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흠칫 놀란 도준은 그 자리에 멈춰 서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남녀가 뒤엉킨 듯한 격렬한 숨결과 흐느낌이 한낮의 정적을 흔들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몸은 떨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망치듯 뒷걸음질하며 그 집을 벗어난 도준은 울타리 근처의 오래된 느티나무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 도준은 고모부가 윗집 아줌마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는 고모부의 행동은 어렴풋이 금지된 행위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일하는 시장에서 옆집 옷가게 부부가 칼부림까지 하며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는 찢어진 메리야스 바람에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냅다 줄행랑을 쳤고, 아줌마는 산발한 머리로 시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는 옆집 가게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려 저런 사달이 난 거라고 말했다. 한 번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는 영원히 남편을 믿지 못하고,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이 도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고모도 그 옷가게 아줌마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곧 들통날지도 모를 비밀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도준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사실로 인해 한동안 마음 깊이 괴로워했다. 몰래 주위를 살피던 고모부의 모습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그때 들었던 윗집 아줌마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경기도의 어느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날에도 그랬다. 도준이 방 안에서 짐가방을 꾸리고 있을 때, 고모는 책꽂이 위에 놓아둔 여자아이의 샌들을 보며 누구 거냐고 의아해했다. 고모부의 외도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끝내 입을 다문 것은, 단지 어른들의 세계에 감춰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고모는 그의 유일한 친족이자, 부모를 대신한 보호자였다. 그런 고모가 죽을 때까지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불행 속에서 살아갈까 봐, 도준은 몹시 두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모부는 늘 고모에게 다정했다. 바람난 남자들이 아내에게 더 자상하다는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고모부의 태도는 전혀 가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그는 가정에 책임을 다하는 남편이었고, 고모는 그런 고모부를 믿고 존경했다.


-내가 뭔가 잘못 본 걸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때의 일을 애써 외면했다. 결국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나면서, 그날의 모든 비밀은 분홍신 한 짝과 함께 어둠 속에 묻혔다.


요즘 들어, 도준은 한 개인의 인생 끝자락에 남은 그리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우리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그리움마저 함께 사라지는 걸까.


10여 년 전, 윗집 아줌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모부는 그 집의 울타리를 들락거리며 관리인 노릇을 자처했다윗집 아줌마에 이어 고모마저 세상을 떠났지만, 고모부는 모두가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며 추억의 자취를 따라 망각의 그림자 속을 거닐었다.


윗집 아줌마는 고모부에게 어떤 의미의 사랑이었을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자 피할 수 없는 과보를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무게를 과거에서 현세로, 다시 미래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렇게 과거의 뜨락에서 텅 빈 그림자를 응시하며 외따로 서 있는 고모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왠지 모르게 애잔하고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고모부의 뒷모습에 드리워진 생의 쓸쓸함을 마주할수록, 그 어떤 비밀도 발설하지 않고 그때 서둘러 고모 집을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새삼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고모에 대한 미안함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그러나 늙고 병든 고모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요즘,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나누어왔던 두 사람의 사랑 역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토록 가슴에 품을 만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내는 인생 또한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도준은 그 집 손녀딸인 서윤과 자신 사이의 오랜 인연을 곰곰이 되짚었다. 이 분홍신 한 짝에 윗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비밀스러운 사랑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가 막히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는 설렘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오늘 밤, 도준은 고모부 집 창고에서 오랜 세월 먼지에 덮여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었다. 이제 그 신발을 원래 주인인 서윤에게 건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고모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비밀을, 굳이 서윤에게도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어쩌면 고귀한 보석처럼 드러낼 때보다 속으로 간직할 때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진정한 보석의 가치는 무수한 비밀들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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