지도 몰라? 너랑은 정말 대화가 안 돼. 우리는 추구하는 세계가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넌 나를 이해하지 못해. 아니, 이해하고픈 마음조차 없는 거야. 그러니 저쪽으로 가벼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닭이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쥐는 바늘방석에 앉은 듯 마음이 초초했다. 아무리 짚어 봐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왜 화를 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 넓은 자신이 먼저 다가가서 기분을 풀어주는 게 좋을 듯싶었다. 미안하다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겠노라 무조건 사과할 참이었다.
안채에서 주인집 아들이 나온 건 그때였다. 그는 위이, 위이, 하면서 마당에 곡식 가루들을 뿌렸다. 툇마루 옆 짚단 위에 올라가서 뾰로통한 얼굴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닭이 그걸 보고는 쪼르르 달려 내려와 모이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주인집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닭의 모가지와 양쪽 날개를 낚아챘다. 뜻밖의 사태에 닭은 발버둥쳤다. 먹고 있던 모이를 뱉어내며 ‘꾸웨익! 꾸웨익!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소용이 없었다. 어떤 반항도 저항어린 몸짓도 먹혀들지 않았다.
주인집 아들은 트럭 짐칸에 있는 나무 궤짝에 닭을 싣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고놈, 제법 팔딱거리는 걸! 이제 슬슬 떠나볼까.”
주인집 아들은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닭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 온 이별이었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더 이상 삶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닭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미어질 뿐이었다.
닭이 끌려가면서 토해내던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맴돌았다. 주인집 아들 손아귀에 잡혀서 우격다짐하듯 궤짝에 넣어지기 직전 닭은 두려움에 떨리는 눈빛을 던져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왔어야 했는데, 차라리 온몸을 던져 함께 트럭 짐칸에 몸을 실었어야 했는데...그러나 자신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무능력하고 냉철하지 못한, 정말 멍청하기 그지 없는... 아니, 저 깊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 나 혼자만이라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비겁하고도 치졸한 생각이 그의 손발을 꽁꽁 묶어 버렸던 것이다. 쥐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비겁하고 치졸했던 그 순간의 자신이 끔찍하도록 싫었다. 이토록 멀쩡한 정신으로 어찌 하루하루를 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림<강가에서>2015
한동안 시름에 잠겨 있던 쥐는 마당가 미루나무 아래로 거처를 옮겼다. 태어날 때부터 지내왔던 다락방 안락한 온기 대신 나무뿌리들 사이의 축축한 암흑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확실한 믿음 하나만 붙잡고 살아내기에는 남은 시간들이 너무 길고 버거웠다.
흐르는 세월은 모든 것들을 희석시켜버렸다. 그의 수염은 차츰 희뿌연 빛깔로 변했고 옛추억의 그림자 또한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버렸다. 거기 어딘가에 그녀가 있지만 손을 뻗을 수록 그녀는 멀어져만 갔다.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어둠을 향해 발을 뻗어가는 미루나무 나무뿌리들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죄의식 같은 것들도 점차 희미해졌다.
외로움은 친구처럼 늘 그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녀를 떠나보낸 게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저승사자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이승의 무게보다 살갑게 느껴질 나이가 된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그녀를 만난 게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생의 울타리 없는 감옥을 서성이는 동안 가슴에 새겨진 애뜻한 추억 한 자락도 없이 무슨 낙으로 긴 세월 혼자 버텨낼 수 있었겠는가.
“나한테는 날개가 있잖아. 설사 떨어진다 해도 가뿐하게 착지할 수 있다니깐.”
요즘들어 웬일인지 닭의 모습이 종종 꿈에 보였다. 팔닥거리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였다. 새침한 표정으로 뭔가 한마디쯤 해줄 만도 한데 그녀는 끝내 침묵했다. 꿈에서 깨어난 새벽이면 밤새 어두운 숲을 헤매고 다닌 듯 온몸이 무겁고 축축했다. 여전히 ‘착지’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 세상 어디서 뭘 먹으며 살고 있든, 성가신 일에 혹여 발목이 잡혀 안 좋은 상황이든, 닭에게는 날개가 있으니 그나마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