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흠칫 놀란 도준은 그 자리에 멈춰 서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남녀가 뒤엉킨 듯한 격렬한 숨결과 흐느낌이 한낮의 정적을 흔들었다. 어린 소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몸은 떨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도망치듯 뒷걸음질하며 그 집을 벗어난 도준은 울타리 근처의 오래된 느티나무 뒤로 급히 몸을 숨겼다.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 도준은 고모부가 윗집 아줌마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평소와 다르게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는 고모부의 행동은 어렴풋이 금지된 행위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을 떠올리게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일하는 시장에서 옆집 옷가게 부부가 칼부림까지 하며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는 찢어진 메리야스 바람에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냅다 줄행랑을 쳤고, 아줌마는 산발한 머리로 시장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럽게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는 옆집 가게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려 저런 사달이 난 거라고 말했다. 한 번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여자는 영원히 남편을 믿지 못하고,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이 도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고모도 그 옷가게 아줌마처럼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곧 들통날지도 모를 비밀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도준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는 사실로 인해 한동안 마음 깊이 괴로워했다. 몰래 주위를 살피던 고모부의 모습이 반복해서 떠오르고, 그때 들었던 윗집 아줌마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경기도의 어느 기숙학교로 떠나기 전날에도 그랬다. 도준이 방 안에서 짐가방을 꾸리고 있을 때, 고모는 책꽂이 위에 놓아둔 여자아이의 샌들을 보며 누구 거냐고 의아해했다. 고모부의 외도를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끝내 입을 다문 것은, 단지 어른들의 세계에 감춰진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겁이 났다. 고모는 그의 유일한 친족이자, 부모를 대신한 보호자였다. 그런 고모가 죽을 때까지 누구도 믿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채 불행 속에서 살아갈까 봐, 도준은 몹시 두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모부는 늘 고모에게 다정했다. 바람난 남자들이 아내에게 더 자상하다는 말이 떠오르긴 했지만, 고모부의 태도는 전혀 가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그는 가정에 책임을 다하는 남편이었고, 고모는 그런 고모부를 믿고 존경했다.


-내가 뭔가 잘못 본 걸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때의 일을 애써 외면했다. 결국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나면서, 그날의 모든 비밀은 분홍신 한 짝과 함께 어둠 속에 묻혔다.


요즘 들어, 도준은 한 개인의 인생 끝자락에 남은 그리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우리가 죽어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그 그리움마저 함께 사라지는 걸까.


10여 년 전, 윗집 아줌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고모부는 그 집의 울타리를 들락거리며 관리인 노릇을 자처했다윗집 아줌마에 이어 고모마저 세상을 떠났지만, 고모부는 모두가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며 추억의 자취를 따라 망각의 그림자 속을 거닐었다.


윗집 아줌마는 고모부에게 어떤 의미의 사랑이었을까.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물이자 피할 수 없는 과보를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무게를 과거에서 현세로, 다시 미래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렇게 과거의 뜨락에서 텅 빈 그림자를 응시하며 외따로 서 있는 고모부의 모습을 떠올릴 때면, 왠지 모르게 애잔하고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고모부의 뒷모습에 드리워진 생의 쓸쓸함을 마주할수록, 그 어떤 비밀도 발설하지 않고 그때 서둘러 고모 집을 떠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새삼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고모에 대한 미안함은 지금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그러나 늙고 병든 고모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요즘, 아무도 모르게 마음을 나누어왔던 두 사람의 사랑 역시 진실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토록 가슴에 품을 만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아내는 인생 또한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도준은 그 집 손녀딸인 서윤과 자신 사이의 오랜 인연을 곰곰이 되짚었다. 이 분홍신 한 짝에 윗집 아줌마와 고모부의 비밀스러운 사랑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기가 막히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는 설렘과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오늘 밤, 도준은 고모부 집 창고에서 오랜 세월 먼지에 덮여 있던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었다. 이제 그 신발을 원래 주인인 서윤에게 건넬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고모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비밀을, 굳이 서윤에게도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어쩌면 고귀한 보석처럼 드러낼 때보다 속으로 간직할 때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진정한 보석의 가치는 무수한 비밀들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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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어린 소녀의 분홍색 샌들은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고 있다. 도준은 지금도 계곡물에 떠밀려 내려왔던 그 신발을 처음 발견했던 때를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전 학년이 모두 운동장에 모여 방학식을 치른 후, 학생들은 교실에서 담임선생으로부터 방학책을 나눠 받았다. 선생님은 방학 숙제를 모두 해서 2학기 개학식 날 일기장과 함께 제출하라고 말했다.


-개학하면 방학책에 있는 문제로 시험을 볼 거야. 방학 동안 놀지만 말고,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모두 알겠나?
-.

