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아니다. 처음부터 그녀의 신경줄은 온통 그 노트에 쏠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층 테이블 위에 놓인 스프링 노트는 이미 그녀의 의식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기에, 마음은 내내 불편했고,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기만 했던 건 아닐까.


결국 다시 거실로 내려간 그녀는 그 초록색 노트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결을 더듬듯 한 장 한 장 넘기던 끝에, 마침내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숫자와 마주했다. 그는 이 집을 나서려다 무슨 마음으로 이 번호를 남긴 걸까. 단순히 필요할 때 돕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은, 차마 언어로는 옮길 수 없었던 은밀한 그 무엇이었을까.


부엌 옆에 걸린 전화기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거운 침묵 속, 지금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전화하자.’


그 단어 하나가 강박처럼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온몸에 열기가 솟구쳤다. 그건 비상식적이면서도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근거 없는 망상이 꼬리를 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전화를 걸겠다고? 말도 안 돼.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울렸다. 노트에 적힌 숫자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기대와 초조함을 느꼈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이 밤중에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필요한 게 있다고 해놓고, 말끝만 흐린 채 전화를 끊을 게 뻔했다. 그리고 나중엔 자신의 바보 같은 말투와 변명을 떠올리며 몸서리칠 테지. 그녀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내게 이상한 바이러스라도 침투한 거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들끓었다. 노트를 번쩍 들어 올려 마구 흔들다가, 결국 항복하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끌림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본능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굴복하는 사람처럼.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숫자 열 개를 천천히 눌러갔다.

그 남자가 있는 그곳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기 시작했다.


두드드드.


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울어댔다. 벨이 울릴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곤두섰고, 정수리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꽂히는 듯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심장 속 어딘가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큰 파도가 일렁였고, 숨결마다 공기가 묵직하게 떨렸다. 그 전화벨 소리는 세 번의 심판, 세 번의 운명처럼 거침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마침내 네 번째 벨이 울리려던 순간, 참을 수 없는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수화기를 내던졌다. 다급히 전화 플러그마저 뽑아버렸다. ,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돼. 나 진짜 이상해졌어.


그녀는 노트를 펼쳐 번호가 적힌 페이지를 와락 뜯어내고, 주저 없이 박박 구겨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란 듯,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에 남은 격렬한 감정의 잔해 속에서 미련과 후회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쓰레기통 속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못된 것전화 걸고 싶지? 걸어라, 어서.’


그녀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환청처럼 되풀이되는 그 소리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숨 막히는 본능의 폭주를 억누르며,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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