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별장 앞에 다다른 서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열쇠로 출입문을 연 뒤 문턱을 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벅찬 충족감이 가슴을 휘감았다. 두려움과 낯선 설렘이 뒤섞인, 강렬하고도 불가해한 감각이었다. 집 안으로 다시 김 씨 할아버지의 조카를 들이는 것이 여전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강한 호기심과 걷잡을 수 없는 동요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왜 이렇게 떨리지? 고맙다는 의미로 커피를 대접하는 건데.’
그래, 그냥 커피 한 잔일 뿐이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키며 스스로를 다그치듯 생각했다.
도준은 자전거를 벽에 기대어 놓고 어제 붙인 패치 자리를 다시 꼼꼼히 살폈다. 타이어의 공기압도 충분했고, 찢어진 흔적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접착제가 잘 굳었나 보네요. 당분간 자전거 타는 데 문제없겠어요.
-잘됐네요. 제가 커피 탈게요. 그런데… 지금 인스턴트커피밖에 없는데 어쩌죠?
-커피콩으로 만든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그는 말끝을 흐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가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도준은 어제보다 한결 느긋한 표정으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실내는 화려한 장식 없이도 단정했다. 책들이 가지런히 꽂힌 장식장, 유리 진열대 위에 놓인 여행의 흔적들, 벽면에 걸린 설피와 색바랜 장미 한 송이. 사물들은 말없이 세월의 숨결을 품고 있었다. 소박하고 절제된 가구의 부드러운 선과 따스한 질감은 그곳에 살아온 사람의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페치카 선반 위에는 액자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도준은 그중 하나에서 서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사진 속 두 사람은 활짝 웃고 있었다. 서로의 표정에는 오래된 친밀감이 묻어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그의 의식 깊은 곳을 날카롭게 스쳤다. 순간,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여기 이 사진이요. 혹시, 부군 되시나요?
도준이 사진을 가리켰다. 서윤은 싱크대 수납장에서 머그잔을 꺼내려다 말고, 놀란 기색으로 급히 다가왔다.
-이 사진이요? 어머머, 제 오빠예요.
-하하, 그렇군요. 저는 또…
도준이 짧게 숨을 내쉬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윤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의 이성 관계를 궁금해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겼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흠,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건가?’
부끄러움과 들뜬 기분이 동시에 밀려왔다. 약혼자까지 있는 처지에 이런 마음의 일탈은 양심을 건드릴 만큼 위태롭고 도발적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낯설고 신비로운 남자 앞에서 그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 안에서 꿈틀거렸다.
주방 앞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을 비롯해 작업 중인 듯한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테이블 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노트북 화면을 검지로 툭 건드렸다.
-일하시는 중인가 봐요?
-아, 네. 갤러리에서 다음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서윤은 자신이 맡은 업무를 짧게 설명했다. 도준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근무하는 인사동 리온 갤러리는 도준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제 선배 중에 소나무에 혼을 담는 사진작가가 계세요. 백두산에서 찍은 소나무 작품을 리온 갤러리에서 전시하신 적이 있어요.
-혹시 장무현 선생님 말씀인가요?
-네, 맞아요.
-어머! 그 전시 준비할 때 저도 거기 있었어요. 도록은 제가 만들었거든요. 근데 그 무렵, 잠깐 뉴욕에 공부하러 가느라 오프닝에는 참석을 못 했죠.
-4년 전이었죠?
-1993년, 정확히 4년 전이에요.
-그때 조금만 늦게 떠나셨다면…
-맞아요. 우리가 그 오프닝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네요.
서윤은 못내 아쉬운 듯 말했다. 간발의 차이로 어쩌면 삶의 결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때는 강태일을 만나기 훨씬 전이었고, 세상은 아직 밝고 호의적인 얼굴로 그녀 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일과 얽힌 그녀의 시간들은 짙은 그늘 속에서, 색과 온도를 잃은 사진처럼 퇴색해 버렸다.
‘나는 정말 강태일과 결혼할 생각인가?’
약혼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의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나이가 들면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여겼고, 어쩌다 보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상대가 강태일, 그 남자였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가 단지 ‘괜찮은 조건’을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너무 쉽게 맡겨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혼 전의 여자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까지 고민하게 돼. 이게 과연 잘한 결정인가? 넌 어떻게 생각해? 결정을 잘한 것 같아?
약혼 직후, 친구 제이가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분명한 대답을 찾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몰라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찾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은 평생을 들여도 끝내 풀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녀는 애써 외면해 왔다.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질문 앞에서는 때로 그 무게를 모른 척 돌아서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가장 은밀한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도준은 식탁 겸 책상으로 쓰이는 테이블 앞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서 매끄럽게 이어진 콧날, 그리고 턱선을 따라 흐르는 그림자가 그의 얼굴에 입체적인 선을 돋보이게 했다.
뜨거운 태양과 자연의 생기를 품은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낯설 만큼 고요한 기류가 스며 있었다. 어디 하나 도드라지지 않으면서도, 눈길이 자꾸만 머무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그의 이목구비를 더듬고 있는 자신의 불온한 시선을 의식했다. 그렇게 홀린 듯 바라보는 자기 모습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