아이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매일매일 쓰는 일기를 미뤘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쓰면, 날씨를 알 수 없지. 그럼 한꺼번에 쓴 일기는 어떻게 될까? 뽀록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책상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날은 잠시나마 학교 울타리에서 해방되는 초등생들의 독립 기념일이기도 했다. 학급 종례가 끝나고 청소 시간까지 마친 아이들은 각자 책상 속을 정리한 뒤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갔다. 도준도 다른 애들과 함께 교문을 나섰지만, 그 순간 집도 보호자도 없이 홀로 남겨진 듯한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었다. 아이들에게는 기쁨의 계절이었지만, 도준에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없는 상실의 계절이었다. 고모네 가족이 아무리 친절하다 해도, 엄마가 직접 밥상을 차려주던 서울 집과는 공기부터가 달랐다. 무엇보다 다시는 양친을 볼 수 없다는 슬픔과 비애가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그의 의식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름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올랐던 산길,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수박을 베어 물던 일, 정상 높은 바위 위에서 함께 외치던 야호!’, 약수터를 찾아 거친 풀숲을 헤치며 아버지보다 먼저 길을 내던 순간, 잔소리 속 인자한 웃음소리.


기억은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제 그런 기적 같은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을, 그는 너무 일찍 깨닫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부모님을 잃은 상실감이 속살 깊이 파고드는 동안, 그의 발길은 저도 모르게 용천 계곡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 숲속에는 초목의 냄새가 짙게 진동했다. 초록으로 물든 오솔길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의 거친 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흐르는 물줄기 아래, 무언가 바위틈에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며칠 전 그 소녀가 잃어버린 샌들 한 짝이 분명했다. 에나멜로 코팅된 신발은 햇살 속에서 반들거리며 선명한 분홍빛을 드러냈고, 물속에 처박히지 않은 덕분에 흠집 하나 없이 새것처럼 빛났다. 도준은 그것을 손에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걸 돌려줘야 할 텐데.’


하지만 더 이상 소녀를 만날 수 없게 된 터라, 결국 그 신발을 윗집 아줌마를 통해 전해주기로 결심했다.

 

고모에게 모든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학교를 빼먹고 용천 계곡으로 놀러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크게 꾸중을 듣고, 회초리도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물에 빠진 아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영웅담처럼 들릴 것이 뻔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가 더 깊은 추궁과 불신으로 내몰릴 게 분명했다. 고모에게는 오히려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다.


기분 또한 그때 일로 싱숭생숭했다. 꼬맹이 여자아이에게 입을 맞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비록 인공호흡을 위한 일이었지만, 소년 도준에게는 그것이 생애 첫 입맞춤이었다. 사람은 생의 어느 순간 처음으로 이성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일까. 누구나 그런 설렘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면, 도준에게는 바로 그때가 첫 순간이었다.


그 아이도 그런 묘한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을까. 그래서 일부러 눈을 감고 정신을 잃은 척했던 건 아닐까. 그런 발칙한 상상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혼자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윗집에 가서 신발만 살짝 놓고 돌아오자.’


어른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서윤에게 큰할머니가 되는 윗집 아줌마는 과부로 혼자 살고 있었다. 단정한 옷맵시와 고운 외모가 인상적인 40대 후반의 여인으로, 고모와도 자주 오가며 음식을 나누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윗집 아줌마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산간 지방의 농사꾼 마을에 사는 다른 아낙들과 달리, 그녀는 곱상한 말투와 온몸에서 배어 나오는 세련된 기품으로 눈길을 끌었다. 고모는 윗집 아줌마가 유복한 가문의 자손이자 대도시에서 여학교까지 마친 신여성이라고 말했다. 22년 전, 그녀의 집은 평범한 시골집이었지만 마당 한쪽에 잘 가꾼 꽃밭이 있었고, 싸리나무 울타리 주변도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13세 도준은 분홍신을 싼 신문 뭉치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그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저기요, 아주머니 계세요.’ 하고 작게 부른 건 도둑처럼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왔다는 오해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댓돌 위에 놓인 큼지막한 검정 고무신이 도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왼쪽 고무신에 찍힌 낫 자국이 왠지 모를 기시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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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고모와 고모부가 한 시대를 살았던 그 집의 뒷마당에는 외양간을 개조한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각종 농기구와 오래된 잡동사니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는 곳이었다.


그날 밤, 도준의 그림자가 창고 안 선반 사이에서 한동안 이리저리 움직였다. 구석구석 쌓여 있는 상자와 보따리들을 들출 때마다 손끝에서 먼지가 흩어졌다. 그는 바스러질 듯 삭은 상자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분명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어둠 속을 오가던 손전등의 노란 불빛이 마침내 선반 구석의 작은 상자 앞에서 멈췄다.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연 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다. 여기 있었네.


