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지금껏 서윤은 여러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홀로 떠난 유럽 배낭여행은 그녀 인생에서 처음 감행한 자발적인 탈선이었고, 그 여정을 담은 일기장은 나중에 『파리에서 베네치아까지, 고양이처럼』이라는 책으로 엮어졌다. 제이가 운영하는 해오름 출판사에서 소규모로 출간된 그 여행기는 비록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처음으로 ‘작가’라는 이름을 안겨주었다.
뉴욕에서 머문 1년 동안에는 그랜드캐니언, 나이아가라, 뉴올리언스, 키웨스트 같은 명소를 찾아다니며 이국의 낯선 풍경 속을 떠돌았다. 그러나 그런 여행은 어디까지나 계획된 이동에 불과했고, 그녀의 삶은 여전히 도시 문명과 인공 낙원이 설계한 경로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흘러갔다. 그 바깥으로 발을 디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손문기 선생이 ‘공작 도시’라 불렀던 그 익명의 공간. 정돈된 질서와 번영 뒤에는 권태와 감각의 둔화가 숨어 있었다. 그 안에서 서윤은 가족과 직업, 그리고 집이라는 구도를 ‘행복의 조건’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 프레임은 나름의 안정을 보장했고, 모두가 무사했지만, 서윤이 기억하는 한 이곳을 자유 의지로 벗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그녀는 부모라는 울타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약혼자 강태일이 마련한 또 다른 가계의 테두리 안으로 옮겨질 참이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갈 때마다, 서윤의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아프리카 쇼나 조각상 전시를 계기로 데이트가 막 시작되던 무렵만 해도, 강태일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격식을 갖춘 태도와 교양 있는 말투로 자신을 성숙하고 단정한 사람처럼 꾸몄고, 서윤을 배려하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약혼식이 끝난 뒤부터 그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집안의 수준 차이와 경제적 격차가 크다는 이유로 강태일의 누이는 벌써부터 못된 시누이처럼 굴었고, 태일 역시 그녀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우린 이제 부부야. 한 몸이나 다름없잖아.
그 말은 설득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 약혼까지 했는데.
그녀를 향해 함부로 뻗어오는 손길에는 참을 수 없는 추잡함이 묻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육체적 관계와 그 직후에 보여주는 그의 모욕적인 태도는 조금씩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존중받는 사람이 아니라, 함부로 다뤄지는 대상으로 밀려나 있다는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인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몸 안 어딘가에서 그녀를 끊임없이 불편하게 했다.
약혼한 지 어느새 일 년하고도 여섯 달이 흘렀다. 그동안 그가 제공한 물질적 혜택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무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늘 무언가를 대가로 치러야 하는, 거래에 가까운 냉정한 방식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 누군가의 딸에서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로 ‘전이’될 운명이었다. 그 모든 정체성은 선택이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었고, 그 마지막에 그녀 자신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지금 보이지 않는 흐름에 떠밀리듯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에도 정박하지 못한 작은 배처럼, 멈출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 끝 어딘가에 닿고 나면, 그저 주어진 일상에 길들여져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날개를 접은 채, 안락이라는 이름의 틀 속에서 서서히 자신을 잃어갈 것이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해 기꺼이 많은 희생을 감내해 왔다. 하지만 결혼 이후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정지된 상태로 삶을 지속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강태일의 집안은 보수적이었고, 새며느리가 바깥일에 몰두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화랑의 큐레이터 일이나 장차 대학 강단에서의 미술사 강의,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순간이 올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벌써 숨이 막혀왔다.
이런 고민을 쉽게 털어놓을 곳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들이 얼핏 자랑처럼 비칠까 망설여졌고, 배부른 소리라는 비아냥이 돌아올까 두려웠다. 결국 그녀는 내면의 결핍과 욕망을 감춘 채 입을 닫았고, 그 침묵은 자신을 더욱 고립시켰다.
어떤 날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영화 속 여주인공처럼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하는 자신의 뒷모습을 그려보면, 이상하게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연고도 목적도 없는 낯선 도시의 아침 풍경을 떠올렸다. 울창한 숲속을 헤매다 마침내 거대한 폭포 앞에 다다르는 여정도 멋질 것 같았다. 깊은 협곡을 오르내리다 지쳐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잠시 모든 존재로부터 지워지는 순간. 그녀는 한 번쯤, 그런 세계에 가닿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결혼을 앞둔 이 시점에서 그런 방랑은 현실에서 밀려난 환상에 불과했다. 머릿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는 자유, 끝내 실행되지 못할 도피의 충동, 그것만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반항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