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어린 소녀의 분홍색 샌들은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도준은 지금도 계곡물에 떠밀려 내려왔던 그 신발을 처음 발견했던 때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전 학년이 모두 운동장에 모여 방학식을 치른 후, 학생들은 교실에서 담임선생으로부터 방학책을 나눠 받았다. 선생님은 방학 숙제를 모두 해서 2학기 개학식 날 일기장과 함께 제출하라고 말했다.
-개학하면 방학책에 있는 문제로 시험을 볼 거야. 방학 동안 놀지만 말고,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모두 알겠나?
-네.
아이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매일매일 쓰는 일기를 미뤘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쓰면, 날씨를 알 수 없지. 그럼 한꺼번에 쓴 일기는 어떻게 될까? 뽀록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날은 잠시나마 학교 울타리에서 해방되는 초등생들의 독립 기념일이기도 했다. 학급 종례가 끝나고 청소 시간까지 마친 아이들은 각자 책상 속을 정리한 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다. 도준도 다른 애들과 함께 교문을 나섰지만, 그 순간 집도 보호자도 없이 홀로 남겨진 듯한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기쁨의 계절이었지만, 도준에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없는 상실의 계절이었다. 고모네 가족이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엄마가 직접 밥상을 차려주던 서울 집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무엇보다 다시는 양친을 볼 수 없다는 슬픔과 비애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그의 의식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름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수박을 베어 물던 일, 정상 높은 바위 위에서 함께 외치던 ‘야호!’, 약수터를 찾아 거친 풀숲을 헤치며 아버지보다 먼저 길을 내던 순간, 잔소리 속 인자한 웃음소리….
기억은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제 그런 기적 같은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그는 너무 일찍 깨닫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부모님을 잃은 상실감이 속살 깊이 파고드는 동안, 그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용천 계곡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 숲속에는 초목의 냄새가 짙게 진동했다. 초록으로 물든 오솔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거친 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물줄기 아래, 무언가 바위틈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며칠 전 그 소녀가 잃어버린 샌들 한 짝이 분명했다. 에나멜로 코팅된 신발은 햇살 속에서 반들거리며 선명한 분홍빛을 드러냈고, 물속에 처박히지 않은 덕분에 흠집 하나 없이 새것처럼 빛났다. 도준은 그것을 손에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걸 돌려줘야 할 텐데.’
하지만 더 이상 소녀를 만날 수 없게 된 터라, 결국 그 신발을 윗집 아줌마를 통해 전해주기로 결심했다.
고모에게 모든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학교를 빼먹고 용천 계곡으로 놀러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크게 꾸중을 듣고, 회초리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영웅담처럼 들릴 것이 뻔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 더 깊은 추궁과 불신으로 내몰릴 게 분명했다. 고모에게는 오히려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다.
기분 또한 그때 일로 싱숭생숭했다. 꼬맹이 여자아이에게 입을 맞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비록 인공호흡을 위한 일이었지만, 소년 도준에게는 그것이 생애 첫 입맞춤이었다. 사람은 생의 어느 순간 처음으로 이성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그런 설렘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면, 도준에게는 바로 그때가 첫 순간이었다.
그 아이도 그런 묘한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을까. 그래서 일부러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던 건 아닐까. 그런 발칙한 상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혼자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윗집에 가서 신발만 살짝 놓고 돌아오자.’
어른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윤에게 큰할머니가 되는 윗집 아줌마는 과부로 혼자 살고 있었다. 단정한 옷맵시와 고운 외모가 인상적인 40대 후반의 여인으로, 고모와도 자주 오가며 음식을 나누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윗집 아줌마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산간 지방의 농사꾼 마을에 사는 다른 아낙들과 달리, 그녀는 곱상한 말투와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세련된 기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모는 윗집 아줌마가 유복한 가문의 자손이자 대도시에서 여학교까지 마친 신여성이라고 말했다. 22년 전, 그녀의 집은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마당 한쪽에 잘 가꾼 꽃밭이 있었고, 싸리나무 울타리 주변도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13세 도준은 분홍신을 싼 신문 뭉치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저기요, 아주머니 계세요.’ 하고 작게 부른 건 도둑처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댓돌 위에 놓인 큼지막한 검정 고무신이 도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왼쪽 고무신에 찍힌 낫 자국이 왠지 모를 기시감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