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잠시 후, 그녀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태일은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서윤은 방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괜찮아요. 오늘은 조금 걷고 싶어요.


이 순간만큼은 그 남자의 승용차에 오르는 일이, 어느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의 차 안에 단둘이 있게 되는 것, 외부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벌어질 상황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혔다. 밀폐된 침묵 속, 끈적거리는 원색적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 이제는 그의 일방적인 요구를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속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둬.’


그때, 갤러리 안에서 경숙 씨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서윤을 향한 본능적인 호기심, 남의 비밀을 들춰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그녀의 눈빛에 어른거렸다. 직원들의 연애에 남다른 촉을 세우는 그녀에게 이 광경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구경거리였다. 무엇보다 ‘신우건설’ 일가는 리온 갤러리에서 특별 관리하는 주요 고객군이었다.


서윤이 쇼나 조각을 배달한 일을 계기로 그 집안의 후계자와 약혼하게 된 일화는 인사동 거리 안팎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며, 일종의 우화처럼 소비되었다. 리온 직원들 사이에서도 놀라움과 수군거림을 동시에 자아낸 큰 사건이었다. ‘신우건설’ 황태자가 갤러리 앞에 불쑥 나타난 지금, 경숙 씨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서윤은 유리창 너머 껄끄러운 시선을 의식하며, 이 불쾌한 상황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태일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섰다.


-오늘은 제가 저녁을 대접할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데라도 있는 거야?

-인사동에도 괜찮은 식당 많아요. 차는 여기 두세요. 관리인 아저씨께 미리 말씀드렸거든요.


어차피 갤러리 문이 닫히면 주차장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태일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녀가 먼저 걷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랐다.


인사동 4길에 자리한 ‘다래원’은 120년 된 한옥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다. 대문간 근처에는 크고 작은 장독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고, 뜰 안으로 들어서면 기와지붕을 올린 안채와 사랑채의 모습이 조선시대 대갓집 같은 옛스러운 정취를 자아낸다. 대들보가 드러난 식당 내부는 전통 가옥의 멋을 고스란히 품은 채, 실용과 절제가 어우러져 은은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다.


두 사람은 대청과 마당 사이에 놓인 격자문 옆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창살 유리문 밖으로는 부드러운 조명을 머금은 정원이 정갈하게 펼쳐졌고, 키 낮은 정원수들과 계절 꽃들이 밤의 공기 속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중년의 남자 종업원이 정중하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스테이크와 생선 요리를 중심으로 한 소박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성. 수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일 수 있어 입맛이 까다로운 태일도 무난히 만족할 만했다.


실내에는 진공관 턴테이블에서 울려 나오는 묵직한 음색의 바흐 무반주 첼로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태일은 묘하게 경색된 표정으로 메뉴판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식당 안에는 빈 테이블이 거의 없었다. 손님들은 느긋하게 환담을 나누며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태일은 괜히 다른 테이블들을 힐끔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점점 굳어가는 그의 얼굴은 주변 공기마저 서늘하게 만들었고, 서윤은 그 차가운 시선에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꼭 이런 데까지 와야 했나?

-왜요, 여기가 어때서요?

-음악도 시끄럽고, 뭐랄까… 좀 구려.

-토속적인 분위기, 안 좋아요? 난 좋은데.

-뭐, 크게 나쁘진 않아. 약간 색다르달까.

-태일 씨, 제가 대접하려는 자리잖아요. 기분 좋게 드세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한쪽 입술을 씩 올렸다.


-난 이미 더 괜찮은 데 예약해 놨어.


서윤은 고요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태일을 마주 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 단순한 불만이나 반감이 아닌,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이 수면 위로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


-괜찮은 데라면 어디요? 호텔 꼭대기 회원제 식당 같은 데?

-오늘 왜 이래. 꽤 날카롭네.

-제가요? 글쎄요. 우리 와인 한 잔 할까요?


서윤은 목소리를 낮추며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와인? 차 가져온 거 잊었어?

-인사동 올 땐 차를 두고 오세요. 그래야 이 근처 맛집도 둘러보죠.

-하. 인사동 낭만이라니! 뭐, 결혼 전엔 이런 추억 하나쯤 쌓는 것도 나쁘진 않지.


‘결혼.’ 그 두 음절이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어느새 커다란 관념의 굴레가 되어 그녀를 죄여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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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인사동 거리는 데이트하는 사람들과 회식을 나온 직장인들의 발길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온종일 내리던 비는 서서히 멎었지만, 축축하게 젖은 기운은 아직 공기 중에 남아 있었다. 


서윤이 불빛이 환히 새어 나오는 리온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1층 접수대에 앉아 있던 경숙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왜 돌아오셨어요?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

-관장님 계시지?

