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지식인의 서재 - 열정적인 삶과 순수한 영혼이 담긴 곳, 서재

 

  ‘내가 읽는 것이 곧 나.What I read What I am.’란 말이 있다. ‘많지 않은 시간, 가려 읽으라‘는 선독選讀을 권하는 문장일진대 참으로 옳고도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읽다 만 내‘가 켜켜이 쌓여있다. 왜 읽었든가 살펴보니 정말 ’지금의 내‘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나를 만날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변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책을 읽으며 변해가는 나,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나를 느낌이 그지없이 즐겁기에 오늘도 책을 읽는다. 

   사람들은 남의 책에 참 관심이 많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남이 읽고 있는 책은 더 재밌어 보이나 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책을 읽다 보면 예의 책을 살피는 시선들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닌데 스마트폰 때문에 더욱 보기 힘들어졌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면 주로 그 사람 앞으로 가는 편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떻게 생긴 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살핀다. 독서하는 모습을 살피는 이유는 몰입해 읽는 그의 표정으로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늠할 수 있어서다.

   만약 심취해서 읽는 모습을 본다면 최대한 앞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는 자세를 만들어 -당연히 눈치를 채겠지만- 제목과 표지 이미지를 살피고 어떤 내용을 담았을지 상상해 본다. 그때 마다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꼭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서점에 가면 자세히 살펴보리라. 그래서 나 또한 저 표정을 경험하리라’ 다짐하지만 십 수 분 후 지하철 환승장에서 사람들과 한차례 씨름을 하고 나면 마치 그들에게 생각을 빨려버린 듯 조금 전 무엇을 생각했든가 조차 잊어버린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잊어버린 읽고 싶은 책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남의 집에 처음 가면 꼭 들리고 싶어지는 곳화장실과 서재일 것이다. 낯선 곳이 익숙해지려면 내가 그곳을 ‘읽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상대를 가늠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 중 많은 것이 화장실과 서재에 노출되어 있다. 화장실에 가는 이유는 그냥 저절로 마려워서다. 낯선 곳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동물적 배설본능에서 비롯한 때문이다. 화장실을 보면 그 집주인의 위생관을 알 수 있다.

   서재를 살피는 상대(집주인)의 내면을 훔쳐보고 싶은 관음증적 심리가 발동한 때문이다. 역시 서재를 보면 그 집주인의 지식수준과 인생관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집주인의 서재를 볼 때의 마음가짐이다. 서재를 단순히 살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기 위해’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부러워지고 싶어서’라는 점이다. 

   남의 서재는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내가 읽지 않아서 부럽고, 내가 읽었던 책은 ‘아, 그는 이것도 읽었던가. 나보다 더 깊이 있게 읽었으리라’ 싶어 부러워진다. 어쩌면 그(혹은 그녀)에게 책의 공간, 서재가 있다는 자체가 부러운지도 모른다. 그곳은 집주인이 지금껏 쌓아올린 지식의 장場이며, 생각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것과 그들의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 그래서 마냥 부럽다. ’시간을 늘릴 수 있다면, 아니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보이는 족족 그들의 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눈에 담고 가슴에 새기고 싶다’는 욕심은 남의 서재를 볼 때 마다 드는 물욕物慾이다. 추잡하다 해도 할 수 없는 내가 갖는 도둑놈 심뽀다. 

   그런 내가 우리 시대 지식인 15명의 서재를 담은 <지식인의 서재>(행성:B 잎새)를 읽었다. 책을 덮을 때까지 내 맘 속에 품었던 책 욕심을 바늘로 찌르기로 벌한다면 아마도 재봉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도 전기 재봉틀이... 


