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최초의 연금술사는 엄마입니다. 생애 초기에 받는 엄마의사랑과 보살핌, 엄마와 나누는 정서적 교감에 따라 아기의 정신은 특정한 모양으로 탄생합니다. 정신분석은 두 번째 연금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연금술에서 우리가 수동적이고 무력한 상태였다면, 이제성인이 되어 주도적이고 자율적으로 두 번째 연금술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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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받은 아동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에게조차 강한 애착과 충성심을 갖습니다. 부모가 즐거움과 만족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 사이의 유대 관계가 약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아이들은 부모와 더욱 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부모가 주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고통을 추구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두명의나님처럼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은 꾹꾹 눌러 참고 상대방의입장을 먼저 배려하면서 부당한 관계나 우울을 감수하게 됩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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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라는 용어는1970년대 초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 《안티오이디푸스》가 출간되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발전한 안티오이디푸스 문화의 시대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이 저서는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제에 가해진 가장 강력한 ‘좌파적‘ 비평이었다. 반대로오늘날에는 보수주의적 비평, 즉 ‘우파적‘ 비평이 강세를 보이고있다. - P157

아들 안티오이디푸스는 충동의 비이성적 힘을 일방적으로 찬양한다. 하지만 그는 숙명적으로 이 충동의 힘을 인간은 생동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약간은 파시즘적인 관점 속에 빠뜨린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개념 중 하나인 ES는 아들 안티오이디푸스에게는, 도처에서 모든 한계와 규율을 뛰어넘어 쾌락에 몰두하는 육체의 무정부적 힘의 표현이다. - P160

아들 안티오이디푸스가 ‘말의 계율‘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도처에서 싸고 교미하는 동안, 라캉은 주체를 항상 스스로의 입장에 책임을 져야 할 존재로 지목하면서 욕망의 초월성으로 무엇을 했는지 주체에게 고집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욕망으로 무엇을 했는가? - P161

욕망의 자유로운 유통은 현실을 궁극적 목표로 보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정당한 반발이었지만, 이와 함께 또 하나의 괴물이탄생했다는 것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이 괴물은 곧 모든 형태의 한계를 거부하는 삶, 아버지와 ‘타자‘로부터 자유로운삶, 즉 정신분열증이라는 이름의 신화다. ‘육체파편‘이라는 이름의 신화, 산산조각 난 체제 없는 육체, 꽉 차있지만 기관 없는육체‘, 오이디푸스적 체제의 천적이자 도처에서 쾌락에 몰두하는 충동적인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육체는 끝내 퇴폐적이고 냉소적인 자본주의 담론의 기계적 유통으로 번역되고 말았다. - P161

니체가 ‘신의 죽음‘을 해방의 소식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새로운 우상(과학만능주의, 이데올로기적광신주의, 무신론,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정신분석학의 ‘아들들‘
에게 동일한 욕망의 이론 속에는 욕망의 무한한 유통과 같은 위험, 영토화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힘, 혹은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일종의 ‘탈출 경로‘와 같은 방심할 수 없는 위험이 존재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 P163

아버지가 증발한 시대는 어른이 증발한 시대다. 자식들의나르시시즘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나르시시즘에 좌우된다. 부모가 자식들의 무료한 행복을 교육적 투자의 평가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런 식으로 욕망의 전수와 그것이 요구하는 주체적 참여라는 기준을 무시한다면, 부모의 교육 행위는 자식들의 변덕을지지하는 입장 속에서 숙명적으로 증발할 수밖에 없다. 부모는그런 식으로 한계를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괴로운 의무감에서 벗어나지만, 자식들은 어떤 한계도 극복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 속으로 더 깊숙이 빠져든다. - P165

만약 죄ㅡ라캉의 입장에서 ‘죄‘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 죄ㅡ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욕망이 수반하는 고유의 책임감을 내던지는 것이라면, 아들 나르키소스가 무죄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욕망의 법칙을스스로 실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법칙이 주체의 무의식속에 전혀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주체에게 욕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보이기 때문이다. - P167

