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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ㅣ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프리드리히 니체'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뭘까?
나는 니체 하면 제일 먼저 그의 대표작이라 일컫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떠오른다. 니체 전문가들 대부분은 초심자가 이 책을 읽는 걸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지만 그래도 살면서 한 번쯤은 니체의 작품을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큰맘 먹고 읽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문학과 인문학, 특히 철학에 관심이 많은 요즘, 이 두 가지 요소 모두 가지고 있는 책이 어디 없나 찾던 중이라 철학책이면서 동시에 문학 같다는 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기로 결심했다.
다 읽어 본 결과 이렇게 재미있는 책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앞서 말한 철학과 문학적 요소를 모두 충족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품은 30살이 된 주인공 '차라투스트라'가 높은 산의 동굴에서 나와 자신의 지혜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자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내려감(몰락)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는 첫 장면은 뭔가 예수의 고난과 그 이후 신이 되어 부르심(올라감)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대치되는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광대는 물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자신이 느낀 고뇌와 생각들을 독백 형식(암시)으로 외치는 차라투스트라의 모습은 난해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특유의 강렬한 감정의 분출 때문이었는데, 비유하듯이 말하는 짧고 강렬한 문장은 그 의미를 파악하면서 읽다 보면 알 수 없는 쾌감을 준다.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말이다.
때문에 작중 차라투스트라의 대사들을 읽다 보면 마치 하나의 '생명을 향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가 내내 강조하는 '뜨거운 정오'와 일명 '초인'이라 불리는 '위버멘 (Übermensch)'의 말들 역시 기존의 문학 작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뜨거운 태양의 겉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고, 만져 본 느낌이랄까.
이는 니체가 살았을 당시 상황을 생각해 봐도 파격적이었다.
니체가 살았던 19, 20세기 유럽에서는 일명 '데카당스'라 불리는 사조가 한 번 유행한 적이 있었다. 데카당스는 처음엔 인간의 예술적 심미안을 중시하고 기존에 있던 윤리와 도덕을 타파하는 식의 방식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퇴폐주의'라고 불릴 만큼 현실을 도외시한 채 오직 예술만을 탐닉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데카당스를 자신만의 철학으로 철저히 비판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디오니소스적', '아폴론적'인 분류가 이 때문에 나온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역시 이런 니체의 주장을 볼 수 있는데, 이 책의 거의 절반은 이렇게 현실(육체)을 도외시한 채 오직 예술(정신)만 탐닉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데카당스적 인간 외에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기독교적 도덕 역시 비판한다. 그들 역시 육체를 도외시한 채 오직 정신과 저편의 세계를 중시하니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생명을 향한 외침'이라고 느낀 것도 위와 같은 니체 특유의 비판 때문이었다. 그는 위버멘쉬라는 이상향적 인간을 내세우며 진정한 사람은 대지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다. 즉,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세상 모든 것에 싫증이 나 저편의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거다. 또한 위버멘쉬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발견하고 정의하는 사람이다. 기존의 도덕을 보면 대체로 신이나 절대적 선이라는 애매모호한 것들을 기준 삼아 거기에 사람들이 따르는 방식인 반면, 니체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정의하고 창조해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심지어 선과 악의 도덕적 개념도!).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만약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모든 걸 정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것이 곧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위버멘쉬는 개념을 창조해 나가는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극복'해야 한다. 한 마디로 위버멘쉬는 고통을 기꺼이, 아니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계속해서 단련해 나간다. 그렇다고 기독교처럼 순순히 고통을 참으라는 건 아니다. 위버멘쉬는 고통을 참는 게 아니라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전사처럼 적들을 베어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또한 명예를 중시해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들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게 아닌, 자신은 물론 남의 기준 역시 존중한다. 즉, 내가 이렇고 네가 그렇다면 그래, 인정한다. 만약 내 기준에 불만이 있다면 우리 정정당당하게 대결해서 담판을 내보자, 내가 지면 인정하겠다, 와 같이 말이다. 때문에 책에서도 보면 동지나 이웃이 아닌 적들에게도 친절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중 차라투스트라는 내내 '인간은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이유이며, 실제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은 왜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은가?'라며 질책하기도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도들에 의해 추앙받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역시 '하나의 넘어가야 할 산'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지를 찬양하고 스스로를 극복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은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은 물론, 당시 데카당스적 허무주의로 인해 사람들로 인해 '죽어있다'라고 여겨졌던 세상을 다시 '활기찬 생명의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든다. 여기서 말하는 희망은 구원의 희망이라기보다는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람, 세상살이에 절망한 사람, 또는 아직 세상이 두려운 사회 초년생들에게 딱 맞는 책이라고 본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비유적이고 암시적인 내용이 많아 철학이나 문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겐 매우 어려운 책일지도 모른다. 또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고 해도 잘못 이해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높은 책이다(솔직히 이 글을 쓰는 나도 혹시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섭다...ㅋㅋㅋ)(나중에 니체에 대해 배우고 이 글을 다시 읽으면 내 스스로도 이마를 '탁' 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체라는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철학의 흐름과 철학책을 많이 읽어 본 경험이 있다면 적극 추천해 드리고 싶다.
