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진 사람처럼, 더는 감정을 나눌 의지가 없다는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태일은 언제나 그녀를 허수아비처럼,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다루었다. 오늘은 그 손끝이 올가미 같았다. 조금씩 목을 조여 숨을 앗아가는, 결국 스스로 끊어내야만 하는 끈이었다.


-왜 자꾸 나를 피하는 거야? 너 요즘 이상해.

-나, 안 이상해. 네가 이상해.

-뭐,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래, 너! 네가 더 이상하다고!


태일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두려우면서도 가슴 깊이 짜릿한 통쾌함이 번졌다. 그동안 쌓여 있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풀려나는 기분이었다.


태일에게 대놓고 반말을 한 건, 데이트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열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가 아닌가. 존댓말과 반말은 세대 차와 위계에서 비롯된 관습적 언어일 뿐,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는 아니었다.


그제야 서윤은 비로소 알았다. 오랫동안 당연한 듯 이어져 온, 두 사람 사이의 극심한 언어적 불균형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음을. 입가에 번진 짧은 웃음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작은 승리를 선물했다.


그녀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 등을 꼿꼿이 세운 뒤, 턱을 바짝 추켜들었다.


-나도… 이, 이제부터, 반말할 거야.


그러고는 핸드백으로 몸 앞을 가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맙소사! 이제 막 나가자는 거지? 응?


태일은 소리쳤다.


-넌 너무 예의가 없어. 너… 너한테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미쳤구나, 진짜.

-아니, 안 미쳤어.

-야!

-나도, 야, 야! 앞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마. 나도 바쁜 사람이야.

-내 참… 미치겠네.

-그리고 내돈내산이야.

-뭐?

-내, 돈, 내, 산!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는 뜻이야. 오늘 저녁, 내가 낸 거야. 내 음식 내가 고르는 건데, 왜 네가 멋대로 스테이크를 시켜? 나, 스테이크 안 좋아해. 그것도 몰랐어?

-미쳤니? 뭘 잘못 먹은 거야?

-맞아, 잘못 먹었지. 바로 그 스테이크! 그걸 먹고 얹혀서 지금 이러는 거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알긴 네가 뭘 알아!

-취했네. 진짜 취했어.

-와인 한 잔에 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평소와 달리 날것 그대로 쏟아낸 목소리가, 서윤의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를 툭, 밀어냈다. 속에 막혀 있던 게 서늘하게 뚫린 듯한 후련함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태일이라는 남자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더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농담 섞인 희극 한 편을 바라보는 듯한 여유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항상 모나지 않은 일상을 견뎌왔다. 싫은 기색도, 불편한 표정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억울함을 억지웃음으로 덮은 삶은 결국 자신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분노를 삼킨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약한 자의 침묵 따위 세상은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여기부터 난 그만 갈게. 참, 앞으로 나한테 볼일 있으면 반드시 전화부터 하고 와. 깜짝 쇼는 곤란해. 알았지?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보인 뒤,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어깨를 곧게 펴고는 안국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태일이 두어 번 소리쳐 불렀지만, 서윤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 소리가 어느새 든든한 방패가 되어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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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저는 한 잔 마셔야겠어요.


서윤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자, 태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뚫어지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하우스 와인 한 잔과 연어 타르타르를 주문했다. 태일의 껄끄러운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를 힐끔 쏘아봤다.


그는 말없이 몇 가지 메뉴를 훑어보다가, 바게트 위에 토마토와 바질을 얹은 브루스케타와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골랐다.


-메인 코스는 조금 있다가 주문할게요.


서윤이 메뉴판을 접어 테이블 옆에 내려놓으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그 말을 가로채듯, 태일이 끼어들었다.


-지금 시키지 뭐.


그는 리브 아이 스테이크 2인분을 아무렇지 않게 주문해버렸다. 서윤은 원래 레몬즙을 곁들인 생선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출장 간 일은 잘됐어요?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태일은 늘 그래왔듯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응. 그렇지 뭐.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잖아요?

-응. 그렇게 됐어.

-아아, 그렇군요.


짐작 가능한 대답들이 이번에도 서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연어 타르타르를 떠서 입에 넣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이어갔지만, 신선해야 할 연어와 아보카도는 비릿하니 물컹했고, 와인은 산뜻함 대신 떫은 산미와 알싸한 뒷맛만을 혀끝에 남겼다.


