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그가 다가와 테이블 위의 펜을 집었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마땅한 메모지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초록색 스프링 노트를 펼쳐 여백을 내밀었다. 그는 약간 비스듬한 필체로 휴대폰 번호 열 자리를 또박또박 적었다.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저는 도준입니다.

... 저는 나서윤이에요.

서윤...


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렸다.

 

이름이 참 곱네요. 무슨 뜻인가요?

빛나다, 윤이 나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군요.

그의 눈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당신 이름은 햇살이 비치는 물결 같네요. 고요하면서도 반짝이는.

그의 표정에도 잔잔한 빛의 파장이 일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이름이었다. 용천 계곡, 젖은 몸으로 바위 위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녀.


서윤아!’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사람들의 발소리.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자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애수에 가까운 울림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공명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바라보던 영원처럼 짧은 침묵.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스물두 해 전, 계곡물에 빠진 소녀의 폐에 생명을 불어넣던 그날의 입맞춤이 처음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모든 세월을 지나 도달한 진정한 의미의 첫 키스였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순간 당황했지만, 몸을 돌리거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불안과 욕망이 뒤섞인 이마 위로 열이 올라왔고,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입맞춤은 달콤하면서도 아릿했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뿌연 열기가 차오르듯 번졌다. ,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떨림이 부끄러울 만큼 분명하게 온몸을 감쌌다. 몸은 환희에 젖어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불확실한 파동 속에 흔들렸다. 시곗바늘이 멈춘 듯,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내면을 스치는 한 줄기 속삭임이 들려왔다. 약혼자, 결혼, 가족의 기대와 책임. 빛바랜 그림자들이 다시 의식을 덮쳤다. 이 키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깊은 곳에서 번지는 불꽃의 정체는 무엇인지. 자유를 향한 갈망과 두려움이 엇갈리며 그녀의 마음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가슴 깊이 그녀를 품으려 했다. 숨결과 숨결이 맞닿은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쳐냈다. 이것이 반사적인 방어 동작이었는지,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실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그녀의 말들이 얼음송곳처럼 하나씩 도준의 가슴에 꽂혔다. 도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고통과 혼란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억지로라도 참아보려 애쓰는 마음 한편에 상실감과 번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미안해요.


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렸더라면, 오빠의 사진을 보고 부군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약혼 사실을 털어놓았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스스로를 배반한 불찰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해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에게 끌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러니 제가 미안합니다. 너무 제 감정에만 솔직했나 봅니다.


그 짧은 고백 사이로 공기마저 숨 막히게 떨려왔다. 심장은 불현듯 요동쳤고,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더니, 신중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낚시하러 가실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눈빛 어디에도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심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처럼 번져왔다.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오전에 낚시터에 잠시 다녀온 뒤 오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아마도 오늘의 해프닝을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와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쓸쓸함으로 그녀의 마음을 옥죄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듯한 안타까움이 가슴 한편에 자리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녀는 쉽게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견딜 수 없이 강렬한 무언가가 휘몰아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거나, 끝내 외면하고 돌아서거나. 결국 그 감정의 무게와 책임은 공평하게 각자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좋아요. 낚시터에 갈게요. 오후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야 해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고 말없이 현관문을 닫고 떠났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저녁 공기 속으로 희미해졌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어스름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석양을 등진 그의 랜드로버는 붉은 후미등을 밝힌 채 저무는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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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그것은 일종의 결핍이었다. 하나의 얼굴로 정형화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내면에 서로 다른 형태로 잠복해 있었다.


서윤은 안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정돈된 평온, 반듯한 윤곽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왔다. 기성품처럼 정제된 삶이었고, 오래된 희망만을 반복 재생하는 인공의 낙원에 가까웠다.


