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의 단순한 기도
마르틴 루터 지음, 김기석 옮김, 노종문 해설 / IVP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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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교회의 첫 시작을 알린 사람이자 종교개혁을 통해 서양 역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마르틴 루터'.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아마 오늘날 알고 있는 역사와 종교는 크게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역사나 종교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어도 그의 신학이나 종교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 교회 대부분이 칼뱅의 교리를 따르거나 기타 다른 개신교 학자들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루터의 교리는 꽤 생소하다. (한국에서 마르틴 루터의 교리를 따르는 '루터교'는 다른 개신교회들에 비해 소수인 편이다).

더욱이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나에게 있어서도 마르틴 루터는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지, 종교적으로는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순수한 호기심으로 종교인으로서의 루터를 알고자 본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일단 이 책은 매우 얇다.

또한 교리와 관련된 책이 아니라, 루터가 본인의 신자(정확히는 이발사 친구)에게 권면한 기도방식을 간략하게 적어놓은 '소책자'에 가깝기 때문에 본 책을 읽었다고 해서 루터의 종교관을 완전하게 알 순 없었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단순한 기도 방법론을 떠나서 기독교에 대한 루터의 기본적인 관점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기존의 권위적이고 관례와 형식을 따지던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단순하지만, 진심 어린 '기도'를 중시했던 루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가 책에서 제시한 기도문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마음'과 '간구(호소)'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기도나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여 간구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화려한 장식이나 예물, 기타 성대한 종교적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개인이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이 곧 구원의 증거이자 기독교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루터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으로도 충분히 기도를 할 수 있다며 차례대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려준다.


여기서 놀라웠던 점은 루터가 자신이 알려 준 이 기도를 굳이 그대로 외우지 말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위의 기도문으로 인해 마음이 뜨거워진다면 언제든 자기 방식으로 기도해도 된다고 했던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사이비 이단같이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기도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루터는 크게 '교훈'과 '감사', 그리고 '고백', 마지막으로 '기도'의 방식으로 기도한다고 말한다. 십계명을 예시로 보이는 루터의 기도는 오늘날 21세기의 '감사 일기'처럼 보였다. 즉,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서 깨달은 점을 적고, 그다음에 그 말씀에서 선함과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인간을 포함해 세상) 등등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적고서, 뒤이어 자신은 이전에 어떤 행동으로 그 말씀을 어겼었는지, 마지막으로 이 모든 걸 종합해서 기도로 승화시키는데,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 감사 일기와도 형식이 비슷해 비신자인 나도 왠지 모르게 배울 점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정해진 규칙이 아닌 개개인의 기도 자유를 주장했다는 점 역시 대단했다.


그 외에도 '기도'란 천국을 위한 담보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해 구원의 절박함을 간구하는 행위라는 주장도 그의 종교 사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기도는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거기엔 어떤 다른 허례허식 같은 것은 낄 수 없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도 루터는 '마음'과 '간구' 외에도 '변화'와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오직 성경과 믿음,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이 주장은 훗날 개신교회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렇듯 <마르틴 루터의 단순한 기도>는 다는 아니지만 루터의 종교적 사상과 기도 정신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도 루터의 인간적/시대적 한계 또한 볼 수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무슬림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이 세상은 끔찍하고 악마들의 소굴이라는 비관적인 생각, 인간이 다른 모든 생명체 위에 서 있다는 주장, 그리고 개혁적이고 자유를 인정하긴 하지만 기존 체제(왕과 제후들)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 아버지가 아내와 아이들을 교육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면모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루터 역시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시대적으로도 저 때 당시에는 위와 같은 생각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루터도 시대적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아쉬우면서도 씁쓸하기도 하다.


여하튼, 루터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분이나 기도와 묵상법과 관련된 책을 읽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해 드리고 싶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는 가련하고 무익한 죄인입니다. 저는 감히 주님을 우러르거나 손을 들어 올려 기도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기도하라 이르셨고, 기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아들 예술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구해야 할지 가르치셨기에, 저는 은혜로운 약속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대로 모든 성자와 이 땅의 믿는 이들과 더불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P14

주님,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자제시켜 주십시오. - P15

마지막으로, 늘 확신을 가지고 ‘아멘!‘하고 응답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자비하심으로 그대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그렇다‘라고 응답하심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홀로 무릎을 꿇고 있거나 서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모든 기독교 세계와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대 곁에 서 있고, 그대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공통의 간구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래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셨어, 나는 이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은 채 기도로부터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것이 아멘의 의미입니다. - P21

그대의 마음이 바르게 뜨거워지고 기도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하다면, 이런 생각들은 여러 다른 방식으로 많은 말로든 적은 말로든 표현될 것입니다. - P22

