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6월의 어느 날, 여름 초입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오전 근무를 마친 서윤은 한낮의 빗줄기를 헤치며 북한산 기슭에 들어섰다. 차도를 벗어난 숲길 안쪽에는 초록으로 짙게 물든 풍경이 소음을 씻어낸 일상의 여백처럼 펼쳐져 있었다. 엷은 개나리색 트렌치코트에 레인 부츠 차림의 그녀는 큼지막한 암청색 장우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저택 앞 철문을 지나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자, 작은 아트 갤러리를 닮은 3층 건물이 나타났다. 절제된 선과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산속 깊숙이 마련된 누군가의 은밀한 아지트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그곳이 명명희 선생이 오랫동안 은거해 온 거처이자 작업실이었다.


서윤이 건물 앞 층계를 올라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불쑥 열리며 선생의 양녀 김순자가 나타났다.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마흔을 훌쩍 넘긴 그녀는 옆트임이 있는 베이지색 치마에 검은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동안 명 선생 안부를 묻는 전화를 주고받고, 인사동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직접 집까지 찾아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어서 오세요. 하필이면 오늘 비가 오네요.

-오히려 좋았는걸요. 모처럼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같은 풍경을 즐겼거든요.

-오시는 길은 불편하지 않았나요?

-일러주신 대로 걷다 보니 금방 여기네요.


김순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신경 쓰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북한산 방향으로 오르는 길목, 표지판의 위치와 주변 건물의 형태, 오래전에 폐쇄된 방범 초소와 버섯 모양의 길쭉한 바위를 지나 서른여섯 걸음쯤 가면, 왼쪽 경사진 찻길 위로 검은 철문이 나타난다는 설명까지,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마치 미리 그려둔 지도 위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걷는 듯, 서윤은 어느새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의 문턱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 들어오세요.

-감사합니다.


서윤은 우산에 맺힌 빗방울을 탁탁 털어낸 뒤, 문 옆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이 닫히자 눅눅한 한기가 물러나며, 따스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레인 부츠를 얌전히 벗어 두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실내는 이상하리만치 비어 있었다갓 이사를 마친 집처럼 휑했고, 침묵의 결을 따라 서늘한 정적이 흘렀다. 홀 중앙에는 소파와 커피 테이블만이 무대 위 소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에는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았고, 집기를 대신할 만한 소품도 거의 없었다


화가의 자취를 연상시키는 물감이나 화구, 이젤 같은 것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은 속세를 등진 고승의 선방 같기도 했고, 현대 무용가의 개인 연습실 같기도 했다.


-명 선생님은 어디서 작업하시나요?

-작업실은 2층에 있어요. 여기는 손님을 맞거나 잠시 쉬는 응접실이고요.

-굉장히 깨끗하고 넓어요. 목소리가 울릴 정도네요.

-어머니는 주변이 어질러진 걸 아주 싫어하세요.


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살다 보면 빈 벽과 빈 자리들이 더 절실할 때가 있잖아요. 여기는 그런 비움을 위한 공간이죠. ,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 이건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쇼핑백을 내밀었다. 여기 오는 길에 준비한 다즐링 티와 수제 마카롱 세트가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어머, 고마워요.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김순자는 미소를 지으며 쇼핑백을 받았다.


-다즐링이군요. 제가 좋아하는 거예요. 잠깐만요. 제가 차를 준비해 올게요.


곧 복도 끝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는 검은 옻칠이 곱게 입혀진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 위에는 티팟과 다도 세트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차를 우려내는 동안, 서윤은 거실 통유리창 너머 숲 비탈을 바라보았다. 암녹색으로 짙어진 녹음 위로, 희뿌연 빗줄기가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과 격리된 듯, 시간조차 다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세계였다. 한 겹의 꿈속 장면 같기도, 오래된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난 순간 같기도 한, 비현실적인 고요가 실내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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