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아침 여덟 시가 막 지나서야 서윤은 눈을 떴다. 지난밤, 처음 만난 남자의 전화번호 하나를 두고 한참을 실랑이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으니, 그리 오래 잠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햇살이 흘러내리듯 얼굴을 어루만지자, 뒤엉켰던 자책과 갈등이 희미한 신기루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를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아-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따라 거실로 내려갔다. 맨발로 마룻바닥을 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솟구치는 즐거움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스토브 위에 물 주전자를 올리고 라디오를 켰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레게풍의 경쾌한 선율이 넘실거리며 집 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고양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듯 양팔을 둥글게 벌리며 가벼운 스텝을 밟았다. 햇살 가득한 아침, 새봄의 청량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즉흥적인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빙글빙글 돌아가던 그녀는 어느새 상상 속 누군가와 춤을 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양가의 허락 아래 약혼식을 올린 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그녀의 삶 속에 스며든 낯선 이였다.


신우건설의 후계자,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판단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강태일이라면, 이 순간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냉소 어린 눈빛으로 비웃듯 한쪽 입술을 비틀며, ‘나잇값 좀 하라는 쓴소리를 던졌으리라. 나잇값과 댄스의 함수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무관한 것일까. 이 환히 밝고 유쾌한 순간마저, 유치하고 철없는 치기라며 가볍게 깎아내렸을 것이다.


반면, 길 위에서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걷는 남자, 도준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그녀를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마음속으로는 함께 발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들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설렘에 주저 없이 동조해 주지 않았을까.


그녀는 불현듯 몸을 돌려 식기 건조대 위에 엎어둔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어제 도준이 커피를 마셨던 바로 그 잔이었다. 그의 입술이 스쳤을 자리에,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짧았던 입맞춤의 감촉이 입술 끝에 되살아나며, 달콤한 부끄러움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


도준이 남기고 간 말이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이 그와 함께할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가슴 어딘가가 텅 빈 듯 허전해졌다.


그녀는 스스로의 변화를 절감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찾아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준은 처음부터 다른 존재였다


그를 향한 이 갈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새로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 이 설레는 마음이 낯설어서 나 자신의 경박함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그의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 간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가벼운 접촉 사고라 여기고 싶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고요하고 정돈된 삶의 가치를 지켜내리라, 이번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잘 지나가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야.


바람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그녀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처럼 떠올랐다.

 

멀리 보리암에서 울려 퍼진 웅장한 타종 소리가 아득히 번져왔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하며 포크로 달걀물을 젓기 시작했다. 햄을 썰어 넣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아침부터 기름진 냄새는 내키지 않았다. 좀 더 부드럽고 간소하게 먹는 게 위장에도 편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옮기려는데, 한 가지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낚시터에서 보여 줄 게 있다고 했지그게 뭘까?’


그 남자는 순간의 기분에 휩쓸려, 혹은 궁색한 변명 삼아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하필 낚시터여야만 하는 거지. 정작 중요한 것은 보여 줄 무엇이 아니라, 어쩌면 낚시터라는 장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생각은 자꾸만 얽혀 갈 뿐, 단 하나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에잇, 청소나 하자.


그녀는 마음에 남은 의구심을 털어내고 서둘러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릇을 모아 설거지를 마친 뒤, 행주를 빨아 싱크대 주변과 테이블 위를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려던 찰나, 전화 단자에서 뽑아 놓은 전화선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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