나는 스스로를 그런 말이나 구문에 묶어 두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은 이런 방식, 내일은 다른 방식으로, 나의 기분이니 느낌에 따라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동일한 생각과 표상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의 간구 속에 담긴 다양한 생각들에 빠져 다른 여섯 가지 간구를 놓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좋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면 다른 간구들을 잠시 미뤄 두는 것이 좋습니다. - P22

좋은 기도를 드리려면 집중과 마음의 단순함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 P25

내 마음이 다른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에 대한 신뢰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됩니다. 부, 명예, 지혜, 권력, 경건, 다른 무엇도 마찬가지입니다. - P27

잘하든 못하든 마음이 온전히 집중되면, 혀로 열 시간 암송하거나 열흘간 글로 적는 것보다 한순간 더 많은 것을 숙고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 P41

루터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것‘을 목표로 기도했던 중세의 신비주의적 기도 전통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성경적 개념에 기초한 간구 기도의 전통을 재발견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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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 현대지성 클래식 4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우섭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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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오늘 소개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어째서 위대한 작가라 불리는지, 그리고 단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장편소설 못지않은 강렬한 울림을 독자들에게 주는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아마 사람들은 지금까지 느꼈던 톨스토이와는 전혀 다른 톨스토이, 즉 잔소리나 해대는 교훈소설 작가가 아닌 '대문호 톨스토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저자 소개부터 하겠다. 저자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o Tolstoy,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정치, 종교적 사상가이다. 우리에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 사이에선 톨스토이를 문학가라기보다는 교훈적인 단편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대문호'인 만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부활> 등등 걸출한 작품으로도 외국에선 유명한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 러시아 '야스나야 폴라냐'라는 곳에서 부유한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톨스토이는 친척 네 집에서 살았다. 위인이라는 점에서 뭔가 어렸을 때부터 바른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에 많은 방황을 겪었다. 1844년에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도중에 중퇴를 하고 고향 영지에서 농노들을 위한 개선 사업을 펼치기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거기다 장교 시절에는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리거나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고,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던 1851년에 톨스토이는 형을 따라 포병 장교로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이날의 경험으로 <유년 시절>이라는 작품을 썼고, 문인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아 본격적인 톨스토이의 작가 생활의 첫 신호탄을 날린다. 이후로도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진정한 삶의 의미와 종교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간을 겪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 그리고 사상가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 소개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중에서도 엄청난 수작으로 알려진 작품이자 작가인 톨스토이가 한평생 죽음과 삶의 고통을 바라보며 느꼈던 모든 것들이 들어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작품은 주인공인 법원 위원이자 검사였던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식을 일리치의 직장 동료들이 듣게 되는데, 그들의 친구의 부고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비게 되는 위원의 공석 자리를 누가누가 차지할까 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중 한 명인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조문을 위해 일리치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데, 집안 분위기도 직장 못지않게 모든 것이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일리치의 아내는 장례식을 할 비용 걱정과 정부로부터 더 많은 조의금을 받기 위해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부탁을 하는 등 남편의 죽음 자체에 슬퍼하는 게 아닌 앞으로 살아갈 자기 자신의 처지에 절망해한다. 일리치의 딸과 그 사위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죽음에 뭔가 성가셔하는 분위기였고, 주변 사람들 역시 일리치의 죽음에 겉으로만 슬퍼할 뿐 저마다 자기들 생각하기 바쁘다. 특히 사람들의 가장 큰 안심 거리는 바로 죽은 게 자기가 아니라 일리치라는 사실이었다. 본인은 절대 죽을 리 없다는 안심, 자기는 죽음과 멀리 있다는 착각. 흔히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말할 때 드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중간에 작품은 친구 표도르 이바노비치의 시점에서 사망한 이반 일리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바뀐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액자 구성처럼 전개해나가는 방식을 통해 그가 어떻게 사망했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는 영웅도, 그렇다고 어떤 특출난 사람도 아닌, 우리처럼 평범한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회가 주어진 길을 따라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의 길, 법조인의 삶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 그의 인생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흘러갔으며 사랑하는 여인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 등 평범한 생활을 유지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이사한 집의 리모델링을 감독하던 중 이반 일리치는 그만 옆구리에 작은 상처를 내고 만다. 처음에는 잠깐 아팠다가 말았기 때문에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으나 점차 그 옆구리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 이반 일리치는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흔히 중병에 걸렸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첫 번째로 병을 부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리치는 아프면 아플수록 착각일 거다, 일에 집중하면 안 그러겠지, 하며 더욱 일상생활에 몰입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윽고 의사를 찾아간 그였으나 의사는 약과 처방을 내릴 뿐 '아픈 이반 일리치' 그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면 된다는 말과 함께 냉랭하게 그를 대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 채 점점 병이 더 심해지자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지만, 가족들은 위안은커녕 병으로 신경질적이게 된 그를 뒤에서 원망하며 제대로 된 위완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일리치에게 별것 아닌 병이라며, 착한 거짓말을 하지만 이는 일리치의 가슴에 상처를 깊게 남기는 꼴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일리치 자신도 인정하긴 싫었지만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리치가 느끼는 감정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멀쩡한 사람도 비참해질 때가 있으니, 바로 아플 때다. 아플 때만큼은 건장한 사람도 병의 심각성을 떠나 심적으로 매우 힘들어하는 게 대다수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하는 것부터 시작해 괜히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것까지, 특히나 죽음을 앞둔 이들에겐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내일이라는 삶을 향해 달려나가는 사실이 부럽고, 문뜩 자기만 혼자 이러고 있다는 것에 엄청난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마찬가지로 이반 일리치는 생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과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느낀다. 누군가 자기를 위해 울어주고, 안아주고, 아이처럼 어루만져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혼자 눈물을 흘리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다른 의미에서 무척이나 슬펐다.


