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화 마을의초록집>

Watercolor on paper, 2013

 

지난 주말에는 사생 스케치를 하러 집 근처 태리 마을에 다녀왔다. 오전에는 농수로 앞 마을길을 그렸는데 오후가 되자 햇빛이 정면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자리를 옮겨 앉아야 했다. 동네 구경을 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그늘진 나무 아래에 다시 화구를 펼쳐 놓았다. 바로 앞에 밭이 있고 좌측에는 건축 자재 더미가 쌓여 있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심기일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걸. 커다란 트럭이 먼지를 피우며 다가오더니 하필이면 초록집 정면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더니 운전사가 내렸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온 것일까, 점심을 먹으러 온 것일까. 이미 스케치를 하고 밑칠까지 끝낸 터라 마음이 여간 야속한 것이 아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에게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차를 좀 비켜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여름처럼 날씨는 푹푹 찌고 풀숲 같은 곳이라 야생 진드기 걱정도 들었다. 또 자리를 옮겨야 하나, 그냥 돌아갈까. 혼자 구시렁대고 있는데 다행히 트럭 운전사가 집에서 다시 나왔다. 옷차림이 말끔한 것을 보니 어딘가 외출을 하는 모양이었다. 운전사는 사뿐하게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곧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다시 찾아온 한적한 풍경이었다. 온 누리에 깃든 평화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늘을 향해 윙크 한 번 날리고 고약한 진드기에 대한 걱정도 잠시 미뤄두었다. 바닷길을 건너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걸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그때가 제주도에서 첫 번째 환자가 확진 판결을 받은 직후였다.

 

그림〈태리, 농수로 앞 마을길〉

Watercolor on paper, 2013


‘농수로 앞 마을길’ 그림은 집에 돌아와 다시 손을 보았다. 연두색 그림자가 깔린 농수로의 젖빛 물결을 제대로 표현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사흘에 걸쳐 엎치락뒤치락 작업을 한 덕분인지 ‘초록집’에 비해 한층 가라앉은 느낌이다.


작업 과정에서 마무리에 지나치게 공을 들이면 그만큼 생동감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일기나 편지를 쓸 때, 혹은 카톡 메시지를 쓸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하곤 한다. 수정할수록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문장의 공식화 과정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순간이 생긴다. 모든 일이 그렇듯 그것이 늘 능사는 아니다.


풀어줄 때는 시원하게 풀어주고, 죄어야 할 때는 단단히 죄어야 한다. 그런 완급 조절이 필요한 봄날 오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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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3-06-1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위가 한창 입니다.
창작활동을 위한 완급조절이 더욱 필요하지요.

김미진 2013-06-1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덥다는 데 걱정입니다. 더위 조심하시기를..

메리베리 2013-06-1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암 정겨운 거리의 수채화네요^^ 마음마저 맑아지는.... 감상으로 ...잘 보고갑니다

김미진 2013-06-16 23:44   좋아요 0 | URL
격려의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그림 <장암동 마을에서>

Watercolor on paper, 61×50cm, 2013


장암동 마을에서 그린 그림이다. 마을 어귀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있었다. 낮은 담장과 낡은 지붕, 그리고 집 옆으로 길게 이어진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기척은 없었지만 집 주변에는 오랫동안 쌓여 온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낮의 햇빛에 잠겨 있는 마을길이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바람이 잠시 머물다 가는 듯했고, 풀숲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 소리가 이어졌다. 특별한 사건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조용한 풍경이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


이런 마을에서는 시간이 조금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고, 집들은 그 곁에서 묵묵히 계절을 받아들인다. 벽에 남은 빛과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 그리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하루의 시간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잠시 그 마을의 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잠시 멈춰 서서 햇빛을 바라보는 그런 오후.


세월이 흘러도 이런 마을 풍경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된 집 한 채와 그 곁의 나무,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오후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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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화석정, 늪지>

watercolor on paper 50.3×36.3cm, 2013


늪지대의 훈훈한 5월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화면의 중심에는 나무 한 그루가 묵묵히 서 있다.

물기를 머금은 들판 위로 연둣빛 기운이 번지며 늦봄의 공기를 전한다.


전에 한 번 그렸던 마을 풍경을 다시 그렸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오솔길과 그 안쪽에 자리한 봄 풍경이 한적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봄날의 따뜻한 기운이 오래 머무는 하루이기를 바란다.


