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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평점 :
고장나버린
자본주의, 지금은 과감한 수정이 필요한 때 !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이 지닌 가치가 아니라 가격으로 판단한다.”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한 말이다. 루게릭병에 걸려 의료 장비의 도움 없이는 숨조차 쉴 수 없는
상태였던 토니 주트가 육성으로 책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지난 30년간 극심한 빈부 격차와 불평등을 불러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난이었다.
오늘날 세계경제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에는 불평등(不平等, Inequality)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중산층은 공동화되고 있다. 중산층의 소득은 감소하여 부유층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1968년, GM의 CEO가 벌어들인 소득은 기본급과 수당을 다 합쳐 GM 일반 노동자의 66배였다. 하지만 오늘날 월마트의 CEO는 월마트
일반 노동자 임금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번다. 그 해 월마트 창업자 가족의 총재산은 대략 900억 달러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하위
40%, 즉 1억 2천만 명의 총소득과 맞먹는 규모였다.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조세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2012년 4월 기준 우리나라 소득 상위 1%가 한 해 동안 벌어가는 돈은 16.6%로 38조 4천 790억 원에 달한다. OECD 국가 중
미국의 17.7%에 이어 두 번째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자본주의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엉망진창으로 고장이 나버린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목소리가 속속 출현하는 가운데 40대 초반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 파리경제대학 교수가
쓴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이 단연 화제다. 201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은 유럽 사회와 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데 이어 지난 3월 미국 하버드대에서 영문판이 출간된 후에는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
유명매체에서 연일 논쟁과 인터뷰를 쏟아내고 있다.
피케티는 책 서문에서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보다 현저하게 높아지면 부의 집중이 한정 없이
계속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능력 중심주의가 급격히 훼손되고 이를 토대로 한 민주사회가 망가진다.”고 진단했다. 역사적으로
19세기 말에 부의 불평등으로 혁명까지 이어졌고, 21세기에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나보다 1,000배가 넘게 돈을 버는 부자들은 벌어들이는 1000배 만큼 펑펑 쓰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가진 돈에 비해 오히려 1을 번
나보다 너무 적게 쓰는 편이다. 부자라고 해서 하루 15 끼를 먹는 것도 아니고, 1,000벌의 팬티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벌어들인 만큼 충분히 소비해야 경제가 활성화되는 법인데, 쓰고 써도 돈이 남기에 어쩔 수 없이 저축이란 걸 한다. 그리고 그 돈은 이 나라
전체와 전 세계를 돌고 돌며 금이나 부동산, 수많은 투기 상품 등 큰 수익이 된다면 무엇이든 세계 금융 시장의 일부가 되고 결국 큰 수익을 얻어
저축하기 전보다 더 큰 돈이 되어 돌아온다. ‘돈이 돈을 부르는 시스템’ 속에서는 불평등이 극심할 수밖에 없다.
피케티는 낙수 효과(trickle down effect)로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자유 시장주의의 주장에 대하여 막연히 ‘부의 집중이 사회적
폐해를 낳는다’는 주먹구구식 주장에서 벗어나 이 책을 통해 체계적인 연구, 즉 ‘데이터’에 의한 분석으로 대응했다. 무려
300년(1712~2012년)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역사·경제 자료를 20개 이상의 나라를 대상으로 분석해 냈다.
그
결과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을 앞지르면서 부의 집중은 심화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되면 자본가는 힘들게 리스크를 감수해 가며 물건을 제조해
판매할 이유가 없어진다. 쌓아둔 돈을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 국내경제사정은 이런 가설을 여실히 증명했다. 이명박 정부는 기업들에게 법인세를 깎아주며 투자를 독려했다. 하지만
낙수효과는 작동하지 않았고, 기업의 저축이 느는 동안 가계는 빚이 늘었다. 기업들은 투자보다는 벌어들인 이득을 쌓아두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가계는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푸념 속에 가계 빚만 1천조 원을 넘어섰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불평등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해졌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79년부터 2008년까지 하위 10%의 월소득이 101만 원 증가하는 동안 상위 10%의 월소득은 888만원이
늘어났다.
피케티는 오늘날 부의 불평등 상황에 대해 소득 상위 1%에 해당하는 이들이 정치 영역과 결탁해 그들만의 리그를 구조화하고 있는데, 이는 19세기
‘세습자본주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 비판했다. 그렇다면 피케티가 말하는 자본주의를 더욱 평화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조절하는 방법은 무얼까?