가족도, 친척도, 직장 동료들 모두 죽음 앞에 선 이반 일리치에게 어떠한 위안을 주지 못한다. 사실 이것들 모두는 일리치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신경 쓰고, 늘 좇았던 것들이다. 생전에 그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며 살았지만 정작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서야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모두 헛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를 위로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농노인 '게라심'이다. 그는 농부 겸 하인이었기 때문에 일리치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끝까지 그의 병수발을 들어준다. 심지어 화장실 수발도 들어 준 게라심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리치에게 죽음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고 성실하게, 솔직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일리치를 배려해 준다. 고통으로 울부짖던 일리치도 게라심이 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게라심 외에도 일리치의 어린 막내아들도 아버지인 그를 가엾게 여긴다. 게라심이 이웃에 대한 '사람'을 보였다면, 막내아들은 '연민'을 보여준다. 어떠한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 막내아들은 죽음이 코앞에까지 와서 '아-! 아-! 아-!'하며 울부짖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입을 맞춘다. 이때 죽기 싫어 몸부림치던 일리치는 순간 아들의 눈물과 입맞춤에 정신을 차리게 되고, 비록 내 삶이 헛되었을지언정 사랑과 연민 앞에선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일리치는 마지막 순간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사망하면서 이야기를 끝이 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외에도 본 책에는 <주인과 일꾼>, <세 죽음> 이렇게 두 작품 또한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주인과 일꾼>은 앞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편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연민을 다루고 있다. 속물적 상인인 '바실리'와 그의 농노인 '니키타'가 어느 눈 폭풍이 날리던 날에 길을 나섰다가 그 속에 갇혀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을 다룬 이 작품은 파멸이라 느껴지는 죽음이 어떻게 부활로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작중에서 바실리는 금전적 이익과 냉정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반대인 니키타를 은근히 무시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한다. 그러나 니키타는 이런 부당함에 꾹 참고 바실리를 끝까지 보필하는데, 심지어 바실리가 그를 버리고 눈 폭풍 속에서 말을 타고 가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기적인 바 실리였지만 결국엔 눈 폭풍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역시 니키타처럼 그저 죽음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이른다. 그때 문뜩 바실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니키타가 추위에 떨고 있다. 그를 덮어주고 내 온기를 나눠주자'. 곧 죽으리라는 두려움에 떨었던 바 실리였건만, 니키타를 안으면서 체온을 나눠주자 순간 죽음의 두려움이 싹 가신다. 이윽고 바실리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 남을 향한 사랑은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세 죽음>은 이전 작들에 비해 초기 작품이다.

귀부인과 마부, 그리고 나무의 죽음을 다룬 이 작품은 성찰보다는 죽음에 대한 단조로운 묘사가 특징이지만 그만큼 죽음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이를 대하는 자세에 따라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비롯해 세 작품 모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지성 클래식의 또 다른 톨스토이 관련 책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삶에서 느껴야 할 사랑과 교훈적인 부분이 주된 내용으로 다뤄졌다면, 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생명 대신 죽음으로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단편 작품들 중에서 본 작품들만큼 진지하고 차분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지하다고 해서 마냥 '엄근진'한 작품은 아니다. 성찰은 사소한 일에서도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평범성 안에서 그러한 성찰이 필요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작품으로 깊은 성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튼,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깊은 성찰을 보고 싶은 분들, 그리고 앞으로 내게도 올 수 있는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고 싶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실용적인 값은 물론 번역의 품질 또한 우수해서 최신판 톨스토이 단편 작품들을 접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도 역시 추천드린다!


