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명명희 선생은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전쟁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인물화 세계를 확립했고, 수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명명희 인물화展’을 비롯해 국제미술초대전 대상, 한국예술대상, 금관문화훈장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거쳐온 발자취는 곧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명명희 선생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작품은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 위상을 노린 무단 복제와 위작 유통이 암암리에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혹시 선생님 최근작들을 볼 수 있을까요?

-아뇨. 작업실은 물론이고, 작품 공개도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가능해요. 괜한 수고를 드린 것 같네요. 계속 전화로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직접 뵙고 설명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

-별말씀을요. 제가 먼저 방문하겠다고 부탁드린 거잖아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오히려 기쁜걸요.

-개인전이든 회고전이든 언젠가 다시 준비하게 될 거예요. 

어머니는 리온 갤러리를 좋아하세요. 상업성도 덜하고, 전시 수준이 품격 있다고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뭔가 확실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명 선생님께서 김순자 씨를 많이 의지하시니까요.


-최희숙 관장님이 확실한 답을 얻어오라 하신 건가요?


김순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선생님 작품 활동이 궁금해서요.

-그렇다면 잠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네?

-제 사무실에 어머님의 미공개 작품 몇 점이 있어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거라도 보여드리는 게 도리겠죠.

-아, 감사합니다.


서윤은 그녀를 따라 1층 한쪽에 마련된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두 점은 9년 전 동유럽 스케치 여행에서 그린 풍경과 인물화였고, 정면에 걸린 40호 유화 한 점은 명명희 선생의 기존 화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반추상 계열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일흔을 넘긴 화가의 붓끝은 여전히 힘찼고, 화면에는 노련함과 생생한 상상력이 함께 살아 있었다. 그 그림은 단순한 색채나 형태의 조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와 묵직한 사유가 화면 속에 함께 자리했다.


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의 흔적은 보는 이에게 먼 시간의 결을 더듬게 했다. 무거운 색조와 경쾌한 터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섬세한 색의 중첩과 질감은 작가가 화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색채 농도의 부드러운 변화와 곳곳에 드러나는 강렬한 대비는 순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안에는 자연의 숨결, 인간의 고독, 그리고 생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서사가 녹아 있었다. 노화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작품 세계와 그 안에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을 떠올리자, 문득 서윤은 자신의 삶이 한없이 가볍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이면 그 순간, 횡계 숲길에서 헤어진 도준이 떠오른 걸까. 그것은 아픈 진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그즈음의 서윤은 우울한 얼굴로 단조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끔 태일과 저녁 시간을 함께했지만, 예전처럼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마음속에 또 다른 존재를 품게 된다는 건, 하나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시간과 행동, 언어 습관까지, 도준을 만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 듯했다. 가슴을 저미던 고통은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일상의 흐름은 무늬 없는 벽지처럼 밋밋해져, 어떤 감정도 쉽게 머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노화가가 따스한 손길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명명희 작가의 그림 한 점이 봄바람처럼 스며들어 그녀의 마음을 감싸안았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숨결이 고요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진정한 예술이란, 이렇게 살아 있는 온기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리라. 서윤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어때요?

-정말…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에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볼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말 들으니 기쁘네요. 제목은 ‘사월의 정원’이에요. 임시로 붙였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죠?

-그렇네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서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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