세금, 즉 ‘글로벌 부유세의 도입’이다. 그는 고소득층의 재산에 전면적인 누진세를 부과해야 한다면 불평등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반적인 부의 이동을 공적 감독 아래 두자는 뜻으로 세계 생산의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이 한목소리를 내 전 지구적인 금융 재정
자산 등기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야만 협력을 거부하는 세금 피난처에 대한 제재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제적 분석이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장광설에 불과하다”고 말했고,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정치 발상”이라고 혹평했지만 소수의 엘리트가 지배하는 과두 체제로 흘러갈 위험이 현실화된 만큼 방법의 차이일 뿐 적절한 통제는
불가피해 보인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기업소득환류세제만 하더라도 세금을 통해 억지로라도 지난 정부 때 이루지 못한 ‘낙수효과’를 거두어 불평등을 줄이겠다는
제도가 아니던가. 기업소득의 일정부분을 투자나 배당, 임금증가 등으로 사용하고 남은 금액에 대해서는 벌칙으로 세금을 매긴다는 내용인데,
적용대상이 대기업 그룹사들이 주종인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소속 기업과 자기자본 500억원 초과하는 4천여 개의 법인인 점을 고려하면 기업을
법인(法人), 즉 법적(法的)인 인격(人格)이라 본다면 일종의 부유세이자 보유세의 성격을 띤다.
한편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부의 불평등은 세대 간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했다”고 역설했다. 절대 다수가
겪는 경제적 곤란은 곧 건강 악화와 교육 기회의 상실, 그리고 알코올 중독, 비만, 도박, 경범죄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우울증 증세의 증가로
이어지고, 실직과 비정규직과 같은 불완전 고용은 노동자들이 지금껏 갈고 닦아 온 기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려 결국 경제에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책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은 불평등 해소를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주인공은 오카야마
현 북쪽의 가쓰야마라는 이름도 생소한 시골마을 빵집주인이자 제빵사인 와타나베 이타루이다.
막연히 시골에 사는 농부를 꿈꾸다
서른이 넘어서야 간신히 유기농산물 도매회사에 취직한 저자는 동경하던 원산지 허위표기니 뒷돈 거래니 하는 부정을 저지르는 회사에 염증과 회의를
느끼고 퇴사하고 만다. 삶의 진정성을 찾아 헤매던 끝에 그는 ‘작아도 진정한 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침내 빵집을 열었다.
빵을
만들기 위한 밀가루 반죽과정, 그리고 균을 통해 발효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자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시간과 함께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배웠다. 아울러 빵이 만들어지는 이 모든 것은 균의 작용에 의한 ‘발효’와 ‘부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트처럼 인공배양된 균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억지로 음식으로 바꿔버리고 있었다. 균은 균인데
자연의 섭리를 일탈한 ‘부패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균이 이스트였다. 그는 곧 이 부패하지 않는 균, 이스트는 우리가 제일로
생각하는 ‘돈’을 닮았음을 깨닫는다.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부패와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스트에 의해 만들어진 부패하지 않는
음식은 다량생산을 가능하게 해서 먹거리의 가격을 낮추고 일자리를 값싸게 만든 것처럼 돈 역시 시간이 지나도 흙으로 돌아가기는커녕 영원히 부패하지
않고 돌고 도는 물건이다. 오히려 돈이 쌓이면 투자를 통해 얻는 '이윤'과 대차(금융)를 통해 발생하는 이자로 인해 끝없이 불어나는 성질마저
있다.
다루마리 빵집의 경영 이념을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이다. 그 이유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메커니즘에서 찾았다. 상품의 가격을 떨어뜨리면 노동력이
값싸지고 노동력이 값싸지면 상품 가격도 떨어진다. 이러한 끝없는 반복 속에서 상품과 노동력의 질만 떨어지고 그로 인한 이윤은 자본가만 취한다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주장했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정당한 가격에 상품을 팔았다. 이스트는 물론 인공첨가물은 절대 섞지 않고 최고의 재료들로 엄선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천연
효모를 발생시켜 정성껏 빵을 만들어 파는 대신 정당한 가격에 빵을 팔고 있다. 시골의 빵집인데 빵가격이 평균 4,000원 정도, 비싼 편이다.
하지만 일본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다루마리 빵집이 이윤을 내지 않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종업원, 생산자, 자연, 소비자 등 그 누구도
착취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장이나 종업원의 월급을 제외하고, 그 외에 남는 것은 매달 결산내용을 직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하여 공평하게 이윤을
나누어 착취가 있을 여지를 없앴다.
