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명명희 선생은 여전히 건강상의 문제로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최희숙 관장은 전시 기획이 예상 밖으로 난항을 겪자, 평소답지 않게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리온 갤러리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명명희 선생처럼 높은 인지도와 경쟁력을 겸비한 작가의 전시가 절실했다. 그나마 서윤이 김순자와 약속을 잡았다는 소식에, 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듭 당부했다.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라는 말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다.


-최희숙 관장님은 잘 계시죠?

-네, 여전하세요. 매일 갤러리에 출근하셔서 모든 일을 직접 챙기시니까요.

-그 연세에도 꾸준히 활동하시고, 그런 열정으로 오랫동안 한국 화단을 견인해 오셨잖아요. 참 존경할 만한 어른이세요.

-내년 초에는 꼭 명명희 선생님의 초대전을 열고 싶어 하세요. 우리 갤러리만큼 선생님 작품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면서 강한 의지를 보이셔요.

-글쎄요. 우선은 저희 어머님 뜻이 먼저라서요.


김순자는 흰 도자기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서윤에게 먼저 건넸다.


-다즐링 향이 참 좋네요. 오늘 같은 날엔 특히 더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다즐링에서 나는 홍차라면서요. 어머님이 네팔 여행 중에 사 오신 차가 있어서 한동안 이것만 마신 기억이 있어요.

-아, 선생님도 네팔에 다녀오신 적이 있군요. 저도 언젠가 꼭 가보고 싶어요.


서윤은 따끈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은은한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비에 젖은 마음결까지 천천히 데워 주었다. 그 향기는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처럼, 지난봄 횡계의 목요일 오후를 소환했다.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숨어 있던 복병처럼, 내면 깊숙이 눌려 있던 감정의 파편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촉촉이 젖은 검은 눈동자. 초원의 끝에서 한 걸음씩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하나둘 떠올랐다. 다즐링의 섬세한 향기를 음미하는 동안, 그녀 앞에는 어느새 그가 서 있었다. 현실 너머에서 스며든 환영처럼 그윽한 눈빛으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님은 ‘여인의 초상’ 위작 논란 이후 큰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 일로 건강도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어머니 작품이라며 전시된 그림이 사실은 오래전에 제자가 그린 습작을 본떠 만든 모작이었어요. 그림을 가르치면서 어머니가 직접 몇 군데 손을 봐주셨던 그림이죠. 예전 연희동 작업실에 있던 그걸 누군가 몰래 가져다가, 마치 어머니의 완성작인 것처럼 다시 그려 은밀히 거래한 거예요. 그림을 산 사람이 있으면, 판 사람도 있는 법이죠. 마지막 소장자는 위작 판정으로 그림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원치 않았겠죠. 결국 어머니가 늙어서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본다는 누명을 씌운 거예요. 자신의 예술적 진실을 의심받는 화가라니, 그보다 더 잔혹한 상처가 있을까요. 그때부터 어머님은 작품 공개를 멈추셨죠. 벌써 6년 세월이 흘렀네요.


김순자의 목소리가 쓸쓸한 파장이 되어 번져갔다. 그 말에 배어든 아픔과 상실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리온에서 전시를 열게 되면,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려들 거예요. 명명희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팬들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머님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덜 풀리신 거겠죠. 아마, 그럴 거예요.


김순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두 개의 잔을 채웠다. 서윤은 다시 찻잔을 들어 그리움의 향기를 음미하며, 고요 속에 어른거리는 희미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뜨거운 불씨 하나를 품고 산다는 건, 그만큼의 번뇌와 동거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 고통은 영영 아물지 않는 옹이가 되어 의식의 수면 아래 각인되는 것은 아닐까.


-혹시, 또 위작이 발견된 건 아니죠?


서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불안이 묻어 있었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어느 집 벽 한쪽에, 어머니 그림을 흉내 낸 또 다른 모작이 걸려 있을지도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죠.


김순자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꺼지지 않은 분노와 어쩔 수 없는 번민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예술이 작품 자체보다 ‘값’으로만 환산되는 오늘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유감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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