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잠시 후,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태일은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은 방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괜찮아요. 오늘은 조금 걷고 싶어요.
이 순간만큼은 그 남자의 승용차에 오르는 일이, 어느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차 안에 단둘이 있게 되는 것,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질 상황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밀폐된 침묵 속, 끈적거리는 원색적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이제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
그때, 갤러리 안에서 경숙 씨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을 향한 본능적인 호기심, 남의 비밀을 들춰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그녀의 눈빛에 어른거렸다. 직원들의 연애에 남다른 촉을 세우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 ‘신우건설’ 일가는 리온 갤러리에서 특별 관리하는 주요 고객군이었다.
서윤이 쇼나 조각을 배달한 일을 계기로 그 집안의 후계자와 약혼하게 된 일화는 인사동 거리 안팎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일종의 우화처럼 소비되었다. 리온 직원들 사이에서도 놀라움과 수군거림을 동시에 자아낸 큰 사건이었다. ‘신우건설’ 황태자가 갤러리 앞에 불쑥 나타난 지금, 경숙 씨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서윤은 유리창 너머 껄끄러운 시선을 의식하며, 이 불쾌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태일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오늘은 제가 저녁을 대접할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데라도 있는 거야?
-인사동에도 괜찮은 식당 많아요. 차는 여기 두세요. 관리인 아저씨께 미리 말씀드렸거든요.
어차피 갤러리 문이 닫히면 주차장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태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랐다.
인사동 4길에 자리한 ‘다래원’은 120년 된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대문간 근처에는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고, 뜰 안으로 들어서면 기와지붕을 올린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이 조선시대 대갓집 같은 옛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대들보가 드러난 식당 내부는 전통 가옥의 멋을 고스란히 품은 채, 실용과 절제가 어우러져 은은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다.
두 사람은 대청과 마당 사이에 놓인 격자문 옆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창살 유리문 밖으로는 부드러운 조명을 머금은 정원이 정갈하게 펼쳐졌고, 키 낮은 정원수들과 계절 꽃들이 밤의 공기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 종업원이 정중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스테이크와 생선 요리를 중심으로 한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성. 수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일 수 있어 입맛이 까다로운 태일도 무난히 만족할 만했다.
실내에는 진공관 턴테이블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음색의 바흐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일은 묘하게 경색된 표정으로 메뉴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당 안에는 빈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느긋하게 환담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태일은 괜히 다른 테이블들을 힐끔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점점 굳어가는 그의 얼굴은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었고, 서윤은 그 차가운 시선에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꼭 이런 데까지 와야 했나?
-왜요, 여기가 어때서요?
-음악도 시끄럽고, 뭐랄까… 좀 구려.
-토속적인 분위기, 안 좋아요? 난 좋은데.
-뭐, 크게 나쁘진 않아. 약간 색다르달까.
-태일 씨, 제가 대접하려는 자리잖아요. 기분 좋게 드세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쪽 입술을 씩 올렸다.
-난 이미 더 괜찮은 데 예약해 놨어.
서윤은 고요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태일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단순한 불만이나 반감이 아닌,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수면 위로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
-괜찮은 데라면 어디요? 호텔 꼭대기 회원제 식당 같은 데?
-오늘 왜 이래. 꽤 날카롭네.
-제가요? 글쎄요.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
서윤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와인? 차 가져온 거 잊었어?
-인사동 올 땐 차를 두고 오세요. 그래야 이 근처 맛집도 둘러보죠.
-하. 인사동 낭만이라니! 뭐, 결혼 전엔 이런 추억 하나쯤 쌓는 것도 나쁘진 않지.
‘결혼.’ 그 두 음절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어느새 커다란 관념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죄여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