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그 즈음 도준은 거의 매일 오대산에서 아침 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녀와 약속이 있던 그날은 멀리 가지 않고 집 뒤 야산에 올라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른 아침 흘린 구슬땀은 몸뿐 아니라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씻어내는 듯했고, 근육 깊이 배어든 개운함에 전신이 노곤하면서도 뿌듯한 성취감이 차올랐다. 그는 숲속의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매일 정해둔 운동량을 오늘도 어김없이 지켜낸 셈이었다.


체력 훈련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그녀와의 약속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그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산길을 툭툭 밟으며 내려오다 보니,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듯 발길은 절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파란 지붕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 깊이 설레는 감정이 커져만 갔다. 그녀에 대한 애틋한 심정, 같은 공간에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을지, 아니면 벌써 일어나 아침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하지만 무뢰한이 아니고서야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 집이 보이는 오솔길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며 스스로를 달랬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잖아.


그는 곧 네팔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벌써부터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새롭게 펼쳐지자마자 다시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내년 로체봉 등정을 위한 이번 훈련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이토록 깊은 갈등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일이 엇박자가 날 때도 있는 법이지. 오늘은 그저 오늘 일만 생각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읍내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아침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날 아침 도준은 오로지 그녀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얼마 후 고모부 집에 도착했다.


대청마루의 괘종시계가 9시 종을 울리기 전, 그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몸을 씻은 후 낚시터에서 쓸 물건들을 하나하나 차 짐칸에 실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샌드위치, 커피, 생수, 잡다한 낚시용품들. 마지막으로, 그는 방으로 들어가 낡은 상자 안에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해 온 분홍신을 꺼내 왔다.


-후…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된 거로군.


도준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번졌다. 


용천 계곡 근처에, 동네 사람들만 드나드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오늘 오전, 도준은 서윤을 그곳 낚시터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어린 시절 익사 사고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오래 묻어둔 공포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무서운 것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할 생각이었다. 물 공포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약속 시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준은 횡계 읍내 낚시 가게에 들러 민물 전자찌와 밑밥 파우더 세트를 사고 나서, 서윤이 있는 파란 지붕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숲속 비포장도로를 따라 녹슨 철조망과 배수로가 듬성듬성 이어지고, 양계장에서 흘러나온 닭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음악이나 들을까, 생각하며 라디오를 켜려던 그때였다. 검은색 BMW 한 대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거칠게 끼어들더니, 도준의 랜드로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전면 유리를 덮치자, 도준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간발의 차였다. 이쪽에서 멈췄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운전을 저렇게 하는 거야…


도준은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도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앞으로 계속 가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좁은 산길만 이어질 뿐이었다. 길 한쪽에는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고, 그 속에 오래된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곳은 막다른 길입니다. 돌아가시오.’


빛바랜 글씨는 거의 다 지워졌지만, 거뭇하게 남은 경고문의 흔적이 음습한 기운을 뿜어내며 상서롭지 않은 부적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운전자가 초행길이라 표지판을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듯, 이상하리만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길 끝에 서윤의 파란 지붕 집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 집을 찾아온 것이라면, 도대체 그 정체는 누구일까.


방금 스쳐 지나간 BMW의 운전자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였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서윤이 어제 했던 말이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검은 차량이 단순히 길을 잘못 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설마, 그녀의 약혼자?’


그런 의문이 떠오른 순간, 운전대를 쥔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차를 움직일 수 없었다.


조수석에 놓인 분홍색 신발 한 짝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전 주인을 잃은 그 신발은,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장막에 가려진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위협과 불확실한 추측들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마음을 쪼아댔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단순히 신발을 돌려주는 것뿐일까?’


어쩌면 오늘은 그 신발이 제 임자를 찾아가는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두려운 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는 아픈 진실을 안고 돌아서야 할지,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채, 혼자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등을 밀어내는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이승 저편에 아득하니 솟아 오른 로체 남벽이 떠올랐다. 자아의 한계를 시험하고, 불가능을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곳.