보라! 이 잔은 다시 텅 비려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의 내려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P54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살아서 신이 죽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구나! - P56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러 왔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 그대들 내면에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인간은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간청한다. 대지에 충실하라! - P57
인간이란 짐승과 초인을 연결해 주는 밧줄, 심연 위에 걸린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이 위대한 점은 그가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 있다. - P60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자신의 내면에 아직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 P63
내면에 외경심이 깃들어 있는, 강하고 참을성 있는 정신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것과 가장 무거운 것을 갈망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내가 짊어짐으로써 나의 강함을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 P75
더 이상 천상의 모래밭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 아니라,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지의 머리를 자유롭게 쳐들라! 병자와 죽어가는 자들이야말로 몸과 대지를 경멸하고, 하늘 나라와 구원의 핏방울을 꾸며낸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달콤하고 음산한 독조차도 대지와 몸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에서 달아나려고 하지만, 별은 이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나의 형제들이여, 오히려 건강한 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라! 이것이야말로 보다 솔직하고 순수한 음성이다. - P85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덕을 사랑해야 한다. 그대가 그것들을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 P91
지혜는 우리에게 개의치 말고 조롱하며 난폭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 즉 지혜는 여인이라서 언제나 용사만을 사랑한다. 그대들은 나에게 말한다. "삶은 감당하기 어렵다"고. 그런데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아침에는 자부심을 지녔다가, 저녁에는 체념하고 마는가? 삶이란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 앞에서 그렇게 나약하게 굴지 마라! 우리는 모두 짐을 지고 가는 귀여운 나귀들이 아닌가? - P97
가볍고 어리석으며 우아하고 활동적인 조그만 영혼들이 파닥거리며 나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에 유혹되어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춤출 줄 아는 하나의 신만 믿을 것이다. - P97
내가 보기에 아직 그대는 자유를 꿈꾸는 포로다. 그대의 사랑과 희망을 내버리지 마라! 고귀한 자가 모든 사람에게 방해됨을 잊지 마라! 고귀한 자는 선한 자들에게도 방해된다. 그래서 그들이 그를 선한 자라고 부를지라도, 그러면서 그를 옆에 제쳐놓으려고 한다. 고귀한 자는 새로운 것과 새로운 덕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반면에 선한 자는 낡은 것을 원하고, 낡은 것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고귀한 자가 선한 자가 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고귀한 자가 뻔뻔스러운 자, 조롱하는 자, 파괴하는 자가 되는 것이 위험하다. - P101
"정신도 쾌락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신의 날개를 잃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정신은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이것저것 갉아먹으며 몸을 더럽힌다. 한때 그들은 영웅이 될 생각이었지만, 이젠 탕아가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 영웅은 원망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 P101
선한 자나 악한 자가 모두 독을 마시게 되는 곳, 그런 자들이 모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서히 자살을 하면서, ‘삶‘이라고 부르는 곳을 국가라고 부른다. - P109
그대는 새로운 힘이자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제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귀인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가 지배하는 사상이지, 그대가 멍에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대는 멍에로부터 벗어나도 되는 그런 자인가? 세상에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자신의 마지막 가치마저 던져버리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 P127
그대는 그대 자신에게 선과 악을 부여하고, 그대의 의지를 율법처럼 머리 위에 내걸 수 있는가? 그대 자신이 그대 율법의 재판관이자 복수자가 될 수 있는가? - P128
인간은 하나의 시도였다. 아, 많고 많은 무지와 오류가 우리 몸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아직 우연이라는 거인과 투쟁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불합리와 무의미가 전 인류를 지배해 온 것이다. 나의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정신과 덕은 대지의의미에 충실하도록 하라. 모든 사물의 가치를 그대들이 새로이 정립하도록 하라! 그 때문에 그대들은 투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그대들은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P147
그대들은 나를 떠나고, 차라투스트라에게 저항하라! 인식의 인간은 자신의 적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벗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왜 나의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이제 나를 버리고 그대들을 찾도록 하라. 그리고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될 때 비로소 나는 그대들 곁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 P148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의 길 한복판에 있을 때이고, 저녁에 이르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하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로운 아침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때 아래로 내려가는 자는 자신이 건너가는 자임을 알고 스스로를 축복할 것이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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