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영화관 - 그들은 어떻게 영화에서 경제를 읽어내는가
박병률 지음 / 한빛비즈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재밌는 영화 속에서 경제상식을 배우다!

 

 

지난 연말 오랜만에 대학동창들과 송년회를 가졌다. 장소는 강남 교보생명 사거리에 자리 잡은 Urban Hive 라는 건물의 1층에 있는 한 커피숍. ‘도심 속 벌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건물에 구멍이 뚫려 있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땡땡이 건물'일까(알고 보니 중앙대 교수이자 아르키움 대표인 건축가 김인철 씨의 작품이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구멍 뚫린 땡땡이 건물 자랑이 아니라, 그 날 이 건물을 본 친구들의 평가다. 말 그대로 십인십색십(十人十色)이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친구 '박(朴)'은 이 건물이 '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 역할을 해서 최고가로 임대하는데 무리가 없었을 것이고, 덕분에 땅값도 많이 올랐을 것'이라고 평가했고, 호텔에서 요리사로 있는 친구 '이(李)'는 깊은 맛을 주는 치즈 같다고 말했다. 한편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는 친구 '정(鄭)'은 말이 필요 없다는 듯 계속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했다.
끝으로 창업을 준비 중인 친구 김(金)은 '커피맛과 분위기가 좋다'며 매출을 짐작하고 있었다. 난 뭘 했느냐고? 난 그저 재미있는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직업은 정말 속일 수가 없구나‘. 그리고 곧 깨달았다. 건축가가 바라본 건물 이야기보다 요리사가 바라본 건물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미술관에 간 경제학자>
라는 책이 있다. 몇 해 전에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초로의 중년이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관람하고 있다. 그의 눈은 작품을 보지만 머리는 딴 생각을 했다. 그의 직업은 경제학 교수, 그는 작품 속에서 경제 원리를 찾았다. 미술과 경제학,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두 학문이 서로 만나자 재미있는 스토리가 되었다.

 

 

저자 최병서 교수는 주인공 경제학자 P씨를 통해 작품 하나를 보고 이에 얽힌 주제나 경제적 모티브를 생각하고, 그와 연결되는 또 다른 그림을 찾는 과정을 책에 담았다. 미술작품 속에 숨어 있는 비화와 에피소드에 딱딱하게만 여겼던 경제 원리가 녹아들어 작품소개에 버금가는 흥미를 선사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고흐의 그림은 왜 비쌀까?" 정답은 예술가는 '독점 공급자'이기 때문이다. 즉, 작품을 그린 화가가 죽으면 공급이 중단되는데, 이처럼 예술가가 창조한 하나의 작품은 그 자체로서 시장에서 유일한 것이므로 늘어나는 수요만큼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흐는 살아서는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다(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 동생 테오 덕분에 겨우 붉은 포도밭Red Vinyard at Arles를 단 돈 4백 프랑에 판 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고흐가 죽자 작품에 날개가 생기기 시작했다. 1987년 일본의 한 보험회사에 팔린 '해바라기'는 2천 475만 프랑에 팔렸고, '가셔 박사의 초상Le Portrait de Docteur gachet'은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천 250만 달러에 팔렸다. 고흐의 사망 이후 작품 값이 무려 백만 배 이상 뛴 셈이다. 약에 쓰일지 모를 개똥도 일단은 귀하고 볼 일이다.

 

 

만약 경제학자 P씨가 미술관 대신 영화관을 간다면 어떨까? 단언컨대 미술관보다 백배는 재밌다. <경제학자의 영화관>을 읽어보면 공감할 것이다. 신문기자 박병률은 어느 날 뮤지컬과 영화를 보다가 ‘어? 저건 경제학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영화 속에 숨은 경제를 찾아 글로 썼다.
저자는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경제학에 의해 움직인다고 강조한다. 경제는 인간과 인간의 접점에서 일어나듯 영화는 인간의 삶을 적나라하게 투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배경은 경제 환경을 떠날 수 없으며 영화 속 인물들 역시 경제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책 속에 들어있는 35편의 영화가 우리의 삶을 그렸다면, 영화 속에 숨은 우리네 숫자놀음은 경제학이 풀어냈다. 영화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듯 재미있고, 알쏭달쏭했던 경제 이야기는 스토리를 만나 재미있다.

 

 

 

 

우선 요즘 가장 핫hot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에는 어떤 경제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우선 영화 전반에 19세기 극심한 빈부격차가 담겨 있다. 그리고 출옥한 장발장을 피하는 사람들은 확증편향, 즉 범죄자는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선입견에 빠졌고, 신부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은촛대를 팔아 공장을 만들어 큰돈을 번 장발장에게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 느껴진다. 한편 빵 한 조각마저 구할 수 없었던 99% 서민들이 일으킨 프랑스 혁명은 자본가에 대한 저항운동이었고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전혀 뜻밖의 사태, 즉 나심 탈레브가 주창한 블랙 스완Black Swan이었다.
아내는 내게 친구는 <레미제라블>을 세 번 봤는데 볼 때 마다 울었다며 ‘나도 봐야겠다’고 재촉했고(밴드왜건 효과Band wagon Effect), 나는 ‘남들이 다 보는 건 절대 안 봐’(스놉효과)하고 감히(?) 아내에게 퉁을 놓다가 즐거운 주말 저녁에 아내 없이 홀로 라면을 끓여먹어야 했다.