‘나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짧고도 치명적인 물음이 심장 가장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정답 없는 가설, 확신할 수 없는 명제들.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오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윤은 그에게 끝없는 추측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허공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자일과 같았다.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목덜미 주위를 차갑게 감쌌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운명의 시험대. 얽히고설킨 위태로운 줄에 의지한 채, 더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듯했다.


도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차를 오솔길 옆에 천천히 세웠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마른 낙엽 하나가 차창 귀퉁이에 매달렸다. 파르르. 애잔하게 떨리는 그 나뭇잎을 바라보는 동안, 불길한 상상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뚫어질 듯 정면을 응시했다.


-길을 잘못 들었을 거야. 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입속말로 낮게 웅얼거리며 마음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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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어젯밤, 도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심장이 타들어 갈 듯 괴로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 그녀는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그나마 제정신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녀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그녀의 말에 순간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이던 그의 눈빛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곧 떠날 사람, 나는 이 현실 속에 남을 사람 아닌가.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어설픈 유혹과 날것에 가까운 본능에 휘말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깊은 회한과 상처뿐이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낚시터까지만 가자. 오늘이 지나면 다 지난 얘기가 되는 거지.


그녀는 전화 플러그를 다시 꽂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동안 진공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안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기다림은 차갑게 식은 커피잔 속 침묵이자, 스스로를 시험하는 고요한 형벌이다. 시간은 황소 걸음처럼 느릿느릿 움직였고, 벽시계의 초침만이 째깍거리며 초조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청소기 선을 정리해 보관함에 넣고, 노트북을 접어 배낭의 짐 정리까지 마친 그녀는 가끔 창밖을 내다보며 그의 차가 집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마침내 저 멀리서 묵직한 자동차 소리가 숲속의 아침 정적을 가르며 다가왔다. 벽시계는 거의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낚시터에 들렀다가 곧장 서울로 돌아갈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겨우 5분 먼저 온 거야? 흥, 그렇게까지 딱 맞춰올 일이냐고.


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는, 모처럼 소풍을 앞둔 어린 여학생처럼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급하게 헹궈 식기 건조대에 엎은 뒤, 핸드백과 현관 열쇠를 챙겨 들었다. 그 사이 자동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그만. 그만…


손바닥으로 가슴을 다독이듯 툭툭 치며 말했다.


가슴속에서 꿈틀대던 설렘을 억누르며 창가로 다가서던 순간, 귓가를 파고든 뜻밖의 엔진음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뭐지? 그 차가 아니야?’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와는 결이 다른, 매끄럽고 단단한 울림이었다. 순식간에 실내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따스한 온기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기다림은 때때로 마지막까지 우리의 마음을 유리구슬처럼 쥐고 흔들다가,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잔혹한 미소로 모든 희망을 짓밟곤 한다.


그날 아침, 서윤은 현실이 들이민 느닷없는 형태의 맨얼굴과 마주쳤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던 차는 아침 내내 기다린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아니라, 서울에 있어야 할 태일의 최신형 BMW 7시리즈였다.


-아악!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서 현관 열쇠가 툭, 떨어졌다. 온몸에 미세한 떨림이 번지기 시작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불안하게 흔들렸다. 별장 앞 공터에 검은 흉조 한 마리가 내려앉은 듯 살얼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세상의 끝에서 시곗바늘조차 멎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태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무기력한 권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무심하고도 싸늘한 시선으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쪽 끝이 말려 올라가듯 일그러진 그 입매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과 함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태일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마음 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차갑고 빈정대는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의 저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과장된 호의는 친절이라기보다 오히려 덫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는 자신의 여성성을 조롱하고 무너뜨리려는 음험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평소 태일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몸을 사려왔던 서윤에게, 그의 돌연한 출현은 숨이 막힐 듯한 악몽과도 같았다. 잠시라도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다면, 그 순간 발밑에서 지옥문이 벌컥 열릴 것임을 그녀는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서윤은 거친 숨을 고르며 두려움을 눌러 보려 애썼다. 곧 도준이 데리러 올 시간이었고, 그의 랜드로버가 금세 별장 앞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거대한 벽, 그 중심에는 태일이 서 있었다.


