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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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행인'은 '춘분 지나고까지', '마음'과 함께 '후기 에고(ego) 3부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사실 나는 '행인'보다는 '마음'을 읽으려고 했었다. '마음'은 '도련님', '그 후', '산시로'와 더불어 나쓰메 소세키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다 '행인'을 읽게 되었는데, 본 작품에서 주인공의 형이 자기 부인을 때리면서 '사람의 마음은 사소한 일로 균형을 잃어버린다'라며 인간의 본심을 시험하는 식의 대목이 나온다는 누군가의 리뷰를 보고 무작정 읽기로 하고 만 것이다. (나중에 읽고 나서는 부인이 아닌 친구를 때리면서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부인을 때리긴 했다 ;;)


그렇게 읽은 '행인'은 소문(?)과 달리 내게 많은 인상을 남겼다. 

그동안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즐겨 읽은 나조차 그의 문학 실력을 새로이 봤을 정도로 기존의 다른 작품들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에고 3부작'이라 불릴 가치가 충분한, 과잉된 자의식을 거침없이 열거하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심리가 이렇게도 예민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행인'과 관련된 리뷰들을 보면 대부분이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행인'은 타인과의 관계보다는 주인공의 형, 즉 '이치로'의 과잉된 자의식이 주된 내용이라고 보였다.


털털하고 성격 좋은 주인공 '지로'와 달리 그의 형인 '이치로'는 대학교수에다가 생각이 많은 지식인 타입의 인간이다. 그는 사소한 것에서조차도 깊게 생각하고 예민한 성격이었으며 소설이 시작된 시점에서부터 점차 바깥보다는 서재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너무 생각을 한 나머지인지 아내를 시작으로 가족 구성원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의심이란 '모두 거짓된 사람'들이며 아무도 내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치로는 아내를 비롯해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에게도 의심의 잣대를 들이밀어 결국엔 아무도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중에서 아내에 대한 의심이 제일 심한데, 동생인 지로에게 그녀의 순결함을 시험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치로만큼 생각이 깊지 않고 평범한 인간인 지로가 형수로부터 아무런 의문점을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지로에게 신경질을 내며 집안에서 둘의 관계(형수와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의심한다. 


이러한 이치로의 일련의 행동은 일반인으로선 미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계속 읽다 보면 이치로가 고의로, 즉 멀쩡한 정신에서 위와 같은 의심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중에서 이치로는 심각한 신경증 증세를 보인다. 또한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생각을 많이 한 탓인지 자의식이 매우 비대해진 상태여서 친구 앞에서도 갑자기 '나는 절대다'라느니 '고독이여!'라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신기한 점은 타인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이치로가 정작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동경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은 절대적이고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론 평범한 사람들 -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적당히 삶을 즐기는 일반인-이 부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평범하지 못할까 하는, 지식인이라면 한 번 쯤 겪어 봤을 듯한 자괴감이 이치로의 자의식에 깔려 있다고나 할까. 


사실 이치로의 독특한 성격을 말하려면 끝이 없다. 

그만큼 본 책에서는 '에고'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그 때문에 단순히 일본 문학이나 나쓰메 소세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작품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 이치로처럼 아주 예민한 감각을 지니신 어느 고독한 지식인이라면 공감이 될만한 작품이며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바이다!

내가 보기에 보통의 장남보다도 훨씬 오냐오냐 키웠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나뿐 아니라 어머니나 형수에게도 기분이 좋을 때는 엄청나게 잘하지만 일단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하면 며칠이고 언짢은 얼굴로 일부러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 앞에 나서면 또 사람이 확 바뀐 것처럼 웬만한 일에도 좀처럼 신사의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는 원만하고 좋은 반려자였다. - P104

사소한 일로 형은 자주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밝은 집안에 음침한 공기가 흘러넘치게 했다.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또 이치로의 병이 시작되었구나"하고 내게 가끔 속삭였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심복 부하로 대우받는 것이 기쁜 나머지 "버릇이니까 내버려두세요"하며 시치미를 떼던 시절도 있었다. 형의 성격이 까다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뒤에서 은밀히 무슨 일을 꾸미는 걸 싫어하는 정의심에서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나서는 그에 대해 이런 경박한 평을 하는 게 부끄러웠다. - P106

지금 내 눈앞에 있고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 그 사람의 마음을 연구하지 않고서는 안절부절못할 만큼의 필요성에 맞닥뜨린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야.
나는 여자의 용모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여자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을 봐도 부럽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의 영혼, 이른바 정신을 얻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다. - P137

"인간이 만든 부부라는 관계보다는 사실 자연이 만들어낸 연애가 더 신성하니까, 그래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좁은 사회가 만들어낸 답답한 도덕을 벗어버리고 커다란 자연의 법칙을 찬미하는 목소리만이 우리 귀를 자극하도록 남겨진 게 아닐까? 물론 그 당시에는 다들 도덕에 가세하지. 두 사람 같은 관계를 부정하다며 비난하고 하지만 그건 그 사정이 생긴 순간을 치유하기 위한 도덕에 쫓긴, 이를테면 지나가는 소나기지. 지로, 그러니까 도덕에 가세하는 사람은 일시적 승리자인 건 틀림없지만 영원한 패배자야, 자연에 따르는 사람은 일시적 패배자지만 영원한 승리자고....."

형은 이런 식으로 그림자를 밟고 힘을 쓰는 듯한 철학을 줄기차게 논했다. 그리고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기분 나쁜 안개로 온통 가두고 말았다. 나는 이 몽롱한 것을 물리치는 것이 굵은 삼노끈을 물어 끊는 것보다 힘들었다.

"지로, 너는 지금도 미래에도 영원히 승리자로 존재하려고 생각하겠지?" - P263

Keine Brücke führt von Mensch zu Mensch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는 없다.) - P375

형님에게는 갑이든 을이든 상관없다는 무던한 구석이 없네. 반드시 갑이나 을 어느 한쪽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네. 게다가 갑이라면 갑의 형태든 정도든, 색조가 형님이 생각하는 대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수긍하지 못하는 거지. 형님은 자신이 예민한 만큼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철사처럼 아슬아슬한 선 위를 건너며 생활하고 있네. 그 대신 상대도 똑같이 아슬아슬한 철사 위를 헛디디지 않고 나아가지 않으면 참지 못하지. - P380

나는 분명히 절대의 경지를 인정하네. 하지만 내 세계관이 분명해질수록 절대는 내게서 멀어지고 만다네. 요컨대 나는 도면을 펴놓고 지리를 조사하는 사람이었네. 그런데도 각반을 차고 산하를 두루 돌아다니는 현장 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하려고 무척 안달하고 있네. 난 멍청한 거네. 나는 모순되었어. 하지만 멍청한 줄도 알고 모순된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는 거네. 난 바보야.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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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6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네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오네긴 2021-08-06 18:27   좋아요 2 | URL
바빠서 몰랐는데 이렇게 당선작으로 선정될 줄이야!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오네긴 2021-08-06 18: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08-06 19: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네긴 님 축하드려요. 오네긴님 리뷰 읽고 이책 구매했는데 아직 읽기시작은 못했네요ㅜㅜ 축하드려요

오네긴 2021-08-07 17:2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