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서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진 사람처럼, 더는 감정을 나눌 의지가 없다는 듯 차갑게 굳어 있었다. 태일은 언제나 그녀를 허수아비처럼,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다루었다. 오늘은 그 손끝이 올가미 같았다. 조금씩 목을 조여 숨을 앗아가는, 결국 스스로 끊어내야만 하는 끈이었다.
-왜 자꾸 나를 피하는 거야? 너 요즘 이상해.
-나, 안 이상해. 네가 이상해.
-뭐,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래, 너! 네가 더 이상하다고!
태일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 두려우면서도 가슴 깊이 짜릿한 통쾌함이 번졌다. 그동안 쌓여 있던 답답함이 한순간에 풀려나는 기분이었다.
태일에게 대놓고 반말을 한 건, 데이트를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열 살의 나이 차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약혼까지 한 사이가 아닌가. 존댓말과 반말은 세대 차와 위계에서 비롯된 관습적 언어일 뿐,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까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는 아니었다.
그제야 서윤은 비로소 알았다. 오랫동안 당연한 듯 이어져 온, 두 사람 사이의 극심한 언어적 불균형이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를 수 없음을. 입가에 번진 짧은 웃음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작은 승리를 선물했다.
그녀는 크게 헛기침을 하고 등을 꼿꼿이 세운 뒤, 턱을 바짝 추켜들었다.
-나도… 이, 이제부터, 반말할 거야.
그러고는 핸드백으로 몸 앞을 가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맙소사! 이제 막 나가자는 거지? 응?
태일은 소리쳤다.
-넌 너무 예의가 없어. 너… 너한테는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미쳤구나, 진짜.
-아니, 안 미쳤어.
-야!
-나도, 야, 야! 앞으로 갑자기 나타나지 마. 나도 바쁜 사람이야.
-내 참… 미치겠네.
-그리고 내돈내산이야.
-뭐?
-내. 돈. 내. 산! 내 돈 주고 내가 산다는 뜻이야. 오늘 저녁, 내가 낸 거야. 내 음식 내가 고르는 건데, 왜 네가 멋대로 스테이크를 시켜? 나, 스테이크 안 좋아해. 그것도 몰랐어?
-미쳤니? 뭘 잘못 먹은 거야?
-맞아, 잘못 먹었지. 바로 그 스테이크! 그걸 먹고 얹혀서 지금 이러는 거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알긴 네가 뭘 알아!
-취했네. 진짜 취했어.
-와인 한 잔에 취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평소와 달리 날것 그대로 쏟아낸 목소리가, 서윤의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를 툭, 밀어냈다. 속에 막혀 있던 게 서늘하게 뚫린 듯한 후련함이 온몸으로 퍼져갔다. 태일이라는 남자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더는 그의 눈치를 보며 마음 졸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농담 섞인 희극 한 편을 바라보는 듯한 여유마저 느껴졌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성격이었고, 항상 모나지 않은 일상을 견뎌왔다. 싫은 기색도, 불편한 표정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억울함을 억지웃음으로 덮은 삶은 결국 자신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는 것을. 분노를 삼킨다고 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약한 자의 침묵 따위 세상은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여기부터 난 그만 갈게. 참, 앞으로 나한테 볼일 있으면 반드시 전화부터 하고 와. 깜짝 쇼는 곤란해. 알았지?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보인 뒤,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어깨를 곧게 펴고는 안국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태일이 두어 번 소리쳐 불렀지만, 서윤은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두운 골목 안,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심한 발걸음 소리가 어느새 든든한 방패가 되어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감싸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