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어 원전 번역본) - 죽음 관련 톨스토이 명단편 3편 모음집 현대지성 클래식 4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우섭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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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다.

오늘 소개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어째서 위대한 작가라 불리는지, 그리고 단편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장편소설 못지않은 강렬한 울림을 독자들에게 주는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아마 사람들은 지금까지 느꼈던 톨스토이와는 전혀 다른 톨스토이, 즉 잔소리나 해대는 교훈소설 작가가 아닌 '대문호 톨스토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저자 소개부터 하겠다. 저자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o Tolstoy, 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는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정치, 종교적 사상가이다. 우리에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로 유명한 작가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 사이에선 톨스토이를 문학가라기보다는 교훈적인 단편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대문호'인 만큼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부활> 등등 걸출한 작품으로도 외국에선 유명한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 러시아 '야스나야 폴라냐'라는 곳에서 부유한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고, 톨스토이는 친척 네 집에서 살았다. 위인이라는 점에서 뭔가 어렸을 때부터 바른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에 많은 방황을 겪었다. 1844년에 '카잔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도중에 중퇴를 하고 고향 영지에서 농노들을 위한 개선 사업을 펼치기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거기다 장교 시절에는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리거나 방탕한 생활을 즐기기도 했고,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심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던 1851년에 톨스토이는 형을 따라 포병 장교로서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이날의 경험으로 <유년 시절>이라는 작품을 썼고, 문인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아 본격적인 톨스토이의 작가 생활의 첫 신호탄을 날린다. 이후로도 그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진정한 삶의 의미와 종교에 대해 깊은 성찰의 시간을 겪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 그리고 사상가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 소개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중에서도 엄청난 수작으로 알려진 작품이자 작가인 톨스토이가 한평생 죽음과 삶의 고통을 바라보며 느꼈던 모든 것들이 들어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작품은 주인공인 법원 위원이자 검사였던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소식을 일리치의 직장 동료들이 듣게 되는데, 그들의 친구의 부고 소식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비게 되는 위원의 공석 자리를 누가누가 차지할까 하고 전전긍긍해 한다. 그중 한 명인 '표도르 이바노비치'는 조문을 위해 일리치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데, 집안 분위기도 직장 못지않게 모든 것이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일리치의 아내는 장례식을 할 비용 걱정과 정부로부터 더 많은 조의금을 받기 위해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부탁을 하는 등 남편의 죽음 자체에 슬퍼하는 게 아닌 앞으로 살아갈 자기 자신의 처지에 절망해한다. 일리치의 딸과 그 사위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죽음에 뭔가 성가셔하는 분위기였고, 주변 사람들 역시 일리치의 죽음에 겉으로만 슬퍼할 뿐 저마다 자기들 생각하기 바쁘다. 특히 사람들의 가장 큰 안심 거리는 바로 죽은 게 자기가 아니라 일리치라는 사실이었다. 본인은 절대 죽을 리 없다는 안심, 자기는 죽음과 멀리 있다는 착각. 흔히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말할 때 드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중간에 작품은 친구 표도르 이바노비치의 시점에서 사망한 이반 일리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바뀐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액자 구성처럼 전개해나가는 방식을 통해 그가 어떻게 사망했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는 영웅도, 그렇다고 어떤 특출난 사람도 아닌, 우리처럼 평범한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사회가 주어진 길을 따라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한 뒤 검사의 길, 법조인의 삶을 살아가던 이반 일리치. 그의 인생 역시 즐겁고 유쾌하게 흘러갔으며 사랑하는 여인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는 등 평범한 생활을 유지해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이사한 집의 리모델링을 감독하던 중 이반 일리치는 그만 옆구리에 작은 상처를 내고 만다. 처음에는 잠깐 아팠다가 말았기 때문에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으나 점차 그 옆구리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 이반 일리치는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흔히 중병에 걸렸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첫 번째로 병을 부정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리치는 아프면 아플수록 착각일 거다, 일에 집중하면 안 그러겠지, 하며 더욱 일상생활에 몰입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윽고 의사를 찾아간 그였으나 의사는 약과 처방을 내릴 뿐 '아픈 이반 일리치' 그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약을 먹고 휴식을 취하면 된다는 말과 함께 냉랭하게 그를 대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 채 점점 병이 더 심해지자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지만, 가족들은 위안은커녕 병으로 신경질적이게 된 그를 뒤에서 원망하며 제대로 된 위완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일리치에게 별것 아닌 병이라며, 착한 거짓말을 하지만 이는 일리치의 가슴에 상처를 깊게 남기는 꼴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일리치 자신도 인정하긴 싫었지만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리치가 느끼는 감정은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멀쩡한 사람도 비참해질 때가 있으니, 바로 아플 때다. 아플 때만큼은 건장한 사람도 병의 심각성을 떠나 심적으로 매우 힘들어하는 게 대다수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하는 것부터 시작해 괜히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것까지, 특히나 죽음을 앞둔 이들에겐 나를 제외한 모두가 내일이라는 삶을 향해 달려나가는 사실이 부럽고, 문뜩 자기만 혼자 이러고 있다는 것에 엄청난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마찬가지로 이반 일리치는 생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외로움'과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느낀다. 누군가 자기를 위해 울어주고, 안아주고, 아이처럼 어루만져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혼자 눈물을 흘리는 이반 일리치의 모습은 다른 의미에서 무척이나 슬펐다.