문제는 한계와 부족함의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 즉 ‘모든‘ 것을 뜻하는 판Pan 신화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 나르키소스의 운명이다.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거세의 상징적 상처를 피한, 영원히 생동하는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분리되지 않는존재다. - P170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이디푸스보다 텔레마코스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젊은 세대는 어른들이 아버지답게 행동하기를, 누군가가 바다로부터 돌아오기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다줄 새로운 계율이 도래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 P173

아버지의 부재는 그 자체로는 트라우마가 되지못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부재가 어머니의 말을 통해 어떻게 해석되고 상징적으로 전달되느냐에 달렸다. - P174

자신이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녀는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의 부재에 인간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린다. 그녀의 밤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셈이다.
부재하는 오디세우스를 하나의 ‘부재하는 실체‘로, 부재하되 가까이 있는 존재로 만들면서 그녀는 텔레마코스에게 상속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수한다. - P175

오이디푸스의 경우 법은 욕망의 차단을 의미하고 법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길을 가다 우연히만난 원수에 불과했지만, 텔레마코스에게 법은 치명적 쾌락의파괴적 혼돈을 거세와 욕망의 경험이라는 절대적인 필요성으로바꿀 수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 - P179

오디세우스는 존재를 재구성하는 대신 사랑하는 대상의 대체할수 없는 힘과 절대적인 비교 불가능성, 스스로의 욕망을 향한 믿음의 힘을 보여준다. 그는 영원불멸성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84

오히려 그가 자신의 욕망에 답하기 위해, 페넬로페를 품에안기 위해, 아들을 만나기 위해, ‘말의 계율‘을 자신의 왕국에 되돌려주기 위해 귀환을 결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으로 보편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살 만한 것으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 P184

아브라함과 오디세우스의 공통분모는 아들을 향한 사랑이다. 이들의 결정을 생생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이 밑도 끝도없는 사랑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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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다 빈치의 아버지가 처음에는 그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두 여인,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다 빈치를 키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프로이트 자신이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축적인 기능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다 빈치가 ‘아버지를 포기하는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창작과 탐구에 대한 그의 비범한 욕구는생겨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 P141

상속자에 대해 다루면서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와 자신의 환자들이 남긴 교훈을 토대로 죽음의 충동에 관해, 다시 말해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즐기려는 경향, 죽을 때까지 즐기려는 욕망에 관해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그러나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금욕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 P144

이것은 프로이트가 《청소년의 심리학》에서 청소년들의 성장 문제는 "아버지로부터의 분리"를 어떻게 현실화하느냐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루었던 문제다" 이 분리가 바로 상속의 가장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지고한 과제다. 정당한 상속은 우리의 존재가 타자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의 사회에 우리를 종속시키는상징적 채무를 인식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 분리를 실현할 수있는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계율을 ‘말의 계율‘로 받아들이는것이다. - P146

오이디푸스의 실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계율 자체를 하나의장애물로 경험하면서 잘못 이해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그의 자유를 계율에 대한 순수한 저항으로 축소시켜버렸고, 결과적으로 욕망의 신화를 모든 한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공식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안티오이디푸스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계율로부터의 탈출을 원하고, 계율 없이 살기를 원하고, ‘말의 계율‘을 지나간 과거의 일로 일축하면서 ‘한계‘,
‘거세‘, ‘아버지의 이름‘ 같은 개념들을 벗어던지고 싶어 한다. 오이디푸스처럼 그에게도 계율은 하나의 악몽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오이디푸스가 살아가는 곳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로서 존재할 줄 모르고, 자신의 존재의 기원도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의 진실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심장이다. - P156

지금부터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네 종류의 아들, 즉 오이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 나르키소스, 텔레마코스다.
오이디푸스와 안티오이디푸스는 이미 프로이트 극장에서 주목받은 인물들로, 가장 전형적인 아들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이디푸스의 시대는 68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에 종속된형태의 아들이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아버지 없이 고아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립 의지는 ‘타자‘와의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의지는 결국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지는 근친상간적 쾌락을 찬양하게 된다. - P149

