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는 다 빈치의 아버지가 처음에는 그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두 여인,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다 빈치를 키웠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주장은 프로이트 자신이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축적인 기능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다 빈치가 ‘아버지를 포기하는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창작과 탐구에 대한 그의 비범한 욕구는생겨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 P141

상속자에 대해 다루면서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와 자신의 환자들이 남긴 교훈을 토대로 죽음의 충동에 관해, 다시 말해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즐기려는 경향, 죽을 때까지 즐기려는 욕망에 관해 설명한다. 프로이트는 그러나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금욕의 길을 택하지 않는다. - P144

이것은 프로이트가 《청소년의 심리학》에서 청소년들의 성장 문제는 "아버지로부터의 분리"를 어떻게 현실화하느냐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루었던 문제다" 이 분리가 바로 상속의 가장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지고한 과제다. 정당한 상속은 우리의 존재가 타자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의 사회에 우리를 종속시키는상징적 채무를 인식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 분리를 실현할 수있는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계율을 ‘말의 계율‘로 받아들이는것이다. - P146

오이디푸스의 실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계율 자체를 하나의장애물로 경험하면서 잘못 이해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그의 자유를 계율에 대한 순수한 저항으로 축소시켜버렸고, 결과적으로 욕망의 신화를 모든 한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공식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안티오이디푸스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안티오이디푸스는 계율로부터의 탈출을 원하고, 계율 없이 살기를 원하고, ‘말의 계율‘을 지나간 과거의 일로 일축하면서 ‘한계‘,
‘거세‘, ‘아버지의 이름‘ 같은 개념들을 벗어던지고 싶어 한다. 오이디푸스처럼 그에게도 계율은 하나의 악몽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오이디푸스가 살아가는 곳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로서 존재할 줄 모르고, 자신의 존재의 기원도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의 진실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오이디푸스의 심장이다. - P156

지금부터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네 종류의 아들, 즉 오이디푸스, 안티오이디푸스, 나르키소스, 텔레마코스다.
오이디푸스와 안티오이디푸스는 이미 프로이트 극장에서 주목받은 인물들로, 가장 전형적인 아들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오이디푸스의 시대는 68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197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에 종속된형태의 아들이다. 안티오이디푸스는 아버지와의 불화를 원치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아버지 없이 고아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의 자립 의지는 ‘타자‘와의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그러한 의지는 결국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지는 근친상간적 쾌락을 찬양하게 된다. - P149

나르키소스는 부모와 자식이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닮아가는 현상, 세대의 혼동, 투쟁과분쟁의 부재, 타자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개인적 행복의 찬양을 상징했다. 반면에 텔레마코스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표명하고 있는 불만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열쇠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텔레마코스는 ‘정당한 상속자‘를 상징한다. 그는 아들로 존재할 줄 아는 인물이며, 상속자가 되기 위해 위험한 여행을 무릅쓸 줄 아는 아들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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