(본 서평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자기(게라심)는 바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도 그런 때가 왔을 때 누구든 자기를 위해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이 힘들지 않다는 뜻을 담아 말했다. - P67

아무도 이반 일리치가 원하는 만큼 자기를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가 가장 원했던 것은-그 점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웠지만-누구라도 자기를 병든 아이처럼 가련하게 여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에게 입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길 원했다. - P67

이반 일리치는 울고 싶었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길 원했다. - P67

최근에 소파 등받이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누워 있을 때의 그 외로움, 북적거리는 도시와 수많은 지인, 그리고 가족들 한가운데서 느끼는 외로움, 바다 밑에도, 땅속에도 그 외로움보다 더 큰 외로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 P82

그날 식사로 나왔던 삶은 자두를 생각하다 보면, 어린 시절 쭈글쭈글한 프렌치 날자두가 떠올랐다. 그독특한 맛과 씨앗에 닿을 때 입안 가득 고인 침을 떠올렸고, 이 맛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 시절 일련의 기억이 함께 이어졌다. 보모, 형, 장난감... - P83

보이지 않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욱여넣은 검은 자루 속에서 그는 몸부림쳤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형리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듯 그렇게 기를 썼다. - P89

그에게 자기가 니키타고 니키타가 자기이며, 자기 생명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니키타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청각을 집중하고 니키타의 숨소리를, 심지어 코 고는 소리까지 듣는다. ‘살아 있구나, 니키타. 그것은 나도 살아 있다는 뜻이야‘ 그는 환희에 젖어 속으로 말한다. - P162

사람들 머릿속에 그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인사이동과 직무상 변화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것과 별개로, 그 부음을 들은 사람들은, 가까운 지인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늘 그렇듯, 죽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 죽은 건 그 사람(일리치)이지, 내가 아니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그는 혈기왕성했고 가벼운 유흥을 좇는 성향이 있었음에도, 업무에 임해서는 침착하고 사무적이며, 심지어 엄격했다. 그러나 사회생활 면에서는 종종 장난기 많고, 재치 있으며, 한 가족처럼 왕래하던 지사와 지사 부인이 말하듯, ‘언제나 선량하고 점잖은 호인‘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 불편함이 점점 심해지더니, 아직 통증이랄 건 아니지만, 옆구리에 늘 묵직한 느낌이 자리 잡았고 기분 나쁜 상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불편한 느낌은 점점 커져서 일리치 가정에 힘겹게 찾아왔던 안락하고 품위 있는 삶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체면지레만 어렵사리 유지되었다.

보이지 않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욱여넣은 검은 자루 속에서 그는 몸부림쳤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형리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듯 그렇게 기를 썼다. 그가 죽기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바로 그 시각 아들이 조용히 아버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죽어가는 자는 여전히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양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의 한쪽 손이 아들의 머리 위에 닿았다. 아들은 그 손을 붙들어 입술에 대고 울기 시작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 손에 입 맞추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들고 아들을 보았다. 그는 아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는 아내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그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있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는 눈으로 아내에게 아들을 가리키고 말했다.

"데리고 나가... 미안해.... 그리고 당신에게도.... 미안해.... 날 용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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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펭귄클래식 1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조혜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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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칭 도스토옙스키 광팬인 나는 예전에도 열린 책들 판으로도 읽은 적이 있다. 뭔가 살면서 비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찾는 것 같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우수로 괴로웠던 때에 문뜩 이 작품이 떠올랐고, 다른 판본으로 새롭게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고전 문학 작품이란 으레 그러듯이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도 많이 소개해서 이제는 입이 달아질 것 같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 소개부터 하겠다. 저자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는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가난한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환상적인 옛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청년이 되어 군인이 되고자 공병학교로 들어간 도스토옙스키였으나 워낙 소심했던지라 잘 적응하지 못했고, 거의 책만 읽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후에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1년이 못되어 그만두고 만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겐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1846년에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문단에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그는 이어서 다른 작품도 출간하지만 예전에 비해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모임에서 활동하던 게 정부 당국에게 들켜 체포되고 만다. 거기서 사형 선고를 받은 도스토옙스키였지만 다행히 황제의 특별 사면으로 강제 노역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등지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그때의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이전에 그는 공상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형생활 이후로부터는 인간 심리와 영혼, 그리고 종교적 영혼에 대해 심취하여 오늘날의 위대한 문호 도스토옙스키로 변모하게 된다.