나르키소스는 부모와 자식이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닮아가는 현상, 세대의 혼동, 투쟁과분쟁의 부재, 타자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개인적 행복의 찬양을 상징했다. 반면에 텔레마코스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표명하고 있는 불만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열쇠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텔레마코스는 ‘정당한 상속자‘를 상징한다. 그는 아들로 존재할 줄 아는 인물이며, 상속자가 되기 위해 위험한 여행을 무릅쓸 줄 아는 아들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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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식을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출발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의 과제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실수와 실패의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최고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는 부모가 아니라, 부모라는 직업의 불가능한 성격을알고 있는 부모다. - P87

최악의 부모, 자식들보다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부모는 자식들을 가르칠 의무를 저버리는 부모라기보다는자신의 부족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 ‘말의 계율‘로 자식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고개 숙일 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이 계율을 대신한다고 믿는 어리석은 부모다. 이들은 선생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앎이 하나의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아이에게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이들이 자식들의 삶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말의 계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려 하는 대신 자신이 아이들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 P87

완벽하고 이상적인 모델로서 존재해야 할 의무를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악의 부모는 이상적인 모델이 되겠다고 자식들 앞에나서는 부모다. 부모가 불가능한 것들, 거세의 원리와 스스로의관계를 드러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는가?
어른이 자신의 행동에서 ‘말의 계율‘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자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 P110

우리 시대의 문제는 반대로 새로운 세대를 보살피겠다는 의지의부재에서 비롯된다. 문제는 초월적 쾌락주의의 이데올로기가지나치게 억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신속하게 청산을 원한 모든 교육적 담론의 분해에서 비롯된다. 관점은 다르지만 푸코 역시 이러한 문제를 간파했다. 그는 통제를 담당하던 절대적 ‘타자‘가 약화되면서 완전히 분해되는 지경에 이르러 새로운 세대를 ‘계율‘ 없는 세계에 몰아넣었다고 보았다. - P115

현대인들의 초월적 쾌락주의는 어른의 의무인 교육을 도덕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로 폄하한다. 결과적으로 자유는이제 아무런 제재나 의무감 없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늘어만 가는 의무가 우리의 삶을 집어삼키고, 계율의 부재가 욕망의 창조적 힘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자유는 어떤 만족감도 창출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우울증과 연계될 뿐이다. 우리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서 끊임없이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이다. 그럴 리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우울하다니?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들의 자유가 사실은 감옥일뿐이며 이 감옥이 아무런 미래가 없고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하는 단순한 쾌락의 순환이기 때문이다. - P118

15 (옮긴이) ‘부재하는 성관계‘가 성관계의 실질적 부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캉이 <세미나 20권>에서 중점적으로 다룬 바 있는 ‘성관계의 부재‘는 인간의 성적 쾌락이궁극적으로는 ‘한‘ 사람의 것일 수밖에 없으며 결코 동시에 ‘타자‘의 쾌락일 수 없다는 한계를 뜻한다. 라캉에 따르면 "성관계의 부재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사랑과 성, 사랑의 기호와 쾌락, 기표와 육체 사이에서 드러난다. 사랑이 기호를 선호하는 반면 쾌락은 육체를 선호하고, 여성이 부재하는 ‘타자‘의 기호로서 사랑의 기호를 추구하는 반면, 남성은 ‘타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추구한다. 결국 ‘성관계‘는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 P120

‘한‘ 사람의 쾌락은 결코 동시에 ‘타자‘의 쾌락이 될 수 없다. 이성 간의 만남은 치료할 수없는 불균형에 노출된다. 예를 들어 나는 결코 타자로서의 ‘타자‘에게 도달할 수 없고, 나와 다른 것을 나와 비슷하게 만들 수없다. 나는 이성 간의 차이를 상쇄시킬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성관계를 한다 하더라도, 나의 육체는 스스로의 성적 쾌락만을 즐길 수 있을 뿐 ‘타자‘의 육체를 흡수할 수는 없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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