 

 

지난 해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속에도 경제학은 숨어 있다. 돈이 많던 적든, 집이 크든 작든 지역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공납제는 임진왜란 이후 왜적을 대신해 백성을 괴롭힌 세금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했다. 대동법은 갖고 있는 땅에 비례해 쌀로 세금을 내는 조세법으로 소득이 많은 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발상이었다. 당연히 기득권의 저항은 거셌다. 이 같은 ‘부자증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세가 되었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반으로 한 ‘부자감세’가 대세였다. 올바른 ‘리더상’을 보여준 광해군, 아니 엄밀히 말하면 저잣거리 광대 하선은 대선이슈와 맞물린 ‘수혜주’로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한편 만화영화 <라푼젤>에서 마녀가 라푼젤을 높은 탑에 18년 동안 가둬놓은 이유는 ‘희소성의 법칙’ 때문이었다. 마녀는 라푼젤에게서 머리카락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생명력을 잃어버리기에 마녀에게 라푼젤은 희소성이 컸다. 이 희소성은 반지의 제왕과 같아서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경제를 뜨겁게 달군다. 홈쇼핑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절호의 구매기회’를 반복하고, 제품마다 ‘한정판’을 만들어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 첫사랑이 애절한 이유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답이 되고, <은교>에서 노시인 이적요가 통속소설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아이 은교에 의한 ‘넛지 효과’ 덕분이었다.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 넘었던 영화 <타이타닉>에는 희소성에 의해 같은 상품에 다른 가격을 매기는 ‘가격차별’은 내내 부자와 서민을 갈등하게 만들었고,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돈 많은 펀드매니저 상용이 연애를 아웃소싱한 배경에는 애덤 스미스의 ‘절대우위론’ 또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이 들어 있다.

 

 

1960년대초 고등학생이었던 나의 큰외삼촌은 그 시절 ‘영어천재’였다. 그 비결은 일요일 아침마다 헐리우드 영화를 하는 극장을 들어가 영화를 네 번을 보는 것. 처음은 평소처럼 한 번 보고, 두 번째는 귀를 막고 보고, 세 번째는 눈을 가리고 듣기만 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봤는데, 이때에는 영화대사를 따라 읊을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삼촌은 독학으로 스크린 영어와 팝송 영어의 원리를 먼저 깨우쳤던 것이다. 당연히 영어영문학과를 들어가 외무고시에 합격해서 외교관이 될 거라 예상했던 큰외삼촌은 가족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재수를 해서 명문대 치대에 입학한 후 졸업을 해서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슈바이처의 발자취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났다. 영어가 삼촌의 성적을 키웠다면, 영화는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데, 등장하는 영화를 읽다 보면 강단에서 저잣거리로 내려온 편한 경제학을 만나고 곧 경제학은 영화 속에도 있고, 우리의 삶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담하건대 평소보다 경제학 1미터 정도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정진홍 교수는 몇 해 전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찾으라>고 주문하며 ‘기업의 인문학 열풍’에 불을 지폈고 또 어떤 책에서는 그림과 시에서 CEO가 갖추어야할 경영 전반을 찾으라고 했다. 문사철의 인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를 통하다 보면 스마트한 창의력과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그렇다. 21세기는 컬처 비즈Culture Biz의 시대다. 영화평론가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닌 기자가 오히려 앞선 전문가들보다 더 훌륭하게 영화와 경제학을 풀어내고 있다. 아니 훌륭한 한식조리사가 되어 영화와 경제학을 잘 버무려 참기름 내음이 진동하는 전주비빔밥으로 만든 것 같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이젠 미술, 예술, 철학, 영화, 그리고 문화 이 모든 것들이 소수들을 위한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떤 직업의 사람이든 제 입맛에 맞도록 해석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언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를 살피는 의사도 나오고, 미술품 속에 나오는 건축물을 이야기하는 목수의 책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이 책 ‘열배 즐기기’를 소개할까 한다. 외삼촌의 방법을 일부 베낀 방법인데, 꽤 쓸모가 있었다. 한 꼭지의 글 제목에 소개된 영화를 먼저 본 후, 글을 읽어보자. 만약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 글을 먼저 읽은 후에 영화를 보자. 영화가 열 배는 더 재미있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경제상식은 이 책이 주는 보너스다.

 

 

<이 리뷰는 월간 금융 2월호에 실린 리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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