-아뇨. 조금 전 장훈 작가님이랑 식사하러 나가셨어요. 최 실장님도 같이요. 오늘은 두 분 다 안 돌아오실 거예요.


장훈은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가로, 뉴욕 지하철 역사 곳곳에 손바닥만 한 타일 그림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전시하며 이름을 알렸다. 팝아트 풍의 이미지와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뒤섞인 그의 작업은, 삭막하고 지저분한 뉴욕 거리에 에스닉하면서도 모던한 아우라를 불어넣었다.


그의 이름이 뉴욕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리온 갤러리는 장훈을 눈여겨보며 꾸준히 접촉해왔다. 당시 한국 출신 미술가가 국제적 인지도를 얻기 쉽지 않았기에, 최 관장은 장훈과 전속 계약을 맺어 국내 전시와 작품 판매의 독점권을 확보하기 위해 물밑 작업 중이었다. 


내년 하반기 전시를 앞두고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야 할 그가, 귀국 시기를 무려 일 년이나 앞당겨 서울에 나타난 것이 의아했다.


-장훈 작가 본가가 어디더라?

-제주도라고 들었어요. 근데 왜요?

-갑자기 한국엔 무슨 일로 왔나 싶어서. 잠깐 들른 걸까?

-글쎄요. 전시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아니면 새 프로젝트라도 있는 건지…


서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2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갤러리 운영의 중추라 할 수 있는 2층 사무실에는 남자 직원 한 명과 노영미 연구원이 나란히 앉아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노영미가 손끝으로 안경테를 살짝 들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 그새 우리 못 잊어서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

-아냐, 잠깐 들렀어. 근데 아직 퇴근 안 했어?

-자료 파일 하나가 사라졌어요. 일일이 확인 중이에요.

-어쩌다 그런 일이?

-모르겠어요. 그런데 명명희 작가님 전시 기획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 잘 몰라. 김순자 씨도 딱히 별말씀이 없으셨어.

-일부러 피하는 걸까요?

-글쎄.

-일본으로 날아가서 직접 명 선생님을 뵙고 오세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잖아요.

-천 냥 빚은 고사하고, 비행기표 값은? 여행 경비는?

-아하! 결국 고놈의 화폐가 문제군요.

-그만 농담하고, 얼른 퇴근해.

-넵. 이것만 끝내고요.


올해 초봄 입사했을 무렵만 해도 얼굴 가득 뽀송한 솜털을 지닌 채 세상 물정 하나 모르던 그녀가, 이제는 능숙하게 제 몫을 해내며 여유와 유머까지 갖춘 동료로 자라 있었다.


사무실은 평소보다 어둑했다. 나무늘보가 지나갈 듯한 지루한 정적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일정한 박자로 공간을 채웠다.


후배들만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뜨려니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서윤은 함께 퇴근할 요량으로 서랍 깊숙이 넣어둔 명명희 선생의 전시 자료철을 꺼냈다. 


페이지마다 정리된 기록을 훑으며 간단한 메모를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책상 위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강태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이 배어 있고, 어딘가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그는 사흘 전 외주 사업 건으로 지방 출장을 떠났는데, 예상보다 일을 빨리 마친 모양이었다.


-근처 왔다가 혹시나 해서 와 봤어. 얼른 나와. 저녁은 먹어야지.


순간, 서윤의 얼굴 위로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횡계에서 돌아온 이후로 태일 앞에서는 미소조차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했다.


서윤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밖을 내려다보았다. 태일의 BMW가 건물 앞 주차장에 비상등을 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보자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요즘 들어 그는 유독 그녀에게 집착하는 기색을 보였다. 예고 없이 인사동으로 찾아오거나, 귀가 시간에 맞춰 확인 전화를 거는 일이 잦아졌다.


‘뭐야, 오늘은 왜 또 나타난 거야?’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순간, 마법의 지니처럼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남자가 없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전화를 받은 이상, 건물 앞에 버티고 있는 그를 피해 빠져나갈 방법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 아까 그냥 퇴근할걸!’


서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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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명명희 선생은 누구보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귀국한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특히 전쟁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며 독자적인 인물화 세계를 확립했고, 수많은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를 거치며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명명희 인물화展’을 비롯해 국제미술초대전 대상, 한국예술대상, 금관문화훈장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거쳐온 발자취는 곧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명명희 선생의 명성이 높아갈수록 작품은 예술적 가치뿐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기 시작했고, 그 위상을 노린 무단 복제와 위작 유통이 암암리에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혹시 선생님 최근작들을 볼 수 있을까요?

-아뇨. 작업실은 물론이고, 작품 공개도 어머니 허락을 받아야 가능해요. 괜한 수고를 드린 것 같네요. 계속 전화로만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서, 직접 뵙고 설명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어요.

-별말씀을요. 제가 먼저 방문하겠다고 부탁드린 거잖아요. 여기까지 오게 되어 오히려 기쁜걸요.

