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이디푸스라는 용어는1970년대 초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 《안티오이디푸스》가 출간되고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발전한 안티오이디푸스 문화의 시대에 뚜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이 저서는 정신분석학의 이론과 실제에 가해진 가장 강력한 ‘좌파적‘ 비평이었다. 반대로오늘날에는 보수주의적 비평, 즉 ‘우파적‘ 비평이 강세를 보이고있다. - P157

아들 안티오이디푸스는 충동의 비이성적 힘을 일방적으로 찬양한다. 하지만 그는 숙명적으로 이 충동의 힘을 인간은 생동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약간은 파시즘적인 관점 속에 빠뜨린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개념 중 하나인 ES는 아들 안티오이디푸스에게는, 도처에서 모든 한계와 규율을 뛰어넘어 쾌락에 몰두하는 육체의 무정부적 힘의 표현이다. - P160

아들 안티오이디푸스가 ‘말의 계율‘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도처에서 싸고 교미하는 동안, 라캉은 주체를 항상 스스로의 입장에 책임을 져야 할 존재로 지목하면서 욕망의 초월성으로 무엇을 했는지 주체에게 고집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욕망으로 무엇을 했는가? - P161

욕망의 자유로운 유통은 현실을 궁극적 목표로 보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정당한 반발이었지만, 이와 함께 또 하나의 괴물이탄생했다는 것은 아무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이 괴물은 곧 모든 형태의 한계를 거부하는 삶, 아버지와 ‘타자‘로부터 자유로운삶, 즉 정신분열증이라는 이름의 신화다. ‘육체파편‘이라는 이름의 신화, 산산조각 난 체제 없는 육체, 꽉 차있지만 기관 없는육체‘, 오이디푸스적 체제의 천적이자 도처에서 쾌락에 몰두하는 충동적인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육체는 끝내 퇴폐적이고 냉소적인 자본주의 담론의 기계적 유통으로 번역되고 말았다. - P161

니체가 ‘신의 죽음‘을 해방의 소식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새로운 우상(과학만능주의, 이데올로기적광신주의, 무신론,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을 만들어낼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정신분석학의 ‘아들들‘
에게 동일한 욕망의 이론 속에는 욕망의 무한한 유통과 같은 위험, 영토화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힘, 혹은 한계를 끊임없이 넘어서는 일종의 ‘탈출 경로‘와 같은 방심할 수 없는 위험이 존재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 P163

아버지가 증발한 시대는 어른이 증발한 시대다. 자식들의나르시시즘은 전적으로 어른들의 나르시시즘에 좌우된다. 부모가 자식들의 무료한 행복을 교육적 투자의 평가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런 식으로 욕망의 전수와 그것이 요구하는 주체적 참여라는 기준을 무시한다면, 부모의 교육 행위는 자식들의 변덕을지지하는 입장 속에서 숙명적으로 증발할 수밖에 없다. 부모는그런 식으로 한계를 몸소 보여줘야 한다는 괴로운 의무감에서 벗어나지만, 자식들은 어떤 한계도 극복하지 못하는 나르시시즘 속으로 더 깊숙이 빠져든다. - P165

만약 죄ㅡ라캉의 입장에서 ‘죄‘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는 유일한 죄ㅡ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욕망이 수반하는 고유의 책임감을 내던지는 것이라면, 아들 나르키소스가 무죄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욕망의 법칙을스스로 실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법칙이 주체의 무의식속에 전혀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주체에게 욕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보이기 때문이다. - P167

문제는 한계와 부족함의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 즉 ‘모든‘ 것을 뜻하는 판Pan 신화에 대한 집착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 나르키소스의 운명이다.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거세의 상징적 상처를 피한, 영원히 생동하는 자신의 이미지로부터 분리되지 않는존재다. - P170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이디푸스보다 텔레마코스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젊은 세대는 어른들이 아버지답게 행동하기를, 누군가가 바다로부터 돌아오기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세계관을 가져다줄 새로운 계율이 도래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 P173

아버지의 부재는 그 자체로는 트라우마가 되지못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부재가 어머니의 말을 통해 어떻게 해석되고 상징적으로 전달되느냐에 달렸다. - P174

자신이 오디세우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녀는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의 부재에 인간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린다. 그녀의 밤샘이 ‘아버지의 이름‘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셈이다.
부재하는 오디세우스를 하나의 ‘부재하는 실체‘로, 부재하되 가까이 있는 존재로 만들면서 그녀는 텔레마코스에게 상속의 의미를 고스란히 전수한다. - P175

오이디푸스의 경우 법은 욕망의 차단을 의미하고 법을 상징하는 아버지의 존재는 길을 가다 우연히만난 원수에 불과했지만, 텔레마코스에게 법은 치명적 쾌락의파괴적 혼돈을 거세와 욕망의 경험이라는 절대적인 필요성으로바꿀 수 있는 희망을 의미한다. - P179

오디세우스는 존재를 재구성하는 대신 사랑하는 대상의 대체할수 없는 힘과 절대적인 비교 불가능성, 스스로의 욕망을 향한 믿음의 힘을 보여준다. 그는 영원불멸성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여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P184

오히려 그가 자신의 욕망에 답하기 위해, 페넬로페를 품에안기 위해, 아들을 만나기 위해, ‘말의 계율‘을 자신의 왕국에 되돌려주기 위해 귀환을 결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도덕적으로 보편적인 가치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살 만한 것으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들이다. - P184

아브라함과 오디세우스의 공통분모는 아들을 향한 사랑이다. 이들의 결정을 생생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이 밑도 끝도없는 사랑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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