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본주의 - 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 한국 자본주의 1
장하성 지음 / 헤이북스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21세기 자본>이 던진 화두에 대한 답이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는 피케티 효과로 뜨겁다! 40대 초반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쓴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2014)이 주인공이다. 영어로 695페이지, 국내서로는 820페이지에 이르는 대단한 분량의 이 책은 201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것을 2014년 4월 하버드 대학 출판부가 출간하자마자, 전 세계 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1세기 자본』의 요체는 이렇다. “자본 수익률이 노동 수익률보다 높기 때문에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면 결국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능력 중심주의가 급격히 훼손되고 이를 토대로 한 민주사회가 망가진다.” 피케티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쥐꼬리만큼 커가는 연봉으로는 LTE 속도로 높아진 아파트 값을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어서다. 

   하지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말뿐인 푸념수준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부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본주의가 잉태되기 시작한 17세기부터 21세기 오늘날까지 무려 300여년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경제 자료와 통계를 갖고 과거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 등 20개 이상의 나라를 대상으로 세무 통계를 내고 그 추이를 수치화하여 주류경제학과 정면으로 맞섰다. 


   1968년, GM의 CEO가 벌어들인 소득은 기본급과 수당을 다 합쳐 GM 일반 노동자의 66배였다. 하지만 오늘날 월마트의 CEO는 월마트 일반 노동자 임금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번다. 그 해 월마트 창업자 가족의 총재산은 대략 900억 달러로, 이는 미국의 하위 40%, 즉 1억 2천만 명의 총소득과 맞먹는 규모였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조세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2년 4월 기준 우리나라 소득 상위 1%가 한 해 동안 벌어가는 돈은 16.6%로 38조 4천 790억 원에 달한다. OECD 국가 중 미국의 17.7%에 이어 두 번째다. 회사는 커져도 노동자들의 삶은 위축되고, 노동 생산성에 미치지 못한 실질 임금의 감소는 기업이 잘 되도 가계에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삶을 위축시키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불평등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해졌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9년부터 2008년까지 하위 10%의 월소득이 101만 원 증가하는 동안 상위 10%의 월소득은 888만원이 늘어났다.   

   피케티는 오늘날 부의 불평등 상황에 대해 소득 상위 1%에 해당하는 이들이 정치 영역과 결탁해 그들만의 리그를 구조화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 ‘세습자본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했다. 


   이 같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피케티는 두 가지 정책을 제안했다. 첫째는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고소득자 누진과세(글로벌 부유세)를 통해 소득세의 누진 구조를 강화하고, 둘째는 교육의 공공투자로 교육의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피케티의 대안에 대한 논쟁은 『21세기 자본』의 등장만큼 뜨겁다. 이코노미스트는 “마르크스보다 크다”고 호평했고,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는 “향후 10년 동안 가장 중요한 경제학 저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반대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제적 분석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장광설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정치 발상”이라고 혹평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자신이 제안한 글로벌 부유세의 실효성에 대해 “글로벌 자본세는 유토피아적인 아이디어다”라며 스스로 비현실적인 것임을 먼저 밝혔고, “가까운 미래에 자본세와 유사한 제도 도입에 동의할 나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라고 말한 바 있다.  


 

   피케티와 견해를 달리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는 책 『위대한 탈출』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성장의 유인책(인센티브)이며, 경제를 성장시키고 삶을 개선한다.”며 오늘날의 핵심 문제인 빈부격차, 즉 불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연합군의 포로수용소 탈출을 소재로 한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에서 제목을 따온 이 책은 “포로수용소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겨졌고, 또한 도중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빈곤과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인류의 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즉 “성장은 빈곤과 결핍에서 인간을 탈출시키는 원동력”이고, “불평등은 성장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성장과 진보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소득면에서 전 세계에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1981년에는 약 15억 명이었지만, 2008년에는 인류 인구가 20억 명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8.5억 명으로 감소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환산하면 빈곤인구 비율이 42%에서 14%로 빠르게 하락한 것이다. 