가족도, 친척도, 직장 동료들 모두 죽음 앞에 선 이반 일리치에게 어떠한 위안을 주지 못한다. 사실 이것들 모두는 일리치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신경 쓰고, 늘 좇았던 것들이다. 생전에 그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사회에서 정해진 일들을 열심히 하며 살았지만 정작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서야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모두 헛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를 위로해 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농노인 '게라심'이다. 그는 농부 겸 하인이었기 때문에 일리치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끝까지 그의 병수발을 들어준다. 심지어 화장실 수발도 들어 준 게라심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리치에게 죽음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고 성실하게, 솔직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일리치를 배려해 준다. 고통으로 울부짖던 일리치도 게라심이 오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게라심 외에도 일리치의 어린 막내아들도 아버지인 그를 가엾게 여긴다. 게라심이 이웃에 대한 '사람'을 보였다면, 막내아들은 '연민'을 보여준다. 어떠한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 막내아들은 죽음이 코앞에까지 와서 '아-! 아-! 아-!'하며 울부짖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입을 맞춘다. 이때 죽기 싫어 몸부림치던 일리치는 순간 아들의 눈물과 입맞춤에 정신을 차리게 되고, 비록 내 삶이 헛되었을지언정 사랑과 연민 앞에선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일리치는 마지막 순간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사망하면서 이야기를 끝이 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외에도 본 책에는 <주인과 일꾼>, <세 죽음> 이렇게 두 작품 또한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주인과 일꾼>은 앞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편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공포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연민을 다루고 있다. 속물적 상인인 '바실리'와 그의 농노인 '니키타'가 어느 눈 폭풍이 날리던 날에 길을 나섰다가 그 속에 갇혀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을 다룬 이 작품은 파멸이라 느껴지는 죽음이 어떻게 부활로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작중에서 바실리는 금전적 이익과 냉정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반대인 니키타를 은근히 무시하거나 부당하게 대우한다. 그러나 니키타는 이런 부당함에 꾹 참고 바실리를 끝까지 보필하는데, 심지어 바실리가 그를 버리고 눈 폭풍 속에서 말을 타고 가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기적인 바 실리였지만 결국엔 눈 폭풍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 역시 니키타처럼 그저 죽음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이른다. 그때 문뜩 바실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니키타가 추위에 떨고 있다. 그를 덮어주고 내 온기를 나눠주자'. 곧 죽으리라는 두려움에 떨었던 바 실리였건만, 니키타를 안으면서 체온을 나눠주자 순간 죽음의 두려움이 싹 가신다. 이윽고 바실리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 남을 향한 사랑은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세 죽음>은 이전 작들에 비해 초기 작품이다.

