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존재의 시작과 끝에서 울려퍼지며,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무화‘에 대한 염려가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다.

누구나 ‘무화‘하고 싶지 않다. ‘나‘의 존재 의미를 뚜렷한 건축물로 세우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게나 빨리.


그의 탄생보다 앞선다. 이처럼 한 인간의 존재 안에는 이미 그의 부모, 부모의 부모 등 존재의 메아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메아리들 중 어떠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는 비로소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메아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거"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근거는 인간 현존재가 선택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근거들이 그를 구성하며 이 근거에 대하여 그는 무력하다. - P105

인간 현존재는 탄생 이전의 존재의 메아리와 죽음으로부터 들려오는 조종의 메아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며 그의 존재 안에는 항상 이러한 "무"의 메아리가 맴돌고 있는 것이다. - P106

이렇게 두 "끝"으로부터 들려오는 "무"의 메아리가 인간 현존재를 불안하게 하며 이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SZ., 285쪽) - P1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데거의 생각은 상당히 상식적이다. ‘나‘가 본래적 현존재가 되고 ‘타자(공동 현존재)‘ 또한 본래성을 획득한 세계는 조화로운 곳이 된다는 말이므로..

반면

감정이입을 통한 타자의 이해를 ‘존재론적 제국주의‘라고 일갈하는 레비나스의 생각은 신선하다 못해 섬뜩하다. 그것은 절망적인 죽음과 맞닥뜨린 자만이 길어올릴 수 있는 생각 같다. 존재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이 길어올릴 수 있는 깨달음의 생명수 아니었을까?

인간은 경쟁하고, 타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순간 타자는 이해할 수 없고, 죽이고 싶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 죽이고 싶도록 이해 불가능한 타자의 타자성이야말로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되지 않는가?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남을 그저 있는 그대로,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는 그 고통스런 절망 끝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왜, 그들은 나의 가족을 죽였을까?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남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 않을까?

나는 내게 묻는다. 내 안에 신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나 말고 저 많은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신성을 지닌 존재들인가? 그들을 신처럼 대해야 하는가?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을 조건 없이 믿을 수 있나? 그들 역시 내 안의 선하고자 하는 의도를 조건없이 믿을 수 있을까?

그건 참 이루어지기 어려운 경지일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타자를 영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의식적이지 않게 그냥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면, 참 좋겠다.

그 순간 너와 나는 서로를 믿고 일상적 존재하기를 넘어서 서로의 눈을 보게 될 테고, 함께 행복에 충만하게 될 텐데..

레비나스의 생각을 좀 더 따라가며 알아 보자.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상흔에서 벗어난 그의 사유의 도정을 더 따라가 보자.













결론적으로 하이데거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① 비본래적인현존재들 사이의 관계, 
② 본래적인 현존재와 비본래적인 현존재사이의 관계, 
③ 본래적인 현존재들 사이의 관계

로 구분하고 있다. 이중③의 경우를 가장 바람직한 관계로 평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현존재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본래성)를 찾아가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나"(인간 현존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나"인 타자(공동 현존재)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비판은 하이데거에 대한 오해나 부정확한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P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경우에도 우리는 타자를 "나"와 비슷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셈이다. 즉 타자는 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타자를 이해하고 있는 서구 철학을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며, 여기에 후설과 하이데거 철학을 포함시킨다. 후설이나 하이데거 모두 타자를 주체와동일한 자로 여김으로써 타자의 타자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 P93

그러나 타자가 나와 다르다는 점이 타자를 죽여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타자 역시고귀하고 소중한 그 자신의 "나"라는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를 경쟁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의 타자성을 인정할 때, 타자는 "나"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하며 나는 타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레비나스는 물질적 욕구와 달리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부른다. 형이상학적 욕망을 통해
"나"는 "나" 안에 갇혀 있던 자신의 존재로부터 타자를 향해 떠날 수있는 것이다. - P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나 욕구를 통해 물질적 대상들에게 몰입하지만 대상들은 인간의 욕구 뒤로 물러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물질을 향유하려는 인간은 고독한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통해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의 일상의 욕구로부터 물러서서 또 다른 자신을 향하게된다. 이때 인간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빛과는 또 다른 빛의세계에 들어선다. - P87

왜냐하면 레비나스의 초월은 물질적 대상들(하이데거의 존재자들)로 가득 찬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이념이나 관념의 세계, 또는 종교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초월을 통해 현실 세계를 다시 돌아보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현실 세계로부터 초월 세계로 넘어가야 하지만, 초월 세계를 통해 현실 세계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 P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은 하이데거의 "던져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의 현사실성을 의미하는 것과 달리, 레비나스의 "실체화한 인간"은 이미 세계와 타자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던져 나감(기투성이란 표현은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세계를 기획하고 결단하는 실존성이란 의미를 지니는 반면, 레비나스에게 기투성은 실체화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떠나 타자를 향해 초월을 감행하는 것을 뜻한다. - P82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하이데거 이후 우리는 세계를 도구들의 집합으로 보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지못한 것은 세계는 도구들의 체계를 이루기 전에 먹거리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이다"(시간」, 64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아남거나 도망치는 자가 한 명도 없을 때까지 그들을 쳐 죽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