-개인전이든 회고전이든 언젠가 다시 준비하게 될 거예요. 

어머니는 리온 갤러리를 좋아하세요. 상업성도 덜하고, 전시 수준이 품격 있다고요.

-고맙습니다. 그래도 뭔가 확실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명 선생님께서 김순자 씨를 많이 의지하시니까요.


-최희숙 관장님이 확실한 답을 얻어오라 하신 건가요?


김순자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선생님 작품 활동이 궁금해서요.

-그렇다면 잠깐, 저를 따라오시겠어요?

-네?

-제 사무실에 어머님의 미공개 작품 몇 점이 있어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그거라도 보여드리는 게 도리겠죠.

-아, 감사합니다.


서윤은 그녀를 따라 1층 한쪽에 마련된 사무실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세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두 점은 9년 전 동유럽 스케치 여행에서 그린 풍경과 인물화였고, 정면에 걸린 40호 유화 한 점은 명명희 선생의 기존 화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반추상 계열의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일흔을 넘긴 화가의 붓끝은 여전히 힘찼고, 화면에는 노련함과 생생한 상상력이 함께 살아 있었다. 그 그림은 단순한 색채나 형태의 조합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이야기와 묵직한 사유가 화면 속에 함께 자리했다.


붓질 하나하나에 담긴 감정의 흔적은 보는 이에게 먼 시간의 결을 더듬게 했다. 무거운 색조와 경쾌한 터치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섬세한 색의 중첩과 질감은 작가가 화면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축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색채 농도의 부드러운 변화와 곳곳에 드러나는 강렬한 대비는 순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 안에는 자연의 숨결, 인간의 고독, 그리고 생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서사가 녹아 있었다. 노화가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작품 세계와 그 안에 겹겹이 쌓아 올린 시간을 떠올리자, 문득 서윤은 자신의 삶이 한없이 가볍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이면 그 순간, 횡계 숲길에서 헤어진 도준이 떠오른 걸까. 그것은 아픈 진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그즈음의 서윤은 우울한 얼굴로 단조로운 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끔 태일과 저녁 시간을 함께했지만, 예전처럼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마음속에 또 다른 존재를 품게 된다는 건, 하나의 세계가 둘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시간과 행동, 언어 습관까지, 도준을 만난 그 순간을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 듯했다. 가슴을 저미던 고통은 서서히 희미해졌지만, 일상의 흐름은 무늬 없는 벽지처럼 밋밋해져, 어떤 감정도 쉽게 머물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노화가가 따스한 손길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명명희 작가의 그림 한 점이 봄바람처럼 스며들어 그녀의 마음을 감싸안았다. 미묘하게 흔들리던 숨결이 고요 속에 녹아드는 듯했다. 진정한 예술이란, 이렇게 살아 있는 온기로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이리라. 서윤은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어때요?

-정말… 오래 바라보게 되는 그림이에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볼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 말 들으니 기쁘네요. 제목은 ‘사월의 정원’이에요. 임시로 붙였지만, 잘 어울리는 것 같죠?

-그렇네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서윤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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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명명희 선생은 여전히 건강상의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최희숙 관장은 전시 기획이 예상 밖으로 난항을 겪자, 평소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리온 갤러리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명명희 선생처럼 높은 인지도와 경쟁력을 겸비한 작가의 전시가 절실했다. 그나마 서윤이 김순자와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에, 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듭 당부했다.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라는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최희숙 관장님은 잘 계시죠?

-네, 여전하세요. 매일 갤러리에 출근하셔서 모든 일을 직접 챙기시니까요.

-그 연세에도 꾸준히 활동하시고, 그런 열정으로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견인해 오셨잖아요. 참 존경할 만한 어른이세요.

-내년 초에는 꼭 명명희 선생님의 초대전을 열고 싶어 하세요. 우리 갤러리만큼 선생님 작품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면서 강한 의지를 보이셔요.

-글쎄요. 우선은 저희 어머님 뜻이 먼저라서요.


김순자는 흰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서윤에게 먼저 건넸다.


-다즐링 향이 참 좋네요. 오늘 같은 날엔 특히 더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다즐링에서 나는 홍차라면서요. 어머님이 네팔 여행 중에 사 오신 차가 있어서 한동안 이것만 마신 기억이 있어요.