오늘 소개할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런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변화의 첫 신호탄을 알린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지하로부터의 수기> 첫 문장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좁고 어두운 지하에서 몇 십 년 동안 살고 있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병자'이자 '악인'이라 정의 짓는 순간이 말이다. 이 구절은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져있던 독자에게 있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준다. 말했다시피 주인공인 '지하생활자'는 지하에서 꽤나 오랫동안 홀로 살아온 인물이다. 주인공은 친척이 엄청난 유산을 자신에게 물려주고 죽어버리자 일하던 곳을 때려치우고 지하실에 틀어박혀 약 20년 가까이 살아갔다. 현재 그의 나이는 40세. 그렇게 살아가던 주인공은 문뜩 펜을 들고 수기를 작성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등장한 이 수기의 1부에선 주인공의 독백 내지 혼잣말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무슨 연극처럼 멋지게 하는 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혼란스러운 말투로 독백을 하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다. 지하생활자는 인간은 정녕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본인이 생각하는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천국을 지상에서 만들 수 있는가 대해 시종일관 비웃음을 날린다. 1부의 주요 주제라 할 수 있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그는 인간은 결코 이성적일 수 없으며, 이성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즉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게 설령 2×2=4라는 절대적 진리 앞에서일지라도 사람은 언제든 자기 맘대로 2×2=5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안다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도저히 이건 아닌데 싶은 것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본다. 가령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거나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이성의 눈으론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것들을 믿는 자들을 보면 어이가 없지만, 막상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곧 진리이다. 이렇듯 이성보다 비이성적인 것들이 훨씬 인간을 지배하기 쉽다는 것이다.

해당 작품이 쓰였던 시기의 러시아엔 사회주의 사상이 한창 러시아를 휩쓸고 있던 때였다.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고 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품에선 이성을 앞세워 이상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 주요 주제로 나오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 속 지하생활자의 입을 통해 그것은 거짓이라고 폭로한다. 이성으로 유토피아(수정궁)를 세운다고 한들, 그게 진정 인간 삶의 목적이라 할 수 없음을, 인간에겐 이성보다 더 깊은 목적이 있음을 말이다.


그럼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란 무엇일까? 지하생활자의 말이 워낙 역설적이라 완전히 믿을 순 없으나, 그건 바로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여기선 목적도 사라진다. 인간은 이성이나 어떠한 목적(유토피아)보다는 삶을 갈망한다. 그리고 이성으로 인간의 절대적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인간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폭주할 것이며, 틀에 박힌 이성적인 삶에 답답함을 느껴 '나는 인간이지, 피아노 오르간의 나사못 한 짝이 아니다!'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할 것이라는 거다. 현재의 삶보다 이상적인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인간을 저마다 개성 있는 존재(개인)로 보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단지 기계의 부품 중 한 개라 생각하는 것. 도스토옙스키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한 인물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인 지하생활자가 이렇게 사회주의, 이성주의 사상을 비난하는 행위가 어떤 통찰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지하생활자도 한때 이런 이상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으며, 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이상과 삶 사이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지하생활자의 비웃음은 멀리 떨어진 제3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셈이다.

1부가 끝나고 2부인 '진눈깨비에 관한 이야기'는 주인공인 지하생활자의 과거를 다루고 있다. 약 20년 전, 그가 20대 청년이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을 다룬 것으로, 여기서 그는 신경질적인 이상주의자로 등장한다. 비록 1부와 마찬가지로 음침하고 신경질적인 주인공이지만 1840년대 '낭만주의적 사상'에 취해있었던지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에도 소설 속 일처럼 장대하고 웅대한 사건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 주인공은 늘상 현실에 의해 이리저리 치이고, 역시나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무시당한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주인공은 곧 다른 대안거리를 찾는데, 바로 지식(사상)에 대한 우월감이었다. 저들은 무식하지만 자기는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허영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는 여전히 한낱 하급 관리이자 가난에 찌들고 자존감 낮은, 음침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날도 장교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옛 동창들에게도 무시당한 주인공은 우연히 창녀 '리자'를 만난다. 비참한 자신의 심정을 만회하고팠던 주인공은 순간 어떤 생각을 떠올린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자로 생각하게끔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말로 리자에게 창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지만, 그 희망을 품고 주인공의 집을 다시 방문한 리자는 주인공의 본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사실 리자와 첫 만남 이후 이상적으로 꾸민 자신의 모습은 거짓임을 뼈저리게 느낀 주인공이 그녀에게 모든 걸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공이 내뱉는 절규는 현실에서 무시당한 채 '이상'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 하나만을 붙든 채 살아온 '상처받은 인간'의 슬픔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주인공인 지하생활자처럼 현실에 무시당하고 그러한 삶(현실적인 삶)에서 유리된 채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은 심연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 21세기에서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떳떳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했달까.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했기 때문에 보복심에 찌들어 가상공간에서라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되려 약자들을 괴롭혀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자기의 괴로움을 해소하는 행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에겐 위대한 사상과 지식이 있다며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상대를 윽박지르거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 역시 지하생활자의 고백처럼 결국 허영심과 찌질한 자존심,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항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그저 찌질한 히키코모리에 대한 소설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비록 주인공이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단면일 뿐, 독자인 우리는 거기에서 어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하생활자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적인 의미보다는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지만 옳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살면서 누구나 지하생활자와 비슷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이상에 따라 살고자 했으나 현실의 벽에 마주쳐 절망하고 비관적이었을 때를 말이다. 고전의 묘미는 자신의 정신적 성장에 따라, 즉 성숙함에 따라 보는 맛이 다르다는 거다.(마치 어른이 되면서 '아기공룡의 둘리' 속 '고길동' 아저씨와 '네모바지 스폰지밥' 속 '징징이'의 심정이 점차 이해가 가듯이.. ㅠ) 작품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살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소한 인생의 진리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도 인간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인간의 삶에 대한 갈망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어느 날 내 처지가 비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시는 분, <가난한 사람들> 이후로 도스토옙스키의 변화된 세계관을 알고 싶은 분 등등에게 추천드린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인간이 고의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해롭고 어리석고 심지어 가장 어리석은 것을 바라는 단 한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가장 어리석은 것을 바랄 수 있는 권리와 단 하나의 현명한 것을 바라는 의무와 관계 맺지 않겠다는 권리를 확보하려는 경우다.
인간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이성과 이익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 경우에 이성을 갖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일부러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인간의 일은 실제로,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나는 인간이지 오르간의 나사못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상태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 본연의 신체와 피를 가진 인간에 대해서조차 번거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 없는 보편적인 인간이 되는 기회를 엿본다. 우리는 곧 어떻게든 사상으로부터 태어나기를 꿈꾼다. 그들은 사상 등을 불어넣는 그런 필수적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깊은 감동을 주는 사물들에는 흥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난 나도 모르게 그들을 나보다 더 낮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힘, 힘이 내게 필요했어. 연기가 필요했어. 네 눈물을 얻어야 했지. 내가 모욕 받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이 그 당시에 내게 필요했던 거야! 사람들이 날 무시했어. 그렇게 나도 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었지. 사람들이 날 걸레 취급했지. 그래서 난 힘을 보여 주고 싶었어.....