도준은 달랐다. 그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을 택했다. 원시의 대지와 더불어 충동과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흘러왔다. 방향 없는 나침반처럼, 본능에 기대어 이동해 온 존재였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규범 밖에 놓인 삶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체계와 리듬으로 그 결핍을 감당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설계된 틀 안에서 버텨왔고, 다른 이는 그 틀을 거부한 채 세상 끝을 향해 혼자 떠돌았다. 출발점은 달랐으나, 다름의 이면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닮음이 숨어 있었다. 양면 거울처럼 마주 선 두 얼굴이 비로소 서로를 인식한 순간이었다. 낯선 것에 대한 끌림은 익숙함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순간 듣기 좋은 멜로디처럼 되살아났다. 그 말에는 절제된 힘과 산을 향한 긴 호흡이 함께 배어 있었다.


칫솔도 반토막, 비누도 반토막, 그렇게 가져가는 정도예요. 고산을 등반하는 동안 눈을 녹여 물을 만들려면 연료가 많이 듭니다. 게다가 고도가 높을수록 비등점도 낮아지죠그래도 커피는 가끔 마셔요. 미지근한 물에 대충 타 마시기도 하는데, 그 밍밍한 맛이 어떨지는 짐작 가시겠죠.


서윤은 그의 목소리와 말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다. 장비와 눈과 연료와 비등점의 계산.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세월과 몸으로 축적해 온 경험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언어였다.


그렇군요.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배낭을 짊어진 자신이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나무들이 숨 쉬듯 흔들리고, 깊은 계곡 사이로 놓인 구름다리가 느릿하게 출렁였다. 그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인 긴장과 불안이 절로 씻겨 나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오래전부터 몸에 밴 자연의 리듬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 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남자였다.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새로운 인류처럼 느껴졌다. 그의 세계는 늘 긴장과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삶은 생과 사의 외줄타기 위에서 치밀한 질서로 구축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영혼은 어떤 색채를 띠고 있을까. 함께할수록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무슨 음식을 즐기는지, 사람을 판단할 때 무엇을 먼저 보는지, 소년 시절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외에도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태 결혼할 틈도 없었어요. 아니, 못한 거죠.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

그가 자신의 이성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비친 건 우연이라기보다 계산된 고백처럼 느껴졌다. 아직 미혼인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했지만, 굳이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서윤의 마음을 떠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커피잔을 비우고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긴 침묵을 냉담한 거절로, 철벽같은 방어로 받아들인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벽이 가로놓였다.


그만 가봐야겠군요. 제가 꽤 오래 방해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작별을 고했지만, 그 말끝에는 씁쓸함과 자조적인 기색이 엷게 섞여 있었다.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섭섭했지만, 이제는 그를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별말씀을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해야죠. 안녕히 계십시오.
–…조심히 가세요.

문 앞에 선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으려다 말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는 눈빛 속에 말로 다 옮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심장도 그 여운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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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지금껏 서윤은 여러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그녀 인생에서 처음 감행한 자발적인 탈선이었고, 그 여정을 담은 일기장은 나중에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고양이처럼이라는 책으로 엮어졌다. 제이가 운영하는 해오름 출판사에서 소규모로 출간된 그 여행기는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처음으로 작가라는 이름을 안겨주었다.


뉴욕에서 머문 1년 동안에는 그랜드캐니언, 나이아가라, 뉴올리언스, 키웨스트 같은 명소를 찾아다니며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돌았다. 그러나 그런 여행은 어디까지나 계획된 이동에 불과했고, 그녀의 삶은 여전히 도시 문명과 인공 낙원이 설계한 경로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흘러갔다. 그 바깥으로 발을 디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손문기 선생이 공작 도시라 불렀던 그 익명의 공간. 정돈된 질서와 번영 뒤에는 권태와 감각의 둔화가 숨어 있었다. 그 안에서 서윤은 가족과 직업, 그리고 집이라는 구도를 행복의 조건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 프레임은 나름의 안정을 보장했고, 모두가 무사했지만, 서윤이 기억하는 한 이곳을 자유 의지로 벗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그녀는 부모라는 울타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약혼자 강태일이 마련한 또 다른 가계의 테두리 안으로 옮겨질 참이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갈 때마다, 서윤의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아프리카 쇼나 조각상 전시를 계기로 데이트가 막 시작되던 무렵만 해도, 강태일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격식을 갖춘 태도와 교양 있는 말투로 자신을 성숙하고 단정한 사람처럼 꾸몄고, 서윤을 배려하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약혼식이 끝난 뒤부터 그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집안의 수준 차이와 경제적 격차가 크다는 이유로 강태일의 누이는 벌써부터 못된 시누이처럼 굴었고, 태일 역시 그녀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우린 이제 부부야. 한 몸이나 다름없잖아.