그림 <화석정 마을2> 

Watercolor on paper, 61×50c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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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파주 화석정, 5월의 들녘에서〉
Watercolor on paper, 48 × 33.5 cm, 2013


황금 같은 연휴가 지나갔다. 주말에는 운동도 하고 강아지들과 산책도 했다. 틈틈이 작업을 하기도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지인도 찾아뵙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노을 깔린 저녁 풍경은 어쩐지 막막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내 마음이 그랬을 것이다. 이것저것 어수선하면서도 안타깝고 뿌연 느낌이었다.


어제는 서재 안 책상 배치도 새로 했다. 전에 쓰던 책상이 어깨에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아래층에 있는 테이블 가운데 높이를 가장 낮출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옮겼다. 작고 협소하지만 그래도 가장 편한 느낌이다. 아마 컴퓨터를 오래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테이블 높이가 어떤 것인지 늘 궁금할 것이다.


의자도 늘 나를 시험에 빠뜨리는 물건 중 하나다. 내 몸에 가장 편한 의자 높이는 어느 정도일까. 의자마다 높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나는 줄자를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바퀴가 달린 의자나 등받이가 움직이는 의자는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에 부담을 준다. 가구 디자이너들이 제품을 만들 때 자신이 만든 의자에 최소한 여섯 시간 정도는 앉아본 뒤 생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의자에 대한 강박, 고민, 갈등, 호기심은 끝이 없다. 그 과정에서 꽤 많은 돈을 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컴퓨터를 사용하며 앉아본 의자 가운데 가장 편했던 것은 단순한 구조의 의자였다. 움직임 없이 90도 각도를 유지하는, 약간의 쿠션만 있는 딱딱한 의자였다. 어딘가 학창 시절 학교 의자를 떠올리게 하는 의자다. 결국 이런 원시적인 의자가 내 몸에는 가장 잘 맞는 셈이다.


지난주에는 파주 화석정에 다녀왔다. 서울 근교에 이런 마을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사실 그림을 그리기에 괜찮다 싶은 곳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만한 장소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화석정은 이대로 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화구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정말로 행복했다. 물을 대어 놓은 논이 호수처럼 펼쳐져 있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안쪽에 자리한 마을 풍경은 아늑하면서도 정겨웠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은 그 들판에 오롯이 혼자 서 있는 어느 농가의 모습이다. 사생지에서는 스케치를 하고 밑바탕 톤을 까는 정도에서 마친 뒤 집에 돌아와 다시 손을 보았다. 근경의 흙빛과 초록, 그리고 원경의 푸른 풍경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그 중간에 그 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이 벽돌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나의 집은 하나의 세계를 뜻한다. 우리 또한 그 어딘가에 살고 있다. 햇빛 찬란한 5월이다. 모두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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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동막골 이층집-2> 

Watercolor on paper, 2013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수채화 재료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진 듯하다. 최근 지인의 권유로 구입한 팔레트는 수채 물감이 며칠이 지나도 쉽게 굳지 않는, 정말로 ‘괴이한’ 물건이다. 화구를 챙겨 밖에 나가 그림을 그리려면 나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바람에 이젤은 퍽퍽 나자빠지고, 날씨는 갑자기 더웠다 추웠다 하며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돌풍에 휘말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그림 도구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때로는 요상한 포즈까지 취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수분 증발은 어찌나 빠른지 수채화 용지는 물론 팔레트 위의 물감까지 금세 말라버린다. 물을 잔뜩 뿌려 놓았는데도 삽시간에 말라 더 이상 붓을 댈 수 없을 지경이 된다. 그런데 세상에나, 이렇게 물감이 잘 굳지 않는 팔레트가 존재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도대체 이런 물건은 누가 만들었을까.


어찌 보면 조금 난감한 생김새다. 직사각형의 넓적한 플라스틱판에 물감을 짜는 칸이 사방으로 마흔네 개쯤 있기는 하지만 붓의 물 조절을 할 홈조차 없다. 이런 모양의 플라스틱 팔레트를 사용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동안 주변에서 이런 팔레트를 보면 미술 초보자들이 쓰는 물건인가 보다 하고 단순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게 숨겨진 병기였다.


살다 보면 새로운 병기가 인생의 새로운 햇살처럼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내 인생 어딘가에 숨어 있는 비밀 병기를 찾아라.’ 오늘 내가 낚아 올린 키워드는 바로 그것이다.

 

그림<동막골 이층집-3>

Oil on canvas, 65.2×53.0c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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