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저는 한 잔 마셔야겠어요.


서윤이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자, 태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뚫어지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하우스 와인 한 잔과 연어 타르타르를 주문했다. 태일의 껄끄러운 시선이 그녀의 목덜미를 힐끔 쏘아봤다.


그는 말없이 몇 가지 메뉴를 훑어보다가, 바게트 위에 토마토와 바질을 얹은 브루스케타와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골랐다.


-메인 코스는 조금 있다가 주문할게요.


서윤이 메뉴판을 접어 테이블 옆에 내려놓으며 웨이터에게 말했다. 그 말을 가로채듯, 태일이 끼어들었다.


-지금 시키지 뭐.


그는 리브 아이 스테이크 2인분을 아무렇지 않게 주문해버렸다. 서윤은 원래 레몬즙을 곁들인 생선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는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출장 간 일은 잘됐어요?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태일은 늘 그래왔듯 건성으로 말을 받았다.


-응. 그렇지 뭐.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잖아요?

-응. 그렇게 됐어.

-아아, 그렇군요.


짐작 가능한 대답들이 이번에도 서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연어 타르타르를 떠서 입에 넣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이어갔지만, 신선해야 할 연어와 아보카도는 비릿하니 물컹했고, 와인은 산뜻함 대신 떫은 산미와 알싸한 뒷맛만을 혀끝에 남겼다.


태일의 비아냥거리는 표정은 그마저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게 했다. 기분 나쁜 눈초리가 와인의 향기까지 빼앗아 가는 듯했다. 서윤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는데, 그 모든 행위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강요된 유치하고 뻔한 연기처럼 느껴졌다.


스테이크가 나오기 전까지, 테이블 위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의미 있는 말들이 공허하게 오갔을 뿐, 지루한 정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만을 드러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메우려 애쓰지 않는 간극만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섰을 때는 무거운 족쇄를 풀어낸 듯 기이하게 가볍고 낯선 해방감이 따라붙었다.

 

라일락 향기 흩날리는 6월의 봄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 속에는 그윽한 꽃내음과는 어울리지 않은 먹구름이 응어리져 있었다. 


두 사람이 골목길을 나란히 걷고 있을 때, 술에 취한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떠들며 다가왔다. 그중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서윤 쪽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태일이 그녀의 팔뚝을 세게 잡아챘다. 그 몸짓은 연인을 보호하려는 다정한 반응이라기보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서툴고 거친 반사 작용에 가까웠다.


-아얏!


서윤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왜?

-아프잖아요.

-그러게, 여자가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잖아.

-와인 한 잔 마신 게 그렇게 싫었어요?

-데려다줄게. 취했잖아.

-와인 한 잔에 어떻게 취해요?

-어둡고 위험하잖아.

-아뇨, 난 멀쩡해요.


태일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서윤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지금 서윤에게 이 밤거리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밀폐된 공간이나 다름없는 그의 차에 올라타는 일이었다. 


오늘 밤, 그가 바라는 건 어쩌면 단 하나일지도 몰랐다. 저녁 식사를 빌미로 호텔 식당으로 유인한 뒤, 값비싼 요리와 와인으로 적당히 생색을 낸 다음, 언제나 그랬듯 아무렇지도 않게 객실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 그 얄팍한 술수가 어긋나자,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는 다른 약속이 있어요.

-이 밤에?

-제이요. 제이는 출판사에서 늦게까지 일하잖아요.

-미치겠군. 젠장!


태일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구둣발로 땅을 걷어찼다. 발끝에 차인 돌멩이 하나가 또르르 굴러갔다.


-내가 오늘 바쁜 일 다 제쳐두고 여기까지 왜 온 건데?

-그러게요. 다음부터는 꼭 전화하고 와 주세요. 저도 바쁠 때가 있으니까요.

-야, 나서윤. 너 요즘 왜 이렇게 삐딱해? 누구 생긴 거야? 어떤 놈이야?


그의 말투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해 있었고, 눈빛에는 분노와 모멸,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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