상자 안에는 어린이용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 그 여름의 햇살과 바람, 어린 서윤의 발자국을 그대로 담고 있는 신발 한 짝. 도준은 그 작은 샌들을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 고모가 이런 걸 버릴 리 없지.


오래전, 용천 계곡에서 마주쳤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떠내려가는 신발을 좇다 물살에 휘말린 작은 몸, 급류 속에서 끌어올린 아이는 젖은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그의 셔츠를 꼭 붙든 손은 유백색 꽃잎처럼 창백했다. 그 차갑고 여린 감촉이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이번엔 내가 구했어.

소년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며칠 뒤, 도준은 계곡 아래에서 물살에 떠밀려온 분홍신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이미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도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 집을 나와 기숙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날은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도준이 짐을 싸고 있을 때, 고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속옷과 밑반찬을 챙겨 주던 고모의 시선이 책꽂이로 향했다. 거기에는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고모에게 그것은 이 방 안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퍼즐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저거 뭐야? 웬 샌들을 모셔둔 거야?

-새 신발이잖아요.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요.

-아주 작은데? 누가 주인인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 여기 없다고, 제 물건 막 버리진 마세요.


도준은 왠지 시무룩해 보였다.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 속에 불안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집을 떠나기 싫어 그런 것이라 생각한 고모는 어린 조카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괜찮아. 금방 방학하면 또 볼 텐데. 우리 준이,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들면 바로 연락하고. 이 고모가 당장 쫓아가서 해결해 줄 테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해 여름, 용천 계곡에서 제짝을 잃어버린 그 분홍신 한 짝은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난 뒤 줄곧 이 창고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수많은 사연과 수수께끼 같은 세월을 지난 끝에, 마침내 오늘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제 분홍색 샌들은 진짜 주인을 향한 길목에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 묶인 매듭 하나가 스르르 풀리려는 중이었다.


이 샌들을 돌려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어떤 말로 그날 있었던 익사 사고에 관해 설명해야 할지, 우리의 인연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기적 같은 우연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그녀가 벌써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머리 한쪽에서는 그녀와의 인연이 내일까지겠구나 싶으면서도, 세상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를 로체 남벽 등정을 앞두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로 기이한 일일 수도 있었다.


도준이 신발 상자를 들고 창고에서 나오자, 집 내실 쪽에서 희미하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그는 장독대 앞을 지나 대청마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 청소 용역회사 대표인 최윤 선배일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도준이 댓돌 위에서 신발을 벗으며 손을 막 뻗으려는 순간, 벨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묵직한 캔디바 형태의 노키아 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어이쿠, 전화했으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안 받으면 또 걸겠지.

하지만 벨 소리는 끝내 다시 울리지 않았다. 당시는 방금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도준은 그 전화가 서윤에게서 온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보지만, 그날 밤 전화가 연결되었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분홍신 한 짝은 단순한 추억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제 분신의 또 다른 한 짝을 향한 인연의 닻줄이자, 먼 여정을 품은 상징적 매개체였다. 하지만 그 신발을 찾느라 창고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결국 그녀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분홍신은 어쩌면 두 사람을 두고 벌이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준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손에 들고 있는 신발 상자만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일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는 동안, 깜짝 선물처럼 이 분홍신을 건넬 수 있으리라.

-이 신발이 오랫동안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낭만적이고도 의미심장한 한마디쯤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물에 대한 두려움은 그날 익사 사고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더는 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때의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용천 계곡의 개울가에서 시작된 인연은 스물두 해를 넘어 다시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녀와의 두 번째 입맞춤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 아닐까.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라 해도, 그들의 관계는 어떤 현실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분홍신 한 짝은 두 사람의 운명이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작고 소중한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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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아니다. 처음부터 그녀의 신경줄은 온통 그 노트에 쏠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층 테이블 위에 놓인 스프링 노트는 이미 그녀의 의식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기에, 마음은 내내 불편했고,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기만 했던 건 아닐까.


결국 다시 거실로 내려간 그녀는 그 초록색 노트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결을 더듬듯 한 장 한 장 넘기던 끝에, 마침내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숫자와 마주했다. 그는 이 집을 나서려다 무슨 마음으로 이 번호를 남긴 걸까. 단순히 필요할 때 돕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은, 차마 언어로는 옮길 수 없었던 은밀한 그 무엇이었을까.


부엌 옆에 걸린 전화기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거운 침묵 속, 지금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전화하자.’


그 단어 하나가 강박처럼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온몸에 열기가 솟구쳤다. 그건 비상식적이면서도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근거 없는 망상이 꼬리를 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전화를 걸겠다고? 말도 안 돼.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울렸다. 노트에 적힌 숫자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기대와 초조함을 느꼈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이 밤중에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필요한 게 있다고 해놓고, 말끝만 흐린 채 전화를 끊을 게 뻔했다. 그리고 나중엔 자신의 바보 같은 말투와 변명을 떠올리며 몸서리칠 테지. 그녀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내게 이상한 바이러스라도 침투한 거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들끓었다. 노트를 번쩍 들어 올려 마구 흔들다가, 결국 항복하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끌림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본능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굴복하는 사람처럼.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숫자 열 개를 천천히 눌러갔다.