그 말은 설득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약혼까지 했는데.


그녀를 향해 함부로 뻗어오는 손길에는 참을 수 없는 추잡함이 묻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육체적 관계와 그 직후에 보여주는 그의 모욕적인 태도는 조금씩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다뤄지는 대상으로 밀려나 있다는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그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몸 안 어딘가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다.


약혼한 지 어느새 일 년하고도 여섯 달이 흘렀다. 그동안 그가 제공한 물질적 혜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늘 무언가를 대가로 치러야 하는, 거래에 가까운 냉정한 방식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딸에서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로 전이될 운명이었다. 그 모든 정체성은 선택이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었고, 그 마지막에 그녀 자신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금 보이지 않는 흐름에 떠밀리듯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작은 배처럼, 멈출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 끝 어딘가에 닿고 나면, 그저 주어진 일상에 길들여져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날개를 접은 채, 안락이라는 이름의 틀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잃어갈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해 기꺼이 많은 희생을 감내해 왔다. 하지만 결혼 이후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정지된 상태로 삶을 지속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강태일의 집안은 보수적이었고새며느리가 바깥일에 몰두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화랑의 큐레이터 일이나 장차 대학 강단에서의 미술사 강의,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벌써 숨이 막혀왔다.


이런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곳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얼핏 자랑처럼 비칠까 망설여졌고, 배부른 소리라는 비아냥이 돌아올까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내면의 결핍과 욕망을 감춘 채 입을 닫았고, 그 침묵은 자신을 더욱 고립시켰다.


어떤 날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려보면,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연고도 목적도 없는 낯선 도시의 아침 풍경을 떠올렸다. 울창한 숲속을 헤매다 마침내 거대한 폭포 앞에 다다르는 여정도 멋질 것 같았다. 깊은 협곡을 오르내리다 지쳐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잠시 모든 존재로부터 지워지는 순간. 그녀는 한 번쯤, 그런 세계에 가닿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결혼을 앞둔 이 시점에서 그런 방랑은 현실에서 밀려난 환상에 불과했다. 머릿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는 자유, 끝내 실행되지 못할 도피의 충동, 그것만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반항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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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여긴 전망이 좋군요. 그런데 저기저 나무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요.


도준이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별장 아래쪽 비탈에는 군데군데 수피가 벗겨지고 잔가지가 축 늘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대추나무예요. 가을이면 알 굵은 대추를 한 바구니씩 따곤 했는데이번에 와서 보니 저 모양이에요.
-병이 든 걸까요?
-그럴지도요.

저무는 햇살 아래, 오랜 세월을 떠받치다 지친 기둥처럼 고개를 숙인 대추나무가 애잔하게 느껴졌다. 큰할머니가 살았을 때부터 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나무가 이제 한 시절의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무도 외로움을 탈까요?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 쪽으로 옮겨졌다.

-외로움이요?
-그냥저 나무도 혼자 집 지키는 게 싫어서 저렇게 된 건가 싶어요. 나무도외로울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얼버무렸다.

-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낯선 게 아니었다. 늘 혼자 길을 걷고, 홀로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그의 삶에서 외로움은 견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몸에 익은 감각에 가까웠다. 그러나 서윤의 목소리에 실린 그 말은 조금 달랐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어딘가 사람의 것이었다. 설명되지 않은 채 오래 억눌려 있던 무엇인가가 불현듯 새어 나온 듯했다. 도준은 그 말의 의미를 쉽게 흘려들을 수 없었다.


-여긴 아버지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여기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최근엔 너무 바빠서 못 왔지만요.


도준이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머리가 복잡해요? 왜요?

말투는 무심한 듯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가 또다시 자신을 열어 보일지 모른다는 기대가 숨어 있었다.