게다가 일주일에 사흘은 휴무이고, 매년 한 달은 장기 휴가로 문을 닫았다. 제빵사가 숙련된 기술을 가졌다는 이유로 존경받으려면 스스로 잘 쉴 수
있어야 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두
권의 책 제목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자본론(Capital)’은 다분히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같은 제목 아래
결론은 각각 다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결국 종말이 올 것이라고 결론지었지만, 피케티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자본 이윤율의 저하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글로벌 부유세’로 고장 난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고 결론 내렸다. 시골빵집 주인 역시 매월 결산 내용을 직원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착취 없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그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반면선생(反面先生)인 셈이다.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실패한 공산주의를 다시 불러오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잘못된 자본주의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점, 그리고 손을 본다면
공정성과 형평성을 충분히 고려해 공명정대해야 점이다.
실험경제학에서 사용되는 게임이론 중에 최후통첩 게임(Ultimatum game)이란 게 있다. 게임의 대략적인 내용은 기본적으로 두 명의
참여자가 등장해 돈을 분배하는데, 1번 참여자가 돈을 어떻게 분배할지 제안하면, 2번 참여자는 이를 받아들이거나 거절 할 수 있다. 즉, 2번
참여자가 '거절'을 선택하면 두 사람 모두 한 푼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2번 참여자가 '수용'을 선택하면 1번 참여자의 제안에 따라 돈이
분배된다.
만약
독자인 당신이 이 게임에 반응자로 참여하고, 필자인 내게 처음 지급되는 돈이 20만원이라고 하자. 내가 19 대 1, 즉 내가 19만 원을
갖고, 달랑 1만 원을 당신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할까? 이 게임의 룰을 알고 있는 당신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
때려치워! 이 양심 없는 새끼야.
내가
1만 원을 포기하는 대신 너도 땡전 한 푼도 갖지 못하게 할꺼야!”
순수경제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사람이든 ‘1만 원을 선택해야’만 한다. 재산이 한 푼이라도 늘어나는 쪽의 선택이 이성적이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정반대다. 그런데 행동경제학의 많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공평과 정의에 대한 인식에 의해 사람은 누구나 불공평한
제안을 받으면 두뇌의 뇌섬엽 부위가 활성화되어 먼저 화를 내고, 자신에게 불공평한 대우를 한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최후통첩 게임이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지금 불평등에 분노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란 소리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배분을 제안해야 상대가 순순히 받아들일까? 최소 12 대 8 정도라고 한다. 이 연구가 주는 교훈은 ‘별 탈 없이 좀 더
많이 갖고 싶다면 적당히 나눠줄 줄도 알라.’일 것이다(듣고 있나, 1%?).
지난
2011년, 우리는 수백만 인파가 거리를 점거하고 자신이 몸담은 억압적인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항의하는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의 월가 한복판에 1천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들어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금융자본의 탐욕을
지탄하고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해소를 촉구했고, 이 운동은 전세계 대도시에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는 정부가 전복되었고,
예맨, 바레인, 시리아에서는 ‘불평등의 세상을 뒤엎자’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
후 3년이 지난 우리의 현실을 보자. 실업은 그 어느 때보다 극심해지고, 빈부격차와 소득의 불평등은 이미 도를 넘어버렸다. 게다가 탐욕스럽게
변해버린 금융자본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전무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움직이는 금융자본주의는 결코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있다.
행복은커녕 수많은 사람들을 파산시키며 분노로 몰아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다음 차례는 누가 될까? 불 보듯 뻔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 대학 교수는 자신의 책 <불평등의 대가>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의사의 도움을 받으며 최고의 주택에서 최고 수준의 생활을 하는 상위
1%들이 돈을 아무리 써대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자신의 운명이 나머지 99%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인식이다.”라고 말했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도 “구성원
대부분이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아가는 사회는 번영할 수도, 행복해질 수도 없다.”고 수백 년 전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불평등의 해결책은 뭘까?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역임했고, <슈퍼자본주의>,<부유한
노예>,<미래를 위한 약속> 등의 명저를 쓴 로버트 라이시가 UC Berkeley 에서 했던 <부와 빈곤> 이라는
강의를 영화화 다큐멘터리의 내용 중에서 얻고자 한다.
“바로 99%를
구제하는 것이다. 우리는 낙수효과로 대변되는 트리클 다운Trickle-down 대신, 미들 아웃Middle-out 즉 중산층의 소비가 경제를
살리는 중심이 되도록 해야 한다. 지구상의 어느 곳이든 경기가 좋은 곳에서는 대규모 투자가 중산층과 빈곤층에 집중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그들이
직업 창출자이자 최종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경제의 안정은 강한 중산층에서 비롯된다. 아울러 정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친기업적인 일 역시 중산층이
성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제목은 <모두를 위한 불공평Inequality for All>이었다.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가 격주간 발행하는
출판전문저널
<기획회의>(374호) 특집원고로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