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어젯밤, 도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심장이 타들어 갈 듯 괴로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 그녀는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그나마 제정신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녀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그녀의 말에 순간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이던 그의 눈빛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곧 떠날 사람, 나는 이 현실 속에 남을 사람 아닌가.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어설픈 유혹과 날것에 가까운 본능에 휘말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깊은 회한과 상처뿐이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낚시터까지만 가자. 오늘이 지나면 다 지난 얘기가 되는 거지.
그녀는 전화 플러그를 다시 꽂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동안 진공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안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기다림은 차갑게 식은 커피잔 속 침묵이자, 스스로를 시험하는 고요한 형벌이다. 시간은 황소 걸음처럼 느릿느릿 움직였고, 벽시계의 초침만이 째깍거리며 초조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청소기 선을 정리해 보관함에 넣고, 노트북을 접어 배낭의 짐 정리까지 마친 그녀는 가끔 창밖을 내다보며 그의 차가 집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마침내 저 멀리서 묵직한 자동차 소리가 숲속의 아침 정적을 가르며 다가왔다. 벽시계는 거의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낚시터에 들렀다가 곧장 서울로 돌아갈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겨우 5분 먼저 온 거야? 흥, 그렇게까지 딱 맞춰올 일이냐고.
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는, 모처럼 소풍을 앞둔 어린 여학생처럼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급하게 헹궈 식기 건조대에 엎은 뒤, 핸드백과 현관 열쇠를 챙겨 들었다. 그 사이 자동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그만. 그만…
손바닥으로 가슴을 다독이듯 툭툭 치며 말했다.
가슴속에서 꿈틀대던 설렘을 억누르며 창가로 다가서던 순간, 귓가를 파고든 뜻밖의 엔진음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뭐지? 그 차가 아니야?’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와는 결이 다른, 매끄럽고 단단한 울림이었다. 순식간에 실내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따스한 온기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기다림은 때때로 마지막까지 우리의 마음을 유리구슬처럼 쥐고 흔들다가,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잔혹한 미소로 모든 희망을 짓밟곤 한다.
그날 아침, 서윤은 현실이 들이민 느닷없는 형태의 맨얼굴과 마주쳤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던 차는 아침 내내 기다린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아니라, 서울에 있어야 할 태일의 최신형 BMW 7시리즈였다.
-아악!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서 현관 열쇠가 툭, 떨어졌다. 온몸에 미세한 떨림이 번지기 시작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불안하게 흔들렸다. 별장 앞 공터에 검은 흉조 한 마리가 내려앉은 듯 살얼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세상의 끝에서 시곗바늘조차 멎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태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무기력한 권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무심하고도 싸늘한 시선으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쪽 끝이 말려 올라가듯 일그러진 그 입매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과 함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태일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마음 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차갑고 빈정대는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의 저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과장된 호의는 친절이라기보다 오히려 덫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는 자신의 여성성을 조롱하고 무너뜨리려는 음험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평소 태일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몸을 사려왔던 서윤에게, 그의 돌연한 출현은 숨이 막힐 듯한 악몽과도 같았다. 잠시라도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다면, 그 순간 발밑에서 지옥문이 벌컥 열릴 것임을 그녀는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서윤은 거친 숨을 고르며 두려움을 눌러 보려 애썼다. 곧 도준이 데리러 올 시간이었고, 그의 랜드로버가 금세 별장 앞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거대한 벽, 그 중심에는 태일이 서 있었다.
왜 그는 이곳에 나타난 걸까.
무엇 때문에 갑자기 오게 된 것일까.
어젯밤 제이와 나눈 전화 통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태일은 제이에게 서윤의 행방을 물었다고 했다. 그녀가 횡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제이였다. 그가 이 시간에 횡계에 닿으려면 적어도 새벽 7시 이전에는 성북동을 떠났어야 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은 분명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나를 데려가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걸까?’
삶의 실체는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몰아치곤 한다. 그것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란이자, 인생의 거대한 크레바스였다. 그날 금요일 아침, 서윤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한층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