-그냥, 가끔요. 일을 하다 보면 그렇죠.
-그럴 때 저는 강태공처럼 낚시를 합니다. 곧은 바늘을 물 위에 드리워놓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잡념이 사라져요. 낚시는 마음을 다스려주죠.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는 낚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배어 있었다.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낚싯줄을 드리운 채 무념무상에 잠긴 한 낚시꾼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그의 시선은 어디 먼 곳에 닿아 있는 듯 아득했고, 일상의 굴레로부터 한 발 비켜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낚시라는 단어 하나가 불러낸 물가의 풍경은 그녀에게 낭만이 아니라, 가늠하기 힘든 막연한 불안을 안겨주었다.


-혹시 낚시 좋아하세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왜요?

-물 공포증이 있어요. 왜 그런지, 물에 빠지는 악몽을 자주 꿨거든요.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둠과 그 순간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는 그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일을 간직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요즘도 그런 악몽을 꾸나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제 친구는 높은 계단에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꿔요. 저는 계속 물에 빠지는 꿈이죠. 참 이상한 일이에요.


그는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꿈에는, 어쩌면 감춰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죠. 때로는 무의식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일 수도 있고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를 띠었다.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 잠깐만요.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불을 끄고 두 개의 머그잔에 물을 부었다.

-저는 진한 커피를 좋아해요. 그 독특한 향 때문이죠.
-, 그렇군요.

그녀는 코끼리 문양이 그려진 그의 머그잔에 커피를 반 스푼 더 떠 넣었다.


-컵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머그잔을 건네려고 하자, 그가 컵 위쪽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었다. 그 동작은 마치 그녀의 손을 덥석 잡는 것처럼 느껴졌고, 손끝이 스친 순간 짧고 날 선 감각이 심장을 관통했다. 그녀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이게사람들이 말하는 그 낯뜨거운 욕망이라는 걸까.’

귓불이 화끈 달아오르자, 그녀는 시선을 피한 채 몸을 조금 옆으로 틀었다.


그는 커피를 후후 불면서도 연거푸 마셨다. 뜨거운 커피도 거뜬히 넘기는 모습에 그녀는 점점 더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가 손목에 찬 크고 두툼한 시계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무슨 시계예요?
-, 이거요? 아보셋 제품이에요. 고도계 시계라고도 하죠.

그가 손목시계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여러 숫자와 표시가 얽힌 화면은 꽤 복잡해 보였다. 높은 산에서 기압과 고도를 재기에 좋고, 18천 미터까지 측정이 가능하며 하루에 몇 번 스키 리프트를 탔는지도 알 수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 설명을 듣고도 서윤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실례지만, 뭐 하시는 분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저는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고요한 실내에 잔물결처럼 번져갔다.

-세계 곳곳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녔죠.

그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듯 미소를 띤 채, 극지 탐험과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고산 원정에 얽힌 이야기를 몇 마디 들려주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표정에는 엷은 향수와 뿌듯함이 묻어 있었다.


-제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닌 거리를 자전거로 달렸다면 십 년 이상 걸렸을 겁니다. 두 발로 걸었다면 평생 걸렸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 년뿐이었어요. 뜻밖의 기회였죠. 우연히 독일 자동차 회사와 인연이 닿아, 특수 제작된 차량과 비용을 지원받았어요. 여행하며 극한 환경에서 배터리 성능을 시험했고, 그 결과를 연구소에 전했지요.


-어머, 정말요? 놀라운 이야기예요.

그녀의 눈동자가 신기함과 경이로움으로 반짝였다. 극지의 빙원과 아프리카 오지, 그리고 미지의 땅을 떠돌던 그의 이야기는 그녀로 하여금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의 궤적과 그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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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별장 앞에 다다른 서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열쇠로 출입문을 연 뒤 문턱을 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벅찬 충족감이 가슴을 휘감았다. 두려움과 낯선 설렘이 뒤섞인, 강렬하고도 불가해한 감각이었다. 집 안으로 다시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를 들이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강한 호기심과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왜 이렇게 떨리지? 고맙다는 의미로 커피를 대접하는 건데.’