사람들은 나에게 주지 않아....... 난 될 수 없었어....... 선량한 사람이!

일부러 반 주인공의 모든 특성들을 모아 놓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이 너무나 불쾌한 인상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삶과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무나 유리되어 있어서 진정으로 ‘실제의 삶‘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떠올릴 때 참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과 서비스로 간주하기 때문에 책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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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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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제인 에어>와 마찬가지로 내가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다.

비록 그때는 아주 어렸을 때라 자세한 사정 같은 건 모르고 그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미친 듯한 사랑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 절절한 로맨스 소설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봄으로써 새로운 인상을 받았기에 이번엔 <폭풍의 언덕>도 재독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달 전에도 다시 읽긴 했으나,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집중해서 읽지 못해 흐지부지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다시 한번 읽어 본 <폭풍의 언덕>은 마찬가지로 새로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중에서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를 다시 보게 되었다. 흔히 이 둘의 사랑을 '광적인 사랑', '비정상적인 사랑', 아니면 제목에 걸맞은 '폭풍 같은 사랑'이라고들 말한다. 맞다. 지금 봐도 이들의 사랑은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미친 듯이 갈망하는 자기 파괴적인 사랑. 환상을 심어주는 여느 로맨스 소설과 확연히 다른 것이 바로 이 <폭풍의 언덕>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어 본 내게 있어 이 소설은, 아니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 이야기는 위와 같이 미친 사랑으로서 끝나기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따라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두 사람의 사랑은 환상을 떠나 '자기애적인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애적인 사랑'은 다른 말로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뜻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을 자기 자신으로 생각해 극단적으로 서로 하나 됨을 추구하는 사랑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아무리 상대방을 사랑하더라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 자신을 상대방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그렇게 생각한다. 작중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생각할 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바로 '나는 나, 너도 나!'이다. 즉, 나도 나지만 상대방 또한 나와 같을 거라는 식의 뉘앙스이다(무엇보다 작중에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대화에는 항상 '나'라는 단어가 나오며, 이탤릭 체로 강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린턴을 대할 때가 그렇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모두 우아하고 고상한 삶을 살아가는, 당시 평범한 사람에 해당하는 린턴에게 '네가 과연 우리의 정신을 당해낼 수 있을까?'라며 그는 자기네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주 비웃는다. 그리고 사랑에서도 린턴은 자기가 캐서린/히스클리프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할 줄 모를 거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두 사람은 자기들의 관계에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똑같은 생각과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도 이해 못 할 자기에 대한 끌림을 느끼고 있음을(우리는 하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쏠려 있다며 이기적이고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지만, 이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함정에 빠진 꼴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 자기애란 곧 상대방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캐서린=히스클리프 / 히스클리프=캐서린>과 같은 구조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애는 그들의 사랑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다. 물론 위와 같은 구조는 정상이 아니며, 이로 인해 결국 둘의 사랑이 파국에 치닫게 되었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결과를 떠나 꽤나 정상적이라고 생각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두 사람은 왜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걸까?

왜 작가는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었을까?

왜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제인 에어>의 작가가 에밀리의 언니인 '샬럿 브론테'이다) 충분히 정상적인 로맨스 소설을 지을 수 있었음에도 폭풍같이 격렬하고 자기들만의 세상과 자기애를 고집하는, 그런 독특한 로맨스 소설을 만들었을까?

