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부터의 수기 펭귄클래식 16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조혜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자칭 도스토옙스키 광팬인 나는 예전에도 열린 책들 판으로도 읽은 적이 있다. 뭔가 살면서 비참한 감정이 들 때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찾는 것 같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우수로 괴로웠던 때에 문뜩 이 작품이 떠올랐고, 다른 판본으로 새롭게 읽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고전 문학 작품이란 으레 그러듯이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도 많이 소개해서 이제는 입이 달아질 것 같지만 그래도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 소개부터 하겠다. 저자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1821년 11월 11일/구력 10월 30일 ~ 1881년 2월 9일/구력 1월 28일)'는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가난한 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환상적인 옛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는 걸 좋아했다. 청년이 되어 군인이 되고자 공병학교로 들어간 도스토옙스키였으나 워낙 소심했던지라 잘 적응하지 못했고, 거의 책만 읽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후에 공병국에 근무했으나 1년이 못되어 그만두고 만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에겐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1846년에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러시아 문단에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그는 이어서 다른 작품도 출간하지만 예전에 비해 큰 인기를 끌지 못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모임에서 활동하던 게 정부 당국에게 들켜 체포되고 만다. 거기서 사형 선고를 받은 도스토옙스키였지만 다행히 황제의 특별 사면으로 강제 노역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등지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한다. 그때의 경험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이전에 그는 공상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유형생활 이후로부터는 인간 심리와 영혼, 그리고 종교적 영혼에 대해 심취하여 오늘날의 위대한 문호 도스토옙스키로 변모하게 된다.

오늘 소개할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이런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변화의 첫 신호탄을 알린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지하로부터의 수기> 첫 문장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히 최고라고 생각한다. 좁고 어두운 지하에서 몇 십 년 동안 살고 있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병자'이자 '악인'이라 정의 짓는 순간이 말이다. 이 구절은 마찬가지로 절망에 빠져있던 독자에게 있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준다. 말했다시피 주인공인 '지하생활자'는 지하에서 꽤나 오랫동안 홀로 살아온 인물이다. 주인공은 친척이 엄청난 유산을 자신에게 물려주고 죽어버리자 일하던 곳을 때려치우고 지하실에 틀어박혀 약 20년 가까이 살아갔다. 현재 그의 나이는 40세. 그렇게 살아가던 주인공은 문뜩 펜을 들고 수기를 작성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등장한 이 수기의 1부에선 주인공의 독백 내지 혼잣말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무슨 연극처럼 멋지게 하는 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혼란스러운 말투로 독백을 하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다. 지하생활자는 인간은 정녕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본인이 생각하는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천국을 지상에서 만들 수 있는가 대해 시종일관 비웃음을 날린다. 1부의 주요 주제라 할 수 있는 인간 이성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그는 인간은 결코 이성적일 수 없으며, 이성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즉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게 설령 2×2=4라는 절대적 진리 앞에서일지라도 사람은 언제든 자기 맘대로 2×2=5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안다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주위에서 도저히 이건 아닌데 싶은 것에 빠져드는 사람들을 본다. 가령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거나 아직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이성의 눈으론 도저히 납득 불가능한 것들을 믿는 자들을 보면 어이가 없지만, 막상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곧 진리이다. 이렇듯 이성보다 비이성적인 것들이 훨씬 인간을 지배하기 쉽다는 것이다.

해당 작품이 쓰였던 시기의 러시아엔 사회주의 사상이 한창 러시아를 휩쓸고 있던 때였다. 혁명의 씨앗을 뿌렸다고 하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품에선 이성을 앞세워 이상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 주요 주제로 나오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 속 지하생활자의 입을 통해 그것은 거짓이라고 폭로한다. 이성으로 유토피아(수정궁)를 세운다고 한들, 그게 진정 인간 삶의 목적이라 할 수 없음을, 인간에겐 이성보다 더 깊은 목적이 있음을 말이다.


그럼 인간의 진정한 목적이란 무엇일까? 지하생활자의 말이 워낙 역설적이라 완전히 믿을 순 없으나, 그건 바로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여기선 목적도 사라진다. 인간은 이성이나 어떠한 목적(유토피아)보다는 삶을 갈망한다. 그리고 이성으로 인간의 절대적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인간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폭주할 것이며, 틀에 박힌 이성적인 삶에 답답함을 느껴 '나는 인간이지, 피아노 오르간의 나사못 한 짝이 아니다!'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할 것이라는 거다. 현재의 삶보다 이상적인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인간을 저마다 개성 있는 존재(개인)로 보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단지 기계의 부품 중 한 개라 생각하는 것. 도스토옙스키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한 인물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인 지하생활자가 이렇게 사회주의, 이성주의 사상을 비난하는 행위가 어떤 통찰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지하생활자도 한때 이런 이상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으며, 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이상과 삶 사이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다. 지하생활자의 비웃음은 멀리 떨어진 제3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셈이다.