태일의 비아냥거리는 표정은 그마저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했다. 기분 나쁜 눈초리가 와인의 향기까지 빼앗아 가는 듯했다. 서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는데, 그 모든 행위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강요된 유치하고 뻔한 연기처럼 느껴졌다.


스테이크가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위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의미 있는 말들이 공허하게 오갔을 뿐, 지루한 정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만을 드러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메우려 애쓰지 않는 간극만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을 때는 무거운 족쇄를 풀어낸 듯 기이하게 가볍고 낯선 해방감이 따라붙었다.

 

라일락 향기 흩날리는 6월의 봄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윽한 꽃내음과는 어울리지 않은 먹구름이 응어리져 있었다. 


두 사람이 골목길을 나란히 걷고 있을 때, 술에 취한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떠들며 다가왔다. 그중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윤 쪽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태일이 그녀의 팔뚝을 세게 잡아챘다. 그 몸짓은 연인을 보호하려는 다정한 반응이라기보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서툴고 거친 반사 작용에 가까웠다.


-아얏!


서윤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왜?

-아프잖아요.

-그러게, 여자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잖아.

-와인 한 잔 마신 게 그렇게 싫었어요?

-데려다줄게. 취했잖아.

-와인 한 잔에 어떻게 취해요?

-어둡고 위험하잖아.

-아뇨, 난 멀쩡해요.


태일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서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서윤에게 이 밤거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밀폐된 공간이나 다름없는 그의 차에 올라타는 일이었다. 


오늘 밤, 그가 바라는 건 어쩌면 단 하나일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빌미로 호텔 식당으로 유인한 뒤, 값비싼 요리와 와인으로 적당히 생색을 낸 다음,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도 않게 객실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 그 얄팍한 술수가 어긋나자,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요.

-이 밤에?

-제이요. 제이는 출판사에서 늦게까지 일하잖아요.

-미치겠군. 젠장!


태일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구둣발로 땅을 걷어찼다. 발끝에 차인 돌멩이 하나가 또르르 굴러갔다.


-내가 오늘 바쁜 일 다 제쳐두고 여기까지 왜 온 건데?

-그러게요. 다음부터는 꼭 전화하고 와 주세요. 저도 바쁠 때가 있으니까요.

-야, 나서윤. 너 요즘 왜 이렇게 삐딱해? 누구 생긴 거야? 어떤 놈이야?


그의 말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와 모멸,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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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잠시 후,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태일은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은 방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괜찮아요. 오늘은 조금 걷고 싶어요.


이 순간만큼은 그 남자의 승용차에 오르는 일이, 어느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차 안에 단둘이 있게 되는 것,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질 상황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밀폐된 침묵 속, 끈적거리는 원색적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이제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


그때, 갤러리 안에서 경숙 씨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을 향한 본능적인 호기심, 남의 비밀을 들춰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그녀의 눈빛에 어른거렸다. 직원들의 연애에 남다른 촉을 세우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 ‘신우건설’ 일가는 리온 갤러리에서 특별 관리하는 주요 고객군이었다.


서윤이 쇼나 조각을 배달한 일을 계기로 그 집안의 후계자와 약혼하게 된 일화는 인사동 거리 안팎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일종의 우화처럼 소비되었다. 리온 직원들 사이에서도 놀라움과 수군거림을 동시에 자아낸 큰 사건이었다. ‘신우건설’ 황태자가 갤러리 앞에 불쑥 나타난 지금, 경숙 씨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서윤은 유리창 너머 껄끄러운 시선을 의식하며, 이 불쾌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태일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오늘은 제가 저녁을 대접할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데라도 있는 거야?

-인사동에도 괜찮은 식당 많아요. 차는 여기 두세요. 관리인 아저씨께 미리 말씀드렸거든요.


어차피 갤러리 문이 닫히면 주차장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태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랐다.


인사동 4길에 자리한 ‘다래원’은 120년 된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대문간 근처에는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고, 뜰 안으로 들어서면 기와지붕을 올린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이 조선시대 대갓집 같은 옛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대들보가 드러난 식당 내부는 전통 가옥의 멋을 고스란히 품은 채, 실용과 절제가 어우러져 은은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다.


두 사람은 대청과 마당 사이에 놓인 격자문 옆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창살 유리문 밖으로는 부드러운 조명을 머금은 정원이 정갈하게 펼쳐졌고, 키 낮은 정원수들과 계절 꽃들이 밤의 공기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 종업원이 정중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스테이크와 생선 요리를 중심으로 한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성. 수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일 수 있어 입맛이 까다로운 태일도 무난히 만족할 만했다.