왜 그는 이곳에 나타난 걸까.


무엇 때문에 갑자기 오게 된 것일까.


어젯밤 제이와 나눈 전화 통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태일은 제이에게 서윤의 행방을 물었다고 했다. 그녀가 횡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제이였다. 그가 이 시간에 횡계에 닿으려면 적어도 새벽 7시 이전에는 성북동을 떠났어야 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은 분명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나를 데려가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걸까?’


삶의 실체는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몰아치곤 한다. 그것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란이자, 인생의 거대한 크레바스였다. 그날 금요일 아침, 서윤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한층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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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아침 여덟 시가 막 지나서야 서윤은 눈을 떴다. 지난밤, 처음 만난 남자의 전화번호 하나를 두고 한참을 실랑이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으니, 그리 오래 잠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햇살이 흘러내리듯 얼굴을 어루만지자, 뒤엉켰던 자책과 갈등이 희미한 신기루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를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아-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따라 거실로 내려갔다. 맨발로 마룻바닥을 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솟구치는 즐거움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스토브 위에 물 주전자를 올리고 라디오를 켰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레게풍의 경쾌한 선율이 넘실거리며 집 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고양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듯 양팔을 둥글게 벌리며 가벼운 스텝을 밟았다. 햇살 가득한 아침, 새봄의 청량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즉흥적인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빙글빙글 돌아가던 그녀는 어느새 상상 속 누군가와 춤을 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양가의 허락 아래 약혼식을 올린 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그녀의 삶 속에 스며든 낯선 이였다.


신우건설의 후계자,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판단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강태일이라면, 이 순간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냉소 어린 눈빛으로 비웃듯 한쪽 입술을 비틀며, ‘나잇값 좀 하라’는 쓴소리를 던졌으리라. 나잇값과 댄스의 함수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무관한 것일까. 이 환히 밝고 유쾌한 순간마저, 유치하고 철없는 치기라며 가볍게 깎아내렸을 것이다.


반면, 길 위에서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걷는 남자, 도준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그녀를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마음속으로는 함께 발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들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설렘에 주저 없이 동조해 주지 않았을까.


그녀는 불현듯 몸을 돌려 식기 건조대 위에 엎어둔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어제 도준이 커피를 마셨던 바로 그 잔이었다. 그의 입술이 스쳤을 자리에,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짧았던 입맞춤의 감촉이 입술 끝에 되살아나며, 달콤한 부끄러움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


도준이 남기고 간 말이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이 그와 함께할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가슴 어딘가가 텅 빈 듯 허전해졌다.


그녀는 스스로의 변화를 절감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찾아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준은 처음부터 다른 존재였다. 


그를 향한 이 갈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새로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 이 설레는 마음이 낯설어서 나 자신의 경박함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그의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 간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가벼운 접촉 사고라 여기고 싶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고요하고 정돈된 삶의 가치를 지켜내리라, 이번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잘 지나가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야.


‘바람’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그녀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처럼 떠올랐다.

 

멀리 보리암에서 울려 퍼진 웅장한 타종 소리가 아득히 번져왔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하며 포크로 달걀물을 젓기 시작했다. 햄을 썰어 넣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아침부터 기름진 냄새는 내키지 않았다. 좀 더 부드럽고 간소하게 먹는 게 위장에도 편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옮기려는데, 한 가지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낚시터에서 보여 줄 게 있다고 했지… 그게 뭘까?’


그 남자는 순간의 기분에 휩쓸려, 혹은 궁색한 변명 삼아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하필 낚시터여야만 하는 거지. 정작 중요한 것은 ‘보여 줄 무엇’이 아니라, 어쩌면 ‘낚시터’라는 장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생각은 자꾸만 얽혀 갈 뿐, 단 하나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에잇, 청소나 하자.