1부가 끝나고 2부인 '진눈깨비에 관한 이야기'는 주인공인 지하생활자의 과거를 다루고 있다. 약 20년 전, 그가 20대 청년이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을 다룬 것으로, 여기서 그는 신경질적인 이상주의자로 등장한다. 비록 1부와 마찬가지로 음침하고 신경질적인 주인공이지만 1840년대 '낭만주의적 사상'에 취해있었던지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에도 소설 속 일처럼 장대하고 웅대한 사건이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 주인공은 늘상 현실에 의해 이리저리 치이고, 역시나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들에게 무시당한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주인공은 곧 다른 대안거리를 찾는데, 바로 지식(사상)에 대한 우월감이었다. 저들은 무식하지만 자기는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허영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는 여전히 한낱 하급 관리이자 가난에 찌들고 자존감 낮은, 음침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날도 장교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옛 동창들에게도 무시당한 주인공은 우연히 창녀 '리자'를 만난다. 비참한 자신의 심정을 만회하고팠던 주인공은 순간 어떤 생각을 떠올린다.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자로 생각하게끔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이상적인 말로 리자에게 창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지만, 그 희망을 품고 주인공의 집을 다시 방문한 리자는 주인공의 본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사실 리자와 첫 만남 이후 이상적으로 꾸민 자신의 모습은 거짓임을 뼈저리게 느낀 주인공이 그녀에게 모든 걸 고백했기 때문이다. 이때 주인공이 내뱉는 절규는 현실에서 무시당한 채 '이상'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이상' 하나만을 붙든 채 살아온 '상처받은 인간'의 슬픔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주인공인 지하생활자처럼 현실에 무시당하고 그러한 삶(현실적인 삶)에서 유리된 채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은 심연을 볼 수 있었다. 오늘날 21세기에서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떳떳하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에서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심리와 비슷했달까. 현실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했기 때문에 보복심에 찌들어 가상공간에서라도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되려 약자들을 괴롭혀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 자기의 괴로움을 해소하는 행위,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에겐 위대한 사상과 지식이 있다며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상대를 윽박지르거나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 역시 지하생활자의 고백처럼 결국 허영심과 찌질한 자존심,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반항에 불과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그저 찌질한 히키코모리에 대한 소설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비록 주인공이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단면일 뿐, 독자인 우리는 거기에서 어떠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하생활자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적인 의미보다는 왜 그가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나도 그렇지만 옳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살면서 누구나 지하생활자와 비슷한 감정을 가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이상에 따라 살고자 했으나 현실의 벽에 마주쳐 절망하고 비관적이었을 때를 말이다. 고전의 묘미는 자신의 정신적 성장에 따라, 즉 성숙함에 따라 보는 맛이 다르다는 거다.(마치 어른이 되면서 '아기공룡의 둘리' 속 '고길동' 아저씨와 '네모바지 스폰지밥' 속 '징징이'의 심정이 점차 이해가 가듯이.. ㅠ) 작품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살면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소한 인생의 진리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도 인간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인간의 삶에 대한 갈망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어느 날 내 처지가 비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시는 분, <가난한 사람들> 이후로 도스토옙스키의 변화된 세계관을 알고 싶은 분 등등에게 추천드린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매력이 없는 사람이다....

인간이 고의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해롭고 어리석고 심지어 가장 어리석은 것을 바라는 단 한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가장 어리석은 것을 바랄 수 있는 권리와 단 하나의 현명한 것을 바라는 의무와 관계 맺지 않겠다는 권리를 확보하려는 경우다.
인간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이성과 이익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을 원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 경우에 이성을 갖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일부러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인간의 일은 실제로,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에게 나는 인간이지 오르간의 나사못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상태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인간 본연의 신체와 피를 가진 인간에 대해서조차 번거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치욕으로 여기며 전례 없는 보편적인 인간이 되는 기회를 엿본다. 우리는 곧 어떻게든 사상으로부터 태어나기를 꿈꾼다. 그들은 사상 등을 불어넣는 그런 필수적인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깊은 감동을 주는 사물들에는 흥미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난 나도 모르게 그들을 나보다 더 낮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힘, 힘이 내게 필요했어. 연기가 필요했어. 네 눈물을 얻어야 했지. 내가 모욕 받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이 그 당시에 내게 필요했던 거야! 사람들이 날 무시했어. 그렇게 나도 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었지. 사람들이 날 걸레 취급했지. 그래서 난 힘을 보여 주고 싶었어.....

사람들은 나에게 주지 않아....... 난 될 수 없었어....... 선량한 사람이!

일부러 반 주인공의 모든 특성들을 모아 놓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이 너무나 불쾌한 인상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삶과 유리된 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무나 유리되어 있어서 진정으로 ‘실제의 삶‘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떠올릴 때 참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실제의 삶‘을 거의 노동과 서비스로 간주하기 때문에 책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