목적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작가인 에밀리 브론테가 어쩌면 로맨스 소설이라는 틀을 깨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세계관을 관철하기 위해 이 작품을 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폭풍의 언덕>은 로맨스 소설 쪽으로 분류되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렇게 로맨스 소설답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사랑의 태도에서는 '로맨스'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자기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을 고려하는 예의 바른 모습 따윈 전혀 없어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된다.

여기서 1차로 로맨스 소설적 환상이 깨진다.

한쪽이 고개를 숙이는 일 없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동일한 감정'에 호소하며 고집을 피우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랑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이, 결투를 벌이듯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한번쯤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한다. 온갖 학대와 거친 환경에서 자라온 히스클리프와, 제멋대로이고 자기중심적인 캐서린이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또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요즘 로맨스 판타지물이라고 해서 웹툰이나 웹소설 등등에서 자주 보이는 설정이 있다. 바로 '폭군 길들이기'와 같은 식의 설정이다. 잔인하고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 우연히 성실한 여주와 만나 갱생한다는 설정인데, 이때 사랑에 빠진 남주는 다른 사람에겐 거칠게 대하더라도 여주에게만큼은 친절하게 대한다. 여기서 감정을 이입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한테만 예외로 다정하다는 것에 대한 로맨스 적 쾌감을 느끼며 남주를 오직 자기만이 다룰 수 있다는 특별함에 열광한다. 그런데 <폭풍의 언덕>에서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사랑을 함으로써 갱생은 물론,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원칙에서 상대방을 제외하는 법이 없다. 특히 히스클리프 같은 경우 캐서린이 해당 가문에 속해있음에도 언쇼 가문과 린턴 가문에 복수를 멈추지 않고 그들 모두를 멸망시킨다. 그리고 캐서린의 정신에 혼란을 줘서 결국엔 병에 걸리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당연히 히스클리프는 이런 것에 1도 상관하지 않고 오직 캐서린만을 바란다 ㄷㄷ).


그중에서 직접적으로 로맨스 소설의 환상을 산산이 깨는 부분은 작중에 히스클리프가 이사벨라에 대해 말할 때이다. 이사벨라는 린턴의 여동생으로, 로맨스 작인 환상에 빠져 히스클리프가 사실은 다정하며 자기한테만큼은 친절할 것이라 생각해 가문과 의절한 뒤 히스클리프와 야반도주를 한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야반도주를 성공한 뒤(여기에 모종의 음모가 있음), 오히려 이사벨라를 아래와 같이 통렬히 비웃는다. 


착각에 빠졌던 탓이야. 나를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상상하고, 내가 기사도를 발휘해 무한히 헌신해주기를 기대했던 거야. 나로서는 저 여자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보기가 어려워. 저 여자는 지금까지 계속 나라는 존재에 대해 소설 같은 상상을 펼치면서, 애초에 자기가 품었던 잘못된 인상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뒤이어 '자기만 잘 대해줄 것이다'라는 바람에서 그녀야말로 잔인한 여자라고 덧붙인다. 즉, 자기만 괜찮으면 폭군인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는 <제인 에어>에 등장한 로체스터를 대하는 제인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거친 남주에 대한 여성들의 모종의 기대, 그리고 당대의 흔한 로맨스 소설의 환상을 깨는 작용을 한다. 현실에선 폭력적이고 거친 상대는 말 그대로 '그런 사람'일 뿐, 자기만 예외일 거라는 상상, 그리고 그 사람을 갱생시킬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렇듯 로맨스 소설의 환상을 깨는 <폭풍의 언덕>의 또 다른 특징으론 저자인 에밀리 브론테의 세계관 그 자체라는 것이다. 에밀리는 다른 언니들과 달리 자신만의 세계관이 확고했다고 한다. 학교에 다니고 가정교사 일을 하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했던 언니 샬럿이었지만 에밀리는 밖보다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폭풍의 휘몰아치고 자연이 살아있던 고향의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작품인 <폭풍의 언덕>에서 그대로 살아나 문명적인 인간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거칠고 야성적인 캐릭터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또한 로맨스 적 환상을 깨려는 시도를 통해 언니가 쓴 <제인 에어>와 다른 차별성을 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폭풍의 언덕>은 영미 문학계에서 '3대 비극' 중의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며, 뛰어난 문학성에 비해 과소평가 되었다고들 하지만 몇몇 사람들 사이에선 로맨스 적 관점에서도 물론이고 구성면에서도 왜 그렇게까지 극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학은 어떠한 장르에 정확히 속해있거나 누구의 입맛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 의미 또한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그 진가를 제대로 알아볼 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작품이 될 수도 있다. <폭풍의 언덕>도 위와 같은 편견에서 벗어나 읽어보는 게 어떨까? 아무리 해도 정 이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왜?'라는 의문을 가지고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자 예의라고 본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하나의 자기애적인 사랑임과 동시에 한 번 돌풍을 일으키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사라지는 폭풍과 같다는 것이 이번에 새롭게 읽은 것에 대한 내 결론이다. 