 


   한편 디턴 교수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피케티 식으로 잘 사는 국가를 만들려 하면, 과거의 인류가 겪었던 빈곤과 죽음을 다시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성장이 빈곤층의 경제적 희생에 의해 생겼다는, 제로섬게임처럼 생각하는 피케티의 사고가 우리 사회에 퍼지면 우리는 다시 빈곤에 빠져 허덕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본주의는 불평등 때문에 발전이 된다는 디턴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얼마 전 내한해서 강연을 했던 피케티 교수는 “불평등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효용이 있지만 너무 심해지면 성장을 저해한다. 어느 정도가 ‘과도하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현재의 불평등은 전쟁과 혁명을 촉발했던 20세기 초 수준으로 보인다.”고 반박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장하성 교수의 반론이다. 그는 최근 펴낸 책 『한국 자본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불평등 구조 문제를 이야기한 『21세기 자본』의 내용을 한국에 적용해서 우리의 불평등을 살필 수 있는가 묻고,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자답한다. 

 

   그는 나라마다 자본주의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피케티의 분석 결과를 다른 나라에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면서 피케티가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을 포함한 모든 신흥 시장 국가들에서 ‘자본수익률(r)>성장률(g)'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피케티가 구한 자본 수익률의 경우 한국은 피케티와 같은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자료가 최근에서야 공개되었기 때문에 2011년과 2012년의 자본 수익만 구할 수 있는데, 이 수치를 대입하면 ‘자본수익률(r)>성장률(g)'과 반대의 경우가 된다. 마찬가지로 35여 년의 주식, 채권, 예금과 같은 금융자산의 수익률과 부동산의 가격 상승률을 구하면 한국의 경우에는 자본 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장하성 교수는 2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거대한 자본을 축적했고, 금융자산의 비중이 큰 선진국 대상의 분석 결과로부터 도출한 피케티의 자본세 정책대안으로 한국의 불평등 구조를 바꾸겠다고 나선다면, ‘학문적 사대주의’가 반복될 위험이 있고, 만약 한국경제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이는 한국의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큰 오류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선진국과 유사한 경제학적 모순들이 표출되는 것을 목격하기만 하면 언론과 학자들이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진단하는데, 사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개혁이란 특정한 이념에 기반을 두었다기보다는 기본적인 시장질서라도 갖추자는 큰 틀에서 왔으므로 ‘신자유주의’라고 일갈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한국 실정에 맞는 장하성 교수의 소득 불평등 구조 완화책은 뭘까? 적극적인 노동정책이나 임금정책이다. 한국의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이유는 기업들이 임금으로 분배하는 몫을 줄여온 기업 행태의 문제와, 임금도 낮고 고용도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자영업 노동자의 비중이 높은 노동 구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므로 ‘초과 내부유보세’와 ‘업무 존속기간을 기준한 정규직 전환제’와 같은 정책이 우선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견해다. 마지막으로 장하성 교수는 시장의 작동 방식 때문에 불가피하게 초래된 불평등한 결과가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에 반한다면 이를 제어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뉴욕시에서 세 명의 손자를 돌보는 가난한 할아버지가 일감이 없어서 끼니를 때우기 어려웠다. 손자들이 배고파 우는 모습을 보다 못한 이 할아버지는 빵집에 들어가 빵을 훔쳤고 곧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판사는 이 노인에게 벌금형을 내렸다. 판사는 노인에 대한 단죄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한 뉴욕 시민 모두의 책임이라고 선언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벌금을 부과하였고, 재판정에 앉아 있던 방청객들에게도 벌금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즉석에서 벌금을 걷어서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을 벌금을 물고 남은 돈을 받아 쥐고는 눈물을 흘리며 법정을 떠났다. 미국 역사상 명판결로 손꼽히는 라가디아F. Laguadia 판사의 판결은 과연 무엇이 이 불쌍하고 힘없는 노인으로 하여금 빵을 훔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시장에도 ‘정의’가 필요한 때가 왔다. 우리가 어떻게 이걸 풀어나가야 할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정의가 사라져버린 시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사회 지성계에 새로운 담론을 제공하며 ‘정의’에 대한 화두를 던졌던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자신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한 말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는 시장 경제를 의심 없이 믿어 왔다. 시장경제가 공공의 이익을 성취할 주요 수단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샌델 교수는 지금과 같은 시장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시장경제가 ‘공공의 이익’을 성취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져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가치 있는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리는 그러나 이것이 ‘도구’일 뿐, 삶의 마지막이나 좋은 사회의 의미 또는 우리와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 가져야 할 미덕에 대해 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시장은 결코 윤리를 대신할 수 없고, 민주주의나 지역사회를 대신할 수 없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전하는 메시지는 시장 경제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한걸음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리뷰는 <동국대학원 신문>(186호) '인문산책'에 기고한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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