실내에는 진공관 턴테이블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음색의 바흐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일은 묘하게 경색된 표정으로 메뉴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당 안에는 빈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느긋하게 환담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태일은 괜히 다른 테이블들을 힐끔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점점 굳어가는 그의 얼굴은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었고, 서윤은 그 차가운 시선에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꼭 이런 데까지 와야 했나?

-왜요, 여기가 어때서요?

-음악도 시끄럽고, 뭐랄까… 좀 구려.

-토속적인 분위기, 안 좋아요? 난 좋은데.

-뭐, 크게 나쁘진 않아. 약간 색다르달까.

-태일 씨, 제가 대접하려는 자리잖아요. 기분 좋게 드세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쪽 입술을 씩 올렸다.


-난 이미 더 괜찮은 데 예약해 놨어.


서윤은 고요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태일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단순한 불만이나 반감이 아닌,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수면 위로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


-괜찮은 데라면 어디요? 호텔 꼭대기 회원제 식당 같은 데?

-오늘 왜 이래. 꽤 날카롭네.

-제가요? 글쎄요.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


서윤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와인? 차 가져온 거 잊었어?

-인사동 올 땐 차를 두고 오세요. 그래야 이 근처 맛집도 둘러보죠.

-하. 인사동 낭만이라니! 뭐, 결혼 전엔 이런 추억 하나쯤 쌓는 것도 나쁘진 않지.


‘결혼.’ 그 두 음절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어느새 커다란 관념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죄여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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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인사동 거리는 데이트하는 사람들과 회식을 나온 직장인들의 발길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내리던 비는 서서히 멎었지만, 축축하게 젖은 기운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서윤이 불빛이 환히 새어 나오는 리온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1층 접수대에 앉아 있던 경숙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왜 돌아오셨어요?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관장님 계시지?

-아뇨. 조금 전 장훈 작가님이랑 식사하러 나가셨어요. 최 실장님도 같이요. 오늘은 두 분 다 안 돌아오실 거예요.


장훈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로, 뉴욕 지하철 역사 곳곳에 손바닥만 한 타일 그림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전시하며 이름을 알렸다. 팝아트 풍의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뒤섞인 그의 작업은, 삭막하고 지저분한 뉴욕 거리에 에스닉하면서도 모던한 아우라를 불어넣었다.


그의 이름이 뉴욕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리온 갤러리는 장훈을 눈여겨보며 꾸준히 접촉해왔다. 당시 한국 출신 미술가가 국제적 인지도를 얻기 쉽지 않았기에, 최 관장은 장훈과 전속 계약을 맺어 국내 전시와 작품 판매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었다. 


내년 하반기 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그가, 귀국 시기를 무려 일 년이나 앞당겨 서울에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


-장훈 작가 본가가 어디더라?

-제주도라고 들었어요. 근데 왜요?

-갑자기 한국엔 무슨 일로 왔나 싶어서. 잠깐 들른 걸까?

-글쎄요. 전시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새 프로젝트라도 있는 건지…


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갤러리 운영의 중추라 할 수 있는 2층 사무실에는 남자 직원 한 명과 노영미 연구원이 나란히 앉아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노영미가 손끝으로 안경테를 살짝 들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새 우리 못 잊어서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

-아냐, 잠깐 들렀어. 근데 아직 퇴근 안 했어?

-자료 파일 하나가 사라졌어요. 일일이 확인 중이에요.

-어쩌다 그런 일이?

-모르겠어요. 그런데 명명희 작가님 전시 기획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 잘 몰라. 김순자 씨도 딱히 별말씀이 없으셨어.

-일부러 피하는 걸까요?

-글쎄.

-일본으로 날아가서 직접 명 선생님을 뵙고 오세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잖아요.

-천 냥 빚은 고사하고, 비행기표 값은? 여행 경비는?

-아하! 결국 고놈의 화폐가 문제군요.

-그만 농담하고, 얼른 퇴근해.

-넵. 이것만 끝내고요.


올해 초봄 입사했을 무렵만 해도 얼굴 가득 뽀송한 솜털을 지닌 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그녀가, 이제는 능숙하게 제 몫을 해내며 여유와 유머까지 갖춘 동료로 자라 있었다.


사무실은 평소보다 어둑했다. 나무늘보가 지나갈 듯한 지루한 정적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일정한 박자로 공간을 채웠다.


