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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 철학의 진로를 바꾼 17세기 두 천재의 위험한 만남
매튜 스튜어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본 책은 1676년 11월 어느 겨울날, 네덜란드 '헤이그'라는 곳에서 17세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논란의 중심지에 섰던 두 철학자의 짧은 만남을 시작으로 그들의 전체적인 삶과 철학 세계를 살펴보고 있다. 그 지식인이자 논란의 인물들은 다름 아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이다. 스피노자는 아시다시피 '신, 즉 자연'이라는 말로 종교계는 물론 철학계까지 깜짝 놀라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는 기존의 절대적인 선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신이 아닌, 자연이라는 현세에 존재하고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인간에게는 어쩌면 관심이 없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신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당연히 많은 사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스피노자는 기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쫓겨난 것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웠던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도 반감을 사서 평생을 몇몇 시골집 다락방을 전전하며 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를 비판한 남들보다 훨씬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았다(오전에는 렌즈를 가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쓰는 게 일상이었다).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달랐다. 그 역시 스피노자 못지않게 똑똑했지만, 조용했던 스피노자와 달리 활달하고 여러 지식에 관심이 많은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달리 기존의 신, 절대적인 영혼, 절대적인 선한 혼을 가진 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독일 하노버 지역에서 선제후 밑에서 고용인으로서 정력적으로 살아가던 라이프니츠는 좀 더 다양한 지식을 알고픈 욕망 때문인지 동시대에 살던 스피노자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책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스피노자 욕을 그렇게도 해댔지만 정작 남몰래 스피노자의 작품을 읽고 논평까지 하는 등 꽤 진지하게 연구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마침 해외로 출장하게 되었을 때 네덜란드에 들러 스피노자를 만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1676년 11월의 일이었다. 비록 아주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는 훗날 라이프니츠의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신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생각 방향을 정해줬던 것이다. 라이프니츠 하면 떠오르는 '모나드'와 '충족이유율', '예정설' 등등 신을 옹호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사실상 스피노자와의 만남에서 얻은, 기존의 신을 부정하는 것에서 오는 반감 때문이라는 거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자의 추측이다.
저자는 원래 이 짧은 만남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자료를 조사하면서 방향을 바꾸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전기 작품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사실 책을 읽다 보면 1676년에 두 사람이 만났던 일은 전체 내용에 비해 극히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이들의 전체적인 삶과 철학을 딱딱한 문체 대신 소설처럼 흥미롭게 전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재밌어 읽었던 것 같다. 비록 읽으면서 저자가 스피노자를 편애하는 것이 눈에 띄었지만(스피노자에 비해 라이프니츠를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렸다는 게 흠이다 ㅎㅎ...),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본 책은 하나의 재밌는 소설처럼 느껴질 것이고, 아직은 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초심자들에게 본 책은 일종의 입문서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책이 되리라고 본다!
신이 ‘선하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스피노자에 따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 만물이 신의 영원한 본질을 필연적으로 뒤따른 것인 한, 실제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 역시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신 안에 있다고 추론해야만 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의미에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없다고 스피노자는 상세히 설명한다. 선과 악은 상대적 개념으로서 이를테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특수한 이해관계와 용도에 상대적인 것들이다. 스피노자의 신, 다시 말해 자연 혹은 실체인 신은 완벽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선하지는 않다. - P299
<신학정치론>에서 처음 전개한 정치적인 분석에 따르면 정통의 신 개념은 전제정치의 대들보 중 하나이다. 신학자들은 미신에 갇힌 군중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심판하고, 처벌하는, 무서운 신에 대한 믿음을 조장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반면에 스피노자의 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정주의의 압제를 쉽게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몇 명의 과학자와 철학자들뿐이다. - P300
스피노자는 행복이 곧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에 따라서 행위할 때, 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할‘ 때, 그런 결과가 뒤따른다.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우리의 가장 깊은 본성에 따라서 행위하는 특권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무지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이 끌고 가는 대로 스스로를 방치해버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수동적으로 살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결론 내린다. 그러나 삶의 참된 의미는 능동적인 삶을 사는 데 있다. - P321
스피노자 시대의 지배적인 종교는 불행한 덕과 교환되는 것으로서 행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행복이 곧 덕이라고 말한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자비를 최고의 선으로 삼는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기 이익을 유일무이한 가치의 원천으로 지정하고, 자비를 그에 따른 부차적인 귀결 중 하나로 축소한다. 중교는 주로 스스로 육체적 쾌락과 단절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후한 칭송을 마련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우리가 더 많은 참된 쾌락을 가질수록, 더욱 더 완벽해진다고 말한다. 종교는 우리에게 신 혹은 지상의 대리인들에게 복종함으로써 행복이 따라 나오게 된다고 말한다. 행복은 곧 자유라는 주장에 스피노자는 자신의 목숨을 건다. - P329
"신이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아. 더군다나 인류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인류를 사랑해야 한다거나, 인류가 그를 증오하기 때문에 그가 인류를 증오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신을 사랑하는 자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신이 자기를 사랑하도록 노력할 수는 없다" -스피노자- - P330
스피노자의 신은 우리를 위해서 자연 법치에 예외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신은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그 신은 어떤 애정도 표출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행복에 관심이 있다는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 이외에 신이 우리에게 따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330
라이프니츠는 과학이 만물의 본성에 관해 우리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도대체 왜 만물의 본성이 왜 그런지에 관해서는 점점 더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같다고 이해했다. 테크놀로지가 모든 것들 안에 내재된 유용성을 드러내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럴 때 아무데서도 소위 목적이라는 것을 발견해내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인류는 자신의 힘을 무한히 확장해 가면서도 정작 그 힘을 행사하고 있는 바로 그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서는 신뢰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근대의 인류는 자기 이익을 사회의 토대로 삼음으로써 무엇이건 자신의 삶에 이익을 주는 탁월한 목표들을 갈망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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