귀부인과 마부, 그리고 나무의 죽음을 다룬 이 작품은 성찰보다는 죽음에 대한 단조로운 묘사가 특징이지만 그만큼 죽음이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이를 대하는 자세에 따라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비롯해 세 작품 모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지성 클래식의 또 다른 톨스토이 관련 책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삶에서 느껴야 할 사랑과 교훈적인 부분이 주된 내용으로 다뤄졌다면, 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생명 대신 죽음으로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단편 작품들 중에서 본 작품들만큼 진지하고 차분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지하다고 해서 마냥 '엄근진'한 작품은 아니다. 성찰은 사소한 일에서도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라는 평범성 안에서 그러한 성찰이 필요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작품으로 깊은 성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무튼,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깊은 성찰을 보고 싶은 분들, 그리고 앞으로 내게도 올 수 있는 '죽음'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고 싶으신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픈 작품이다. 실용적인 값은 물론 번역의 품질 또한 우수해서 최신판 톨스토이 단편 작품들을 접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도 역시 추천드린다!


(본 서평은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


자기(게라심)는 바로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도 그런 때가 왔을 때 누구든 자기를 위해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이 힘들지 않다는 뜻을 담아 말했다. - P67

아무도 이반 일리치가 원하는 만큼 자기를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어느 순간 이반 일리치가 가장 원했던 것은-그 점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웠지만-누구라도 자기를 병든 아이처럼 가련하게 여겨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달래듯,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에게 입 맞추고,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길 원했다. - P67

이반 일리치는 울고 싶었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루만지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길 원했다. - P67

최근에 소파 등받이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누워 있을 때의 그 외로움, 북적거리는 도시와 수많은 지인, 그리고 가족들 한가운데서 느끼는 외로움, 바다 밑에도, 땅속에도 그 외로움보다 더 큰 외로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 P82

그날 식사로 나왔던 삶은 자두를 생각하다 보면, 어린 시절 쭈글쭈글한 프렌치 날자두가 떠올랐다. 그독특한 맛과 씨앗에 닿을 때 입안 가득 고인 침을 떠올렸고, 이 맛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 시절 일련의 기억이 함께 이어졌다. 보모, 형, 장난감... - P83

보이지 않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욱여넣은 검은 자루 속에서 그는 몸부림쳤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형리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듯 그렇게 기를 썼다. - P89

그에게 자기가 니키타고 니키타가 자기이며, 자기 생명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니키타 안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청각을 집중하고 니키타의 숨소리를, 심지어 코 고는 소리까지 듣는다. ‘살아 있구나, 니키타. 그것은 나도 살아 있다는 뜻이야‘ 그는 환희에 젖어 속으로 말한다. - P162

사람들 머릿속에 그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인사이동과 직무상 변화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것과 별개로, 그 부음을 들은 사람들은, 가까운 지인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늘 그렇듯, 죽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 죽은 건 그 사람(일리치)이지, 내가 아니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느꼈다.

그는 혈기왕성했고 가벼운 유흥을 좇는 성향이 있었음에도, 업무에 임해서는 침착하고 사무적이며, 심지어 엄격했다. 그러나 사회생활 면에서는 종종 장난기 많고, 재치 있으며, 한 가족처럼 왕래하던 지사와 지사 부인이 말하듯, ‘언제나 선량하고 점잖은 호인‘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 불편함이 점점 심해지더니, 아직 통증이랄 건 아니지만, 옆구리에 늘 묵직한 느낌이 자리 잡았고 기분 나쁜 상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불편한 느낌은 점점 커져서 일리치 가정에 힘겹게 찾아왔던 안락하고 품위 있는 삶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체면지레만 어렵사리 유지되었다.

보이지 않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욱여넣은 검은 자루 속에서 그는 몸부림쳤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벗어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형리의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듯 그렇게 기를 썼다. 그가 죽기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바로 그 시각 아들이 조용히 아버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죽어가는 자는 여전히 절망적으로 소리치며 양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의 한쪽 손이 아들의 머리 위에 닿았다. 아들은 그 손을 붙들어 입술에 대고 울기 시작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 손에 입 맞추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들고 아들을 보았다. 그는 아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는 아내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그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있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는 눈으로 아내에게 아들을 가리키고 말했다.

"데리고 나가... 미안해.... 그리고 당신에게도.... 미안해.... 날 용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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