후배들만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뜨려니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서윤은 함께 퇴근할 요량으로 서랍 깊숙이 넣어둔 명명희 선생의 전시 자료철을 꺼냈다. 


페이지마다 정리된 기록을 훑으며 간단한 메모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강태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이 배어 있고, 어딘가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그는 사흘 전 외주 사업 건으로 지방 출장을 떠났는데, 예상보다 일을 빨리 마친 모양이었다.


-근처 왔다가 혹시나 해서 와 봤어. 얼른 나와. 저녁은 먹어야지.


순간, 서윤의 얼굴 위로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횡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태일 앞에서는 미소조차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다.


서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태일의 BMW가 건물 앞 주차장에 비상등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보자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요즘 들어 그는 유독 그녀에게 집착하는 기색을 보였다. 예고 없이 인사동으로 찾아오거나, 귀가 시간에 맞춰 확인 전화를 거는 일이 잦아졌다.


‘뭐야,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순간, 마법의 지니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남자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전화를 받은 이상, 건물 앞에 버티고 있는 그를 피해 빠져나갈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 아까 그냥 퇴근할걸!’


서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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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명명희 선생은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전쟁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인물화 세계를 확립했고, 수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명명희 인물화展’을 비롯해 국제미술초대전 대상, 한국예술대상, 금관문화훈장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거쳐온 발자취는 곧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명명희 선생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작품은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 위상을 노린 무단 복제와 위작 유통이 암암리에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혹시 선생님 최근작들을 볼 수 있을까요?

-아뇨. 작업실은 물론이고, 작품 공개도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가능해요. 괜한 수고를 드린 것 같네요. 계속 전화로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직접 뵙고 설명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

-별말씀을요. 제가 먼저 방문하겠다고 부탁드린 거잖아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오히려 기쁜걸요.

-개인전이든 회고전이든 언젠가 다시 준비하게 될 거예요. 

어머니는 리온 갤러리를 좋아하세요. 상업성도 덜하고, 전시 수준이 품격 있다고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뭔가 확실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명 선생님께서 김순자 씨를 많이 의지하시니까요.


-최희숙 관장님이 확실한 답을 얻어오라 하신 건가요?


김순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선생님 작품 활동이 궁금해서요.

-그렇다면 잠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네?

-제 사무실에 어머님의 미공개 작품 몇 점이 있어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거라도 보여드리는 게 도리겠죠.

-아, 감사합니다.


서윤은 그녀를 따라 1층 한쪽에 마련된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두 점은 9년 전 동유럽 스케치 여행에서 그린 풍경과 인물화였고, 정면에 걸린 40호 유화 한 점은 명명희 선생의 기존 화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반추상 계열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일흔을 넘긴 화가의 붓끝은 여전히 힘찼고, 화면에는 노련함과 생생한 상상력이 함께 살아 있었다. 그 그림은 단순한 색채나 형태의 조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와 묵직한 사유가 화면 속에 함께 자리했다.


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의 흔적은 보는 이에게 먼 시간의 결을 더듬게 했다. 무거운 색조와 경쾌한 터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섬세한 색의 중첩과 질감은 작가가 화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색채 농도의 부드러운 변화와 곳곳에 드러나는 강렬한 대비는 순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안에는 자연의 숨결, 인간의 고독, 그리고 생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서사가 녹아 있었다. 노화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작품 세계와 그 안에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을 떠올리자, 문득 서윤은 자신의 삶이 한없이 가볍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이면 그 순간, 횡계 숲길에서 헤어진 도준이 떠오른 걸까. 그것은 아픈 진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그즈음의 서윤은 우울한 얼굴로 단조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끔 태일과 저녁 시간을 함께했지만, 예전처럼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마음속에 또 다른 존재를 품게 된다는 건, 하나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시간과 행동, 언어 습관까지, 도준을 만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 듯했다. 가슴을 저미던 고통은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일상의 흐름은 무늬 없는 벽지처럼 밋밋해져, 어떤 감정도 쉽게 머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노화가가 따스한 손길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명명희 작가의 그림 한 점이 봄바람처럼 스며들어 그녀의 마음을 감싸안았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숨결이 고요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진정한 예술이란, 이렇게 살아 있는 온기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리라. 서윤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어때요?

-정말…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에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볼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말 들으니 기쁘네요. 제목은 ‘사월의 정원’이에요. 임시로 붙였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죠?

-그렇네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서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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