-아, 선생님도 네팔에 다녀오신 적이 있군요.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서윤은 따끈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비에 젖은 마음결까지 천천히 데워 주었다. 그 향기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지난봄 횡계의 목요일 오후를 소환했다.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숨어 있던 복병처럼, 내면 깊숙이 눌려 있던 감정의 파편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촉촉이 젖은 검은 눈동자. 초원의 끝에서 한 걸음씩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다즐링의 섬세한 향기를 음미하는 동안, 그녀 앞에는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현실 너머에서 스며든 환영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님은 ‘여인의 초상’ 위작 논란 이후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 일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어머니 작품이라며 전시된 그림이 사실은 오래전에 제자가 그린 습작을 본떠 만든 모작이었어요. 그림을 가르치면서 어머니가 직접 몇 군데 손을 봐주셨던 그림이죠. 예전 연희동 작업실에 있던 그걸 누군가 몰래 가져다가, 마치 어머니의 완성작인 것처럼 다시 그려 은밀히 거래한 거예요. 그림을 산 사람이 있으면, 판 사람도 있는 법이죠. 마지막 소장자는 위작 판정으로 그림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았겠죠. 결국 어머니가 늙어서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본다는 누명을 씌운 거예요. 자신의 예술적 진실을 의심받는 화가라니, 그보다 더 잔혹한 상처가 있을까요. 그때부터 어머님은 작품 공개를 멈추셨죠. 벌써 6년 세월이 흘렀네요.


김순자의 목소리가 쓸쓸한 파장이 되어 번져갔다. 그 말에 배어든 아픔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리온에서 전시를 열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려들 거예요. 명명희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덜 풀리신 거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김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서윤은 다시 찻잔을 들어 그리움의 향기를 음미하며,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뜨거운 불씨 하나를 품고 산다는 건, 그만큼의 번뇌와 동거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고통은 영영 아물지 않는 옹이가 되어 의식의 수면 아래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또 위작이 발견된 건 아니죠?


서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어느 집 벽 한쪽에, 어머니 그림을 흉내 낸 또 다른 모작이 걸려 있을지도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김순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은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번민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예술이 작품 자체보다 ‘값’으로만 환산되는 오늘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유감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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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6월의 어느 날, 여름 초입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서윤은 한낮의 빗줄기를 헤치며 북한산 기슭에 들어섰다. 차도를 벗어난 숲길 안쪽에는 초록으로 짙게 물든 풍경이 소음을 씻어낸 일상의 여백처럼 펼쳐져 있었다. 엷은 개나리색 트렌치코트에 레인 부츠 차림의 그녀는 큼지막한 암청색 장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저택 앞 철문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자, 작은 아트 갤러리를 닮은 3층 건물이 나타났다. 절제된 선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산속 깊숙이 마련된 누군가의 은밀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그곳이 명명희 선생이 오랫동안 은거해 온 거처이자 작업실이었다.


서윤이 건물 앞 층계를 올라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불쑥 열리며 선생의 양녀 김순자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검은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동안 명 선생 안부를 묻는 전화를 주고받고, 인사동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직접 집까지 찾아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네요.

-오히려 좋았는걸요. 모처럼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즐겼거든요.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요?

-일러주신 대로 걷다 보니 금방 여기네요.


김순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오르는 길목, 표지판의 위치와 주변 건물의 형태, 오래전에 폐쇄된 방범 초소와 버섯 모양의 길쭉한 바위를 지나 서른여섯 걸음쯤 가면, 왼쪽 경사진 찻길 위로 검은 철문이 나타난다는 설명까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미리 그려둔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 서윤은 어느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자,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서윤은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탁탁 털어낸 뒤, 문 옆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눅눅한 한기가 물러나며, 따스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레인 부츠를 얌전히 벗어 두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실내는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었다. 갓 이사를 마친 집처럼 휑했고, 침묵의 결을 따라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홀 중앙에는 소파와 커피 테이블만이 무대 위 소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고, 집기를 대신할 만한 소품도 거의 없었다. 


화가의 자취를 연상시키는 물감이나 화구, 이젤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속세를 등진 고승의 선방 같기도 했고, 현대 무용가의 개인 연습실 같기도 했다.


-명 선생님은 어디서 작업하시나요?

-작업실은 2층에 있어요. 여기는 손님을 맞거나 잠시 쉬는 응접실이고요.

-굉장히 깨끗하고 넓어요. 목소리가 울릴 정도네요.

-어머니는 주변이 어질러진 걸 아주 싫어하세요.


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살다 보면 빈 벽과 빈 자리들이 더 절실할 때가 있잖아요. 여기는 그런 비움을 위한 공간이죠.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네. 이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여기 오는 길에 준비한 다즐링 티와 수제 마카롱 세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어머, 고마워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김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받았다.


-다즐링이군요.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제가 차를 준비해 올게요.


곧 복도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는 검은 옻칠이 곱게 입혀진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티팟과 다도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차를 우려내는 동안, 서윤은 거실 통유리창 너머 숲 비탈을 바라보았다. 암녹색으로 짙어진 녹음 위로, 희뿌연 빗줄기가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과 격리된 듯, 시간조차 다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한 겹의 꿈속 장면 같기도, 오래된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난 순간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고요가 실내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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