그녀는 마음에 남은 의구심을 털어내고 서둘러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릇을 모아 설거지를 마친 뒤, 행주를 빨아 싱크대 주변과 테이블 위를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려던 찰나, 전화 단자에서 뽑아 놓은 전화선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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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흠칫 놀란 도준은 그 자리에 멈춰 서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남녀가 뒤엉킨 듯한 격렬한 숨결과 흐느낌이 한낮의 정적을 흔들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몸은 떨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망치듯 뒷걸음질하며 그 집을 벗어난 도준은 울타리 근처의 오래된 느티나무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 도준은 고모부가 윗집 아줌마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는 고모부의 행동은 어렴풋이 금지된 행위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일하는 시장에서 옆집 옷가게 부부가 칼부림까지 하며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는 찢어진 메리야스 바람에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냅다 줄행랑을 쳤고, 아줌마는 산발한 머리로 시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는 옆집 가게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려 저런 사달이 난 거라고 말했다. 한 번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는 영원히 남편을 믿지 못하고,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이 도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고모도 그 옷가게 아줌마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곧 들통날지도 모를 비밀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도준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사실로 인해 한동안 마음 깊이 괴로워했다. 몰래 주위를 살피던 고모부의 모습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그때 들었던 윗집 아줌마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경기도의 어느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날에도 그랬다. 도준이 방 안에서 짐가방을 꾸리고 있을 때, 고모는 책꽂이 위에 놓아둔 여자아이의 샌들을 보며 누구 거냐고 의아해했다. 고모부의 외도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끝내 입을 다문 것은, 단지 어른들의 세계에 감춰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고모는 그의 유일한 친족이자, 부모를 대신한 보호자였다. 그런 고모가 죽을 때까지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불행 속에서 살아갈까 봐, 도준은 몹시 두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모부는 늘 고모에게 다정했다. 바람난 남자들이 아내에게 더 자상하다는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고모부의 태도는 전혀 가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그는 가정에 책임을 다하는 남편이었고, 고모는 그런 고모부를 믿고 존경했다.


-내가 뭔가 잘못 본 걸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때의 일을 애써 외면했다. 결국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나면서, 그날의 모든 비밀은 분홍신 한 짝과 함께 어둠 속에 묻혔다.


요즘 들어, 도준은 한 개인의 인생 끝자락에 남은 ‘그리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우리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그리움마저 함께 사라지는 걸까.


10여 년 전, 윗집 아줌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모부는 그 집의 울타리를 들락거리며 관리인 노릇을 자처했다. 윗집 아줌마에 이어 고모마저 세상을 떠났지만, 고모부는 모두가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며 추억의 자취를 따라 망각의 그림자 속을 거닐었다.


윗집 아줌마는 고모부에게 어떤 의미의 사랑이었을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자 피할 수 없는 과보를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무게를 과거에서 현세로, 다시 미래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렇게 과거의 뜨락에서 텅 빈 그림자를 응시하며 외따로 서 있는 고모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왠지 모르게 애잔하고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고모부의 뒷모습에 드리워진 생의 쓸쓸함을 마주할수록, 그 어떤 비밀도 발설하지 않고 그때 서둘러 고모 집을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새삼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고모에 대한 미안함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그러나 늙고 병든 고모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요즘,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나누어왔던 두 사람의 사랑 역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토록 가슴에 품을 만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내는 인생 또한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도준은 그 집 손녀딸인 서윤과 자신 사이의 오랜 인연을 곰곰이 되짚었다. 이 분홍신 한 짝에 윗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비밀스러운 사랑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가 막히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는 설렘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오늘 밤, 도준은 고모부 집 창고에서 오랜 세월 먼지에 덮여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었다. 이제 그 신발을 원래 주인인 서윤에게 건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고모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비밀을, 굳이 서윤에게도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어쩌면 고귀한 보석처럼 드러낼 때보다 속으로 간직할 때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진정한 보석의 가치는 무수한 비밀들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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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어린 소녀의 분홍색 샌들은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도준은 지금도 계곡물에 떠밀려 내려왔던 그 신발을 처음 발견했던 때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전 학년이 모두 운동장에 모여 방학식을 치른 후, 학생들은 교실에서 담임선생으로부터 방학책을 나눠 받았다. 선생님은 방학 숙제를 모두 해서 2학기 개학식 날 일기장과 함께 제출하라고 말했다.