  책 속에 있는 인물들 중에 이미 알던 사람은 알아서 반갑고, 채 알지 못했던 사람은 알게 되어 반가웠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서재 앞에서 책 이야기를 한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장면은 더 없을 것이다. 그 중 유독 관심을 둔 인물은 조국 교수와 최재천 교수, 김용택 시인, 이주헌, 그리고 장진 감독. 평소 흠모하던 사람들, 이들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책은 샀을 것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책은 제 정수리에 죽비를 내리치며 자의 한계와 편향을 알려줍니다. 책은 나의 스승이자 동지이고, 친구이자 연인이며, 훌륭한 적이 되기도 하죠.” 따라 읽노라니 조국 교수가 말하는 책에는 맑고 청량한 중저음이 들리는 듯했다. 진화심리학의 늙은 수컷 침팬지 이야기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If everybody is thinking alike, then somebody isn't thinking."는 벽그림만으로 그가 진보를 택한 이유를 스누핑snooping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르게 생각하기, 도전하기, 그리고 멈추지 않기. 이 모든 것이 그가 책을 읽는 이유, 오늘을 사는 이유였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란 책을 번역하면서 국내에 최초로 통섭의 개념을 알린 최재천 교수는 서재 역시 ‘통섭원’이라 불렀다. 모든 학문이 소통하는 서재, 그는 차라리 인문학자 같았다. “어떤 책은 맛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는 철학자 베이컨의 말은 그가 책을 읽는 방식을 대신하고, 돈 대신 책이 많아 재벌이 아니라 책벌이라는 그의 말은 책사랑을 가늠케 한다.   

선박 없이 해전海戰에서 이길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책 없이 세상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 프랭클린 루즈벨트 

  난 장진 감독이 좋다. 그가 많은 영화보다 그가 더 좋다. 개구쟁이 같은 얄궂은 그의 미소가 좋고, 청량한 목소리가 좋고, 건방진 말투가 좋다. 무엇보다 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뼈와 칼이 좋다. 그가 생각하는 독서 역시 마음에 들었다. 
 

   “독서는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 어딘가에 취향으로 쌓이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말하는 언어들은 언젠가 내가 읽었던 책들의 영향으로부터 빚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정확히 누구의 어떤 책이다’라고 꼽는 건 우습죠. ‘어떤 책의 어떤 구절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라고 어느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책이란 읽히지 않으면 죽은 나무의 시체일 뿐, 그 물성物性으로는 이루는 것이 없다. 서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서재의 크기와 책의 수량에 관심두기보다 그것들의 주인장이 갖는 서재와 책, 그리고 독서에 대한 의미에 관심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변한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동양화가 이가염은 자신의 서재를 식결재識缺齋라 불렀다. 부족함을 아는 서재, 이보다 더한 서재의 이름은 없다 생각했다. 그렇다. 책을 읽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아닌,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다. 부족함을 알기에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책을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재 역시 부족함의 크기를 아는 공간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남의 서재를 보고 부러워해야 하는 것은 서재의 책들을 통해 담았을 지식의 규모가 아니라, 그들이 부족함을 인정한 겸손함의 크기가 아닐까.  

책은 청년에게 음식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

- 로마시대의 철학자, 키케로

   나루케 마코토는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원숭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사람은 책을 통해 쌓은 지식이 없고, 상상력이 빈곤한 데다, 자기만의 철학이나 주장도 있을 리 없으므로 그저 남의 생각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앵무새처럼 반복하거나 남의 행동을 따라 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면 테러리스트가 되어도 좋다‘고 말했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꼭 정치가나 의사와 같은 화려한 직업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테러리스트가 되면 어떠랴. 체 게바라처럼 낭만과 사상을 가진 테러리스트라면 그것도 근사한 일 아닌가.”

   <지식인의 서재>를 통해 각각의 인물에 두 걸음 만큼 가까워졌다. 안 그럴 것이라 다짐했건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읽어야 할 늠’으로 따로 적은 것이 또 태산 같아졌다. 나이, 직업, 성격, 취향 모두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 책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서재라는 공간에서 뭉쳤다. 난 한 켠 곁에서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그들을 마음껏 훔쳤다. 그들의 서재는 여전히 부러웠지만, 한편 난 책을 좋아하는 열다섯 명의 새로운 동지를 얻었다. 책읽는 사람들이 점점 귀해지는 세상, 제대로 책을 즐기는 이들을 15명이나 만났으니 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을까(행성B여, 복 많이 받으시라)?어디선가 그들의 글을 만난다면 난 ‘동지여, 잘 있었는가’하고 인사할 것만 같다. 이 책이 날 그렇게 뻔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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