(참고로, 번역에 있어서 문학동네 판도 나쁘지 않았다. 조지프를 비롯해 일부가 사투리를 쓰고 번역체가 너무 거칠어서 싫다고 하는데, 작품 특성상 거친 욕과 사투리가 있는 게 분위기가 살아나는 것 같아 좋았다)

인간이란 바람 부는 대로 돌아가는 풍향계 같은 존재로다! 세상과 교제를 끊고 살겠다고 작정한 나였는데, 결국 교제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곳을 발견하고 내 행운에 감사한 나였는데, 나도 참 가련한 놈이라. - P54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틀림없는 적이 아닐 경우에는 모두 친구라고 생각하면 정말 좋을 거야. 불량한 똥개 같은 표정 하지 마. 발길질을 당한 개가 자기 같은 놈은 얻어맞아 싸다는 듯 행동하면서도 실은 발길질한 사람뿐 아니라 온 세상을 증오하는 표정이잖아. - P92

"너는 벌써 캐서린을 속상하게 했어"
"속상하대?" 히스클리프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저어, 나는 어젯밤에 울었는걸" 그 아이가 응수했습니다.
"울 이유는 내가 더 많아!" - P90

"여기! 또 여기!" 캐서린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한 손으로는 자신의 가슴을 쳤습니다. "영혼이 있는 데서, 영혼인지 심장인지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있어!"
"나는 천국에서 살면 너무 불행할 것 같아. 나는 세상으로 돌려보내 달라면서 정말로 서럽게 울었어. 천사들이 화가 나서 나를 집어 던졌는데, 떨어진 자리가 폭풍의 언덕 꼭대기의 히스 밭이었어. 나는 너무 행복해서 엉엉 울다 잠이 깼어" - P130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그 애의 영혼과 내 영혼이 뭘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어. - P130

나랑 그 애를 뗴어놓겠다고 누가 그러는데? 내가 살아있는 한 은 안 돼. 누가 뭐라 해도 안 돼! 린턴 가문 사람들이 지상에서 몽땅 녹아 없어지든 말든, 나는 히스클리프랑 헤어질 수 없어. 그렇게는 못해! 그렇게는 안 해! 히스클리프랑 헤어져야 한다면 나는 린턴 부인 안 할 거야! 그 애는, 지금까지 내게 소중했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 P132

자기를 넘어서는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 내가 그냥 이런 몸뚱이일 뿐이라면, 내가 있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은 히스클리프가 겪은 고통이야. 나는 그걸 처음부터 지켜보았고 그대로 느꼈어.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 P132

히스클리프에 대한 내 사랑은 땅속에 파묻힌 변치 않는 바윗돌 같아. 눈에 뵈는 행복을 가져다부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 내가 곧 히스클리프인 거야. 그 애는 내 마음 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이쓴ㄴ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진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하면 안 돼.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어. - P133

그 애가 정말로 나를 잊는다면, 내 앞날은 죽음과 지옥이라는 두 마디로 끝나. 그애 없는 삶은 지옥이야.
린턴같이 그렇게 하찮은 인간이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여든 해를 사랑한다 해도, 내가 하루 사랑하는 것만 못하거든. 그리고 캐서린의 가슴 속은 나의 가슴 속만큼 깊은데, 그자가 그 애의 사랑을 모두 차지하겠다는 건 여물통이 바다를 담겠다는 것과 다름없지. 나만큼 사랑할 만한 것이 그자에게는 없는데, 그 애가 어떻게 사랑할 게 없는 자를 사랑할 수 있겠어? - P237

착각에 빠졌던 탓이야. 나를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이라고 상상하고, 내가 기사도를 발휘해 무한히 헌신해주기를 기대했던 거야. 나로서는 저 여자를 이성적인 인간으로 보기가 어려워. 저 여자는 지금까지 계속 나라는 존재에 대해 소설 같은 상상을 펼치면서, 애초에 자기가 품었던 잘못된 인상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으니까.  - P239

나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거든. 그것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면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 해도 억지로 해야하고, 그것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면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무엇을 본다 해도 억지로 보아야 해.... 맙소사! 나도 참 오래 싸웠구나!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는데! - P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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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3-17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오네긴님 저도 비슷한 지점들 생각했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호랑이는 용을 아직 먹지 않는다 1 - S코믹스 S코믹스
이나바 하치 지음, 천선필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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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으로 나오니 좋네요. 책도 고급스럽고 내용 역시 재미있어서 만족합니다. 2권도 빨리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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