그래, 그냥 커피 한 잔일 뿐이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스스로를 다그치듯 생각했다.


도준은 자전거를 벽에 기대어 놓고 어제 붙인 패치 자리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타이어의 공기압도 충분했고, 찢어진 흔적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
-잘됐네요. 제가 커피 탈게요. 그런데지금 인스턴트커피밖에 없는데 어쩌죠?
-커피콩으로 만든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도준은 어제보다 한결 느긋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실내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단정했다.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장식장, 유리 진열대 위에 놓인 여행의 흔적들, 벽면에 걸린 설피와 색바랜 장미 한 송이. 사물들은 말없이 세월의 숨결을 품고 있었다. 소박하고 절제된 가구의 부드러운 선과 따스한 질감은 그곳에 살아온 사람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페치카 선반 위에는 액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준은 그중 하나에서 서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활짝 웃고 있었다. 서로의 표정에는 오래된 친밀감이 묻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의식 깊은 곳을 날카롭게 스쳤다. 순간,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여기 이 사진이요. 혹시, 부군 되시나요?

도준이 사진을 가리켰다. 서윤은 싱크대 수납장에서 머그잔을 꺼내려다 말고, 놀란 기색으로 급히 다가왔다.

-이 사진이요? 어머머, 제 오빠예요.
-하하, 그렇군요. 저는 또

도준이 짧게 숨을 내쉬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윤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의 이성 관계를 궁금해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가?’


부끄러움과 들뜬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약혼자까지 있는 처지에 이런 마음의 일탈은 양심을 건드릴 만큼 위태롭고 도발적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낯설고 신비로운 남자 앞에서 그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 안에서 꿈틀거렸다.


주방 앞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을 비롯해 작업 중인 듯한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노트북 화면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일하시는 중인가 봐요?

-, . 갤러리에서 다음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서윤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짧게 설명했다. 도준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근무하는 인사동 리온 갤러리는 도준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제 선배 중에 소나무에 혼을 담는 사진작가가 계세요. 백두산에서 찍은 소나무 작품을 리온 갤러리에서 전시하신 적이 있어요.

-혹시 장무현 선생님 말씀인가요?
-, 맞아요.
-어머! 그 전시 준비할 때 저도 거기 있었어요. 도록은 제가 만들었거든요. 근데 그 무렵, 잠깐 뉴욕에 공부하러 가느라 오프닝에는 참석을 못 했죠.
-4년 전이었죠?
-1993, 정확히 4년 전이에요.
-그때 조금만 늦게 떠나셨다면
-맞아요. 우리가 그 오프닝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네요.


서윤은 못내 아쉬운 듯 말했다. 간발의 차이로 어쩌면 삶의 결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강태일을 만나기 훨씬 전이었고, 세상은 아직 밝고 호의적인 얼굴로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일과 얽힌 그녀의 시간들은 짙은 그늘 속에서, 색과 온도를 잃은 사진처럼 퇴색해 버렸다.


나는 정말 강태일과 결혼할 생각인가?’


약혼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의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나이가 들면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여겼고, 어쩌다 보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상대가 강태일, 그 남자였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가 단지 괜찮은 조건을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너무 쉽게 맡겨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혼 전의 여자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까지 고민하게 돼. 이게 과연 잘한 결정인가? 넌 어떻게 생각해? 결정을 잘한 것 같아?


약혼 직후, 친구 제이가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분명한 대답을 찾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몰라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찾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은 평생을 들여도 끝내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는 애써 외면해 왔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문 앞에서는 때로 그 무게를 모른 척 돌아서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은밀한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도준은 식탁 겸 책상으로 쓰이는 테이블 앞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서 매끄럽게 이어진 콧날, 그리고 턱선을 따라 흐르는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입체적인 선을 돋보이게 했다.

뜨거운 태양과 자연의 생기를 품은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낯설 만큼 고요한 기류가 스며 있었다. 어디 하나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눈길이 자꾸만 머무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목구비를 더듬고 있는 자신의 불온한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게 홀린 듯 바라보는 자기 모습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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