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그것은 일종의 결핍이었다. 하나의 얼굴로 정형화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내면에 서로 다른 형태로 잠복해 있었다.
서윤은 ‘안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정돈된 평온, 반듯한 윤곽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왔다. 기성품처럼 정제된 삶이었고, 오래된 희망만을 반복 재생하는 인공의 낙원에 가까웠다.
도준은 달랐다. 그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을 택했다. 원시의 대지와 더불어 충동과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흘러왔다. 방향 없는 나침반처럼, 본능에 기대어 이동해 온 존재였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규범 밖에 놓인 삶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체계와 리듬으로 그 결핍을 감당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설계된 틀 안에서 버텨왔고, 다른 이는 그 틀을 거부한 채 세상 끝을 향해 혼자 떠돌았다. 출발점은 달랐으나, 그 ‘다름’의 이면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닮음’이 숨어 있었다. 양면 거울처럼 마주 선 두 얼굴이 비로소 서로를 인식한 순간이었다. 낯선 것에 대한 끌림은 익숙함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순간 듣기 좋은 멜로디처럼 되살아났다. 그 말에는 절제된 힘과 산을 향한 긴 호흡이 함께 배어 있었다.
–칫솔도 반토막, 비누도 반토막, 그렇게 가져가는 정도예요. 고산을 등반하는 동안 눈을 녹여 물을 만들려면 연료가 많이 듭니다. 게다가 고도가 높을수록 비등점도 낮아지죠. 그래도 커피는 가끔 마셔요. 미지근한 물에 대충 타 마시기도 하는데, 그 밍밍한 맛이 어떨지는 짐작 가시겠죠.
서윤은 그의 목소리와 말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다. 장비와 눈과 연료와 비등점의 계산.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세월과 몸으로 축적해 온 경험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언어였다.
–그렇군요.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배낭을 짊어진 자신이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나무들이 숨 쉬듯 흔들리고, 깊은 계곡 사이로 놓인 구름다리가 느릿하게 출렁였다. 그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인 긴장과 불안이 절로 씻겨 나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오래전부터 몸에 밴 자연의 리듬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 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남자였다.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새로운 인류처럼 느껴졌다. 그의 세계는 늘 긴장과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삶은 생과 사의 외줄타기 위에서 치밀한 질서로 구축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영혼은 어떤 색채를 띠고 있을까. 함께할수록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무슨 음식을 즐기는지, 사람을 판단할 때 무엇을 먼저 보는지, 소년 시절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외에도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태 결혼할 틈도 없었어요. 아니, 못한 거죠.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
그가 자신의 이성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비친 건 우연이라기보다 계산된 고백처럼 느껴졌다. 아직 미혼인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했지만, 굳이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서윤의 마음을 떠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커피잔을 비우고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긴 침묵을 냉담한 거절로, 철벽같은 방어로 받아들인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벽이 가로놓였다.
–그만 가봐야겠군요. 제가 꽤 오래 방해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작별을 고했지만, 그 말끝에는 씁쓸함과 자조적인 기색이 엷게 섞여 있었다.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섭섭했지만, 이제는 그를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별말씀을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해야죠. 안녕히 계십시오.
–…조심히 가세요.
문 앞에 선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으려다 말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는 눈빛 속에 말로 다 옮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심장도 그 여운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