그 남자가 있는 그곳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기 시작했다.


두드드드.


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울어댔다. 벨이 울릴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곤두섰고, 정수리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꽂히는 듯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심장 속 어딘가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큰 파도가 일렁였고, 숨결마다 공기가 묵직하게 떨렸다. 그 전화벨 소리는 세 번의 심판, 세 번의 운명처럼 거침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마침내 네 번째 벨이 울리려던 순간, 참을 수 없는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수화기를 내던졌다. 다급히 전화 플러그마저 뽑아버렸다. ,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돼. 나 진짜 이상해졌어.


그녀는 노트를 펼쳐 번호가 적힌 페이지를 와락 뜯어내고, 주저 없이 박박 구겨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란 듯,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에 남은 격렬한 감정의 잔해 속에서 미련과 후회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쓰레기통 속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못된 것전화 걸고 싶지? 걸어라, 어서.’


그녀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환청처럼 되풀이되는 그 소리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숨 막히는 본능의 폭주를 억누르며,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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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밤이 깊어가자 별장 주변은 짙은 물감이 뿌려진 푸른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작업에 몰두할 때도, 뜨거운 녹차를 홀짝일 때도 마음 한 가닥은 늘 창밖 어둠에 닿아 있었다.


어수선한 심정으로 욕실 거울 앞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설렘이 밀려왔다. 도준의 구릿빛 얼굴과 그 짜릿한 입맞춤이 가슴을 조이듯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제이였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숨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화 받으려고 뛰어왔어. 근데, 무슨 일이야?


서윤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 서울 온다더니, 왜 거기 있는 거야?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지.


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일? 지붕 공사 대금은 오늘 준다며.

-그게 다야. 빨리 말해. 지금 전시 기획안 정리 중이니까.

-거기서도 일해? 좀 쉬어라, 쯧쯧.

-제발 말해. 무슨 일이냐고.

-태일 씨가 너 어디 있냐고 전화했어.

-혹시 나 횡계 갔다고 했어? 그러지 말지.

-! 휴가받았다는 말 안 했다고 했지? 근데 그 남자, 좀 이상해. 자기 약혼녀가 서울에 없다는데 왜 나한테 짜증을 내?

-그 사람 원래 말투가 그래.

-그럼 너는 그 짜증을 매번 받아 주는 거야?

-그건 아니야미안. 대신 사과할게.

-어쨌든, 난 그 남자 밥맛이야. 완전 재수탱이야.


제이가 태일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서윤이 그와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툴툴거리며 쓴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녀가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하자, 제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우리 사무실로 와. 불금이잖아. 닭꼬치에 생맥 하나씩은 해야지.

-알았어. 가능하면 들를게.


전화를 끊고 나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한 주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고, 휴가가 별다른 성과 없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듯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는 잠시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파일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지만, 정신은 이미 화면 밖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는 밤의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불빛처럼 눈을 찔렀고, 숫자와 문장들은 행간 속에서 부유하는 암호처럼 의미를 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손을 멈췄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와 화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노트북을 쾅 닫았다.


도준.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는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이토록 끌려도 되는 걸까. ‘정신 나갔어.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한순간에 흔들리다니그러나 생각은 마법의 콩나물처럼 끝없이 자라났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들. 불면증 환자가 잠들기 위해 잠을 내려놓아야 하듯, 강박증 환자가 생각의 루프에서 벗어나려면 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녀도 이 뒤숭숭한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작은 파동이 꿈틀거렸다.


도준.


손등을 스치던 그의 손길, 귓가에 느껴지던 따뜻한 숨결, 느릿하게 퍼져 가던 낮은 목소리. 모든 순간이 가슴 저릴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얼굴은 흐릿했다. 눈과 코, 입의 생김새를 떠올리려 애쓸수록, 뿌연 목탄화처럼 희미한 윤곽만 남았다.


그녀는 이층 침실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의식은 오히려 더욱 명징하게 깨어났다. 흩어진 이미지들이 만화경 속 유리 조각처럼 어지럽게 맴돌았다. 기억과 감각이 뒤엉킨 혼돈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


-어머, 이게 뭐야? 미친 거야? 나 정말 진심인 거지?


무대 위에서 독백을 쏟아내는 배우처럼,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차분히 누워 있는 일조차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집 안을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층계를 내려가 거실과 손님방을 휙 둘러보고, 화장실 문을 밀어젖힌 뒤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던지며 허공을 향해 두 발을 마구 차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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