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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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킨 이야기 / 스페이드 여왕'은 푸슈킨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얼마 전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작품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서 주인공인 제부쉬킨이 연인인 바르바라에게 받은 소설책 중 하나가 바로 이 '벨킨 이야기'이다. 뻔한 연애 소설만 읽던 제부쉬킨은 푸슈킨의 '벨킨 이야기'를 읽고 인상 깊었다고 말했는데, 나 또한 그와 같은 인상 깊음을 느끼고 싶어 읽게 되었다.


솔직히 '푸슈킨'하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물론 푸슈킨의 시는 위대하지만, 그가 러시아 문학의 일인자가 된 이유는 결코 시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산문과 소설을 통해 러시아 문학의 입지를 탄탄하게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초기작에 해당하는 '벨킨 이야기'와 '스페이드 여왕'이다.


'벨킨 이야기'는 젊고 유식한 청년 지주 '벨킨'이 생전에 썼던 기록(소설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이야기 모음집이다. 각 이야기마다 화자도 다르고, 약간 '~하더라'하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인데, 꽤 흥미로운 설정이다. 보통 화자가 여러 명이면 헷갈릴 수 있는데, 벨킨의 이야기는 그렇지가 않다. 나오는 소설마다 마치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 재미있고 화자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벨킨의 이야기에는 당시 러시아인들의 정신과 시대적 상황 또한 엿볼 수 있다.

가령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조국 전쟁 당시의 환호라든지, 러시아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문물을 중시하는 사람과의 갈등, 그리고 러시아 문학 하면 빠질 수 없는 가난하고 핍박받은 러시아 사람 특유의 웃픈 모습까지, 훗날 등장하는 러시아 대문호들의 작품들이 생각나는 캐릭터 적 특성은 과연 러시아 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푸슈킨의 문학적 위대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그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한 푸슈킨 작품의 특징은 '낭만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벨킨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나 스토리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낭만적이고 신비적이다. 가령 '발사'에서 귀족의 자존심을 거는 권총 결투에 대한 자존심, '눈보라'에서 여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위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결심한다든지, '장의사'에서 주인공 장의사가 죽은 사람들과 만난다든지, '역참 지기'에서 반강제적으로 손님이자 귀족인 남자에게 끌려가면서 흘리는 눈물이라든지, '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에서도 마찬가지로 부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진정한 사랑을 쟁취하려는 모습이라든지 등등 낭만주의 소설에서 볼 법한 개성을 중시하며 기존 체제에 맞서 서로의 감정에 솔직하려는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러나 이 벨킨 이야기가 마냥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마다 위와 같은 낭만적인 것 이외에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부분 또한 드러나는데, 가령 '발사'에서 상대를 반드시 죽이거나 크나큰 모욕을 줘야 한다는 기존의 권총 결투와 달리 주인공 '실비오'는 오랜 복수 상대를 죽이지 않고 그가 두려워하는 모습에 만족하고 떠난다. 옮긴이의 후기에선 이런 실비오의 태도를 나약하다고 했으나, 나는 오히려 위와 같은 실비오의 태도는 일반적인 권총 결투보다 더 신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사랑과 질투에 눈이 멀어 권총으로 결투를 한다는 것 자체는 이성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귀족이 아닌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때는 뭔가 어리석어 보인다. 정말 자기가 신사이고, 자신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면 더더욱 신사적인 태도로 실추된 자존심을 높여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실비오가 상대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상대가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상대를 권총을 위협하면서 두려움에 빠지는 상대의 모습만 보고 만족한 채 떠나는 실비오의 모습은 같은 이유로 상대를 죽이는 결투보다 훨씬 신사답다. 물론 푸슈킨 본인도 권총 결투로 인해 사망했지만, 그 자신도 어쩌면 결투의 이런 모순적인 부분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감정에만 치우치지 않고 나름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는 모습 또한 본 작품에서 자주 드러난다.


이외에도 이야기 끝 무렵에 충격적인 결말과 달리 다른 등장인물들이 평화롭게 산다는 묘사라든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앞의 불타는 열정과 다른 냉담함이 느껴졌다. 대표적으로 '스페이드 여왕'에서는 주인공 '게르만'이 결국엔 정신병동에 입원해 정신 착란을 일으키지만, 그와 인연을 맺었던 다른 인물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거나 '대위의 딸' 이외의 푸슈킨의 소설을 읽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추천해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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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08-30 16: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러시아에서 문학했던 것들은 참, 대책이 없어요.
왜 결투를 하고, 심지어 결투를 좋아하기까지 했는지 어이 상실이에요. 푸슈킨은 일개 서생이 현역 육군 장교하고 권총 결투를 해 죽었고, 먼저 깐족거려서 (자신도 군인이긴 했지만) 현역 소령인 상대방한테 우선 발사권을 주는 바람에 총알 한 방으로 겨우 26년 8개월 살고 숟가락 놓은 레르몬토프도 인간으로 보면 아이고, 말을 말아야지 말입니다.
이 두 사람이 늙어서 죽었다면 문학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웠겠느냐는 겁니다!!

mini74 2022-09-08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네긴님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9-08 0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네긴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