-개학하면 방학책에 있는 문제로 시험을 볼 거야. 방학 동안 놀지만 말고,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모두 알겠나?
-네.

아이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매일매일 쓰는 일기를 미뤘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쓰면, 날씨를 알 수 없지. 그럼 한꺼번에 쓴 일기는 어떻게 될까? 뽀록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날은 잠시나마 학교 울타리에서 해방되는 초등생들의 독립 기념일이기도 했다. 학급 종례가 끝나고 청소 시간까지 마친 아이들은 각자 책상 속을 정리한 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다. 도준도 다른 애들과 함께 교문을 나섰지만, 그 순간 집도 보호자도 없이 홀로 남겨진 듯한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기쁨의 계절이었지만, 도준에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없는 상실의 계절이었다. 고모네 가족이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엄마가 직접 밥상을 차려주던 서울 집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무엇보다 다시는 양친을 볼 수 없다는 슬픔과 비애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그의 의식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름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수박을 베어 물던 일, 정상 높은 바위 위에서 함께 외치던 ‘야호!’, 약수터를 찾아 거친 풀숲을 헤치며 아버지보다 먼저 길을 내던 순간, 잔소리 속 인자한 웃음소리….


기억은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제 그런 기적 같은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그는 너무 일찍 깨닫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부모님을 잃은 상실감이 속살 깊이 파고드는 동안, 그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용천 계곡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 숲속에는 초목의 냄새가 짙게 진동했다. 초록으로 물든 오솔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거친 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물줄기 아래, 무언가 바위틈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며칠 전 그 소녀가 잃어버린 샌들 한 짝이 분명했다. 에나멜로 코팅된 신발은 햇살 속에서 반들거리며 선명한 분홍빛을 드러냈고, 물속에 처박히지 않은 덕분에 흠집 하나 없이 새것처럼 빛났다. 도준은 그것을 손에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걸 돌려줘야 할 텐데.’


하지만 더 이상 소녀를 만날 수 없게 된 터라, 결국 그 신발을 윗집 아줌마를 통해 전해주기로 결심했다.

 

고모에게 모든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학교를 빼먹고 용천 계곡으로 놀러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크게 꾸중을 듣고, 회초리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영웅담처럼 들릴 것이 뻔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 더 깊은 추궁과 불신으로 내몰릴 게 분명했다. 고모에게는 오히려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다.


기분 또한 그때 일로 싱숭생숭했다. 꼬맹이 여자아이에게 입을 맞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비록 인공호흡을 위한 일이었지만, 소년 도준에게는 그것이 생애 첫 입맞춤이었다. 사람은 생의 어느 순간 처음으로 이성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그런 설렘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면, 도준에게는 바로 그때가 첫 순간이었다.


그 아이도 그런 묘한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을까. 그래서 일부러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던 건 아닐까. 그런 발칙한 상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혼자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윗집에 가서 신발만 살짝 놓고 돌아오자.’


어른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윤에게 큰할머니가 되는 윗집 아줌마는 과부로 혼자 살고 있었다. 단정한 옷맵시와 고운 외모가 인상적인 40대 후반의 여인으로, 고모와도 자주 오가며 음식을 나누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윗집 아줌마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산간 지방의 농사꾼 마을에 사는 다른 아낙들과 달리, 그녀는 곱상한 말투와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세련된 기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모는 윗집 아줌마가 유복한 가문의 자손이자 대도시에서 여학교까지 마친 신여성이라고 말했다. 22년 전, 그녀의 집은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마당 한쪽에 잘 가꾼 꽃밭이 있었고, 싸리나무 울타리 주변도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13세 도준은 분홍신을 싼 신문 뭉치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저기요, 아주머니 계세요.’ 하고 작게 부른 건 도둑처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댓돌 위에 놓인 큼지막한 검정 고무신이 도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왼쪽 고무신에 찍힌